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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유비 (정사기반)
게시물ID : history_1692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걷다가쿵해쪄
추천 : 16
조회수 : 5989회
댓글수 : 14개
등록시간 : 2014/07/07 10:57:12
삼국지좀 읽어보고 토론좀 해보셨다는 분들은 다들 아실만한 파성넷의 촉서 선주전을 바탕으로 특이 사항만 정리해서 복붙하겠습니다.
(파성넷은 공개된 토론을 위해서 정사와 진서 후한서등등을 번역해둔 카페인데 삼갤이나 삼도등등에서도 많이 인용함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하에 사용합니다. 문제가 될시 자삭하겠습니다.)
부족함이있더라도 간단한 토론이라도 해보았으면 하는 취지입니다.
기타 사자성어와 타서(위략, 한진춘추, 구주춘추, 영웅기 등등의 주석들은 되도록 생략하고 사자성어역시 생략하겠습니다.)
 
1. 유비의 출신
 
  선주(先主)는 성이 유(劉), 휘가 비(備)이고, 자(字)는 현덕(玄德)이다. 탁군(涿郡) 탁현(涿縣) 사람으로, 한(漢) 경제(景帝)의 아들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이다.
 
원수(元狩) 6년(B.C 117)에 유승의 아들 유정(劉貞)이 탁현의 육성정후(陸城亭侯)에 봉해졌으나, 주금(酎金) 문제에 좌죄되어 [주; 주금이란 매년 8월 천자가 종묘에 제사지낼 때, 제후왕이나 열후들이 부조형식으로 돕는다는 의미에서 봉헌하는 황금을 말합니다. 그런데 전한 무제 때(원수가 바로 무제 때의 연호중 하나입니다), 제후왕들의 세력을 꺾고 전제정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이 주금에 불순물이 섞여 있다거나 정해진 양에 모자란다는 죄목으로 많이 이의 작위를 빼앗습니다. 유비의 조상도 이 때 걸린 것입니다] 후작을 잃고 이로 인해 (그곳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 유비는 몰락한 방계출신이다.
 
 
2. 유비의 유년
 
  선주(先主)의 조부 유웅(劉雄), 부친 유홍(劉弘)은 대대로 주군(州郡)에서 복무했다. 유웅은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관직이 동군범령(東郡范令-연주 동군 범현의 현령)에 이르렀다. 
  선주(先 主-유비)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과 함께 신발을 팔고 자리 엮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다. 집 남동쪽 모퉁이 울타리 위에 뽕나무가 높이 자라 다섯 장(丈) 남짓 되었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잎과 가지가 무성하여 마치 거개(車蓋-수레덮개)[蓋車 ; 황태자나 황자(皇子)는 안거(安車)를 타고, 황손(皇孫)은 연거(緣車), 공·열후는 안거를 탑니다. 황자가 왕이 되면 왕청(王靑) 개거를 탑니다. 어디서 개거가 황제가 타는 수레라고 하던데, 적어도 한대에는 그런 의례는 없군요.] 처럼 보였다.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이 나무를 괴이하고 범상치 않게 여겼으며, 어떤 이는 이 집에서 응당 귀인(貴人)이 나올 것이라 했다.
 
 - 유비의 유년기에 모친과 함께 신발을 팔고 자리를 엮는 즉 돗자리를 짜서 팔아 생활을 유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종인 유덕연의 부친(유원기)의 도움으로 노식선생의 가르침을 받을수있으며 그때 공손찬과 친분을 쌓고 그를 형으로 모셨다고 나옵니다.(너무 길어지는내용들은 생략하겠습니다.
 
3. 황건적의 난
 
  영제(靈帝:168-189) 말, 황건(黃巾)이 봉기하자 주군(州郡)에서 각각 의병(義兵)을 일으켰는데, 선주는 그 부속들을 이끌고 교위 추정(鄒靖)을 좇아 황건적을 토벌하여 공을 세우고 안희위(安喜尉-중산국 안희현의 현위)에 제수되었다.
 
- 추정을 도와 황건적을 토벌 안희위에 오르게됩니다. 하지만 연의에서처럼 큰공은 아닌듯합니다. 그후 독우 사건으로 관직에서 물러나게됩니다.
 
4. 동탁 토벌
 
  대장군 하진(何進)이 도위(都尉) 관구의(毌丘毅)를 보내 단양(丹楊)으로 가서 모병하게 했다. 선주가 그와 함께 행동하다가 하비(下邳)에 이르러 적(賊)을 만났는데, 힘써 싸워 공을 세우고 하밀승(下密丞-청주 북해국 하밀현의 현승)에 제수되었다. 다시 관직을 버렸다. 그 뒤 고당위(高唐尉-청주 평원국 고당현의 현위)에 임명되었다가 (고당현)령으로 승진했다.
 
- 반동탁 연합에는 공손찬은 출병 하지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비는 반동탁 연합군에 있지않았다라는 주장이 많지만 영웅기에는 영제 말년, 유비는 일찍이 경사(京師-수도)에 있다가 그 뒤 조공(曹公-조조)과 함께 패국(沛國)으로 돌아와 무리를 모았다. 때마침 영제가 붕어하자 천하에 대란이 일었는데, 유비 또한 군을 일으키고 동탁을 토벌하는데 종군했다. 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실제로도 유비의 행적은 관직을 버렸다가 다시 관직에 오르며 행적이 묘연한 구석이 많으며 영웅기를 근거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적(賊)에게 격파되자 중랑장 공손찬에게로 달아났다. 공손찬은 표를 올려 (선주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고, 청주자사 전해(田楷)와 함께 기주목 원소(袁紹)를 막도록 했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우자 잠시 평원령(平原令-평원국 평원현의 현령)을 맡고 그 뒤 평원상(平原相-평원국의 국상. 태수급)을 겸했다. 다들아시다시피 평원태수로 겸임하게 되죠.
 
5. 도겸과 유비
 
 
조공(曹公-조조)이 서주(徐州)를 정벌하자(194년의 일) 서주목 도겸(陶謙)은 사자를 보내 전해에게 위급함을 고했고, 전해는 선주와 함께 이를 구원했다. 이때 선주는 스스로 군사 천여 명과 유주(幽州) 오환(烏丸)의 잡다한 호기(胡騎-이민족 기병)를 거느리고 있었고 또한 굶주린 백성 수천 명을 얻었다.  
서주에 도착한 후 도겸이 단양병(丹楊兵) 4천을 선주에게 보태어주자 마침내 전해를 떠나 도겸에 귀부했다. 도겸은 표를 올려 선주를 예주자사로 삼고 소패(小沛)에 주둔하게 했다. 
도겸은 병이 깊어지자 별가(別駕) 미축(麋竺)에게 말했다, 
“유비가 아니면 이 서주를 안정시킬 수 없소.” 
도겸이 죽자 미축은 주(州)의 백성들을 이끌고 선주를 영접했으나 선주는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하비의 진등(陳登)이 선주에게 말했다, 
“지금 한실(漢室)이 능지(陵遲-쇠퇴)하고 해내(海內-천하)가 뒤집어지려 하니, 공을 세우고 대사를 이루는 것은 금일에 달려 있습니다. 서주는 풍요롭고 호구(戶口)가 백만이니, 부디 사군(使君-주자사에 대한 경칭)께서 뜻을 굽혀 이 주(州)를 맡아 주십시오.” 
선주가 말했다, 
“원공로(袁公路-원술)가 가까이 수춘에 있소. 그는 사세오공(四世五公-4대에 걸쳐 삼공을 다섯 명 배출함)의 명문이고 해내가 그에게 귀부하고 있으니 가히 그에게 맡길 만하오.” 
진등이 말했다, 
“공로(公路)는 교호(驕豪-교만)하여 난을 다스릴만한 주인이 아닙니다. 지금 사군(使君)을 위해 보기(十萬) 10만을 모으려 하니, 가히 위로는 군주를 도와 백성을 구제하여 (춘추) 오패(五霸)의 업을 이루고, 아래로는 할지(割地-땅을 나누어 차지함)하여 변경을 지키며 공(功)을 죽백(竹帛)에 남길 만합니다. 만약 사군이 제 청을 들어주시지 않는다면 저 진등도 사군의 뜻에 따르지 않겠습니다.” 
북해상(北海相) 공융(孔融)이 선주에게 말했다, 
“원공로가 어찌 우국망가(憂國忘家-나라를 걱정하느라 집안일을 잊음)할 자겠소? 무덤 속에 있는 (원씨 조상의) 고골(枯骨-해골)을 어찌 개의한단 말이오? 오늘의 일은 백성이 유능한 이에게 맡기자는 것이니, 하늘이 주는 것을 받지 않고 뒷날 후회해도 늦을 것이오.”
이에 선주가 서주를 다스리게 되었다.
 
- 여기서 헌제춘추에서는 진등이 원소에게 사자를 보내었고 원소역시 "유현덕(劉玄德)은 홍아(弘雅-고아)하고 신의(信義)가 있소. 지금 서주(徐州)가 그를 즐거이 추대하니 실로 내 소망에 부합하오." 라는 답을하였습니니다.
 
6. 여포와 유비
 
  원술이 와서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우이(盱眙-하비국 우이현.=盱台), 회음(淮陰-하비국 회음현)에서 이를 막았다. 조공(曹公-조조)이 표를 올려 선주를 진동장군(鎭東將軍)으로 삼고 의성정후(宜城亭侯)에 봉하니, 이 해가 건안 원년(196년)이다. 
선주는 원술과 한 달 넘게 서로 대치했는데, 여포가 빈틈을 타 하비를 습격했다. 하비의 수장(守將) 조표(曹豹)가 배반하고 그 틈에 여포를 맞아들였다. 여포가 선주의 처자(妻子)를 사로잡자 선주는 군을 돌려 해서(海西)에 주둔했다. (영웅기에서는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하였으나 장비가 그를 죽이려하였고 조표는 여포를 불러들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유비는 이를 듣고 하비로 돌아왔으나 군졸들이 다 흩어져버리고 남은 군졸을 모아 광릉을 차지 하고 원술과 다시 싸우나 패배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영웅기에서는 유비는 장비를 남겨 하비를 지키게하였으나 장비가 그를 죽이려하였고 조표는 여포를 불러들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유비는 이를 듣고 하비로 돌아왔으나 군졸들이 다 흩어져버리고 남은 군졸을 모아 광릉을 차지 하고 원술과 다시 싸우나 패배하였다고 나와있습니다.)
양봉(楊奉), 한섬(韓暹)은 서주(徐州), 양주(揚州) 사이에서 도적질했는데, 선주가 이를 격퇴하고 모두 참수했다. 선주는 여포에게 화친을 구하고 여포는 선주의 처자를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관우(關羽)를 보내 하비를 지키게 했다.
선주는 소패(小沛)로 돌아와 다시 군사를 합쳐 만여 명을 얻었다
여포가 이를 꺼려 친히 출병해 선주를 공격했고 선주는 패주해 조공(曹公-조조)에게 귀부했다. 조공이 그를 후대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장차 패(沛)로 가서 흩어진 군졸들을 거두려 하자, (조공은) 군량을 대어주고 군사들을 보태어 동쪽으로 여포를 공격하게 했다. 여포가 고순(高順)을 보내 이를 공격하자 조공은 하후돈(夏侯惇)을 보냈으나 능히 구원할 수 없었고 고순에게 패했으며, (고순은) 다시 선주의 처자를 사로잡아 여포에게 보냈다. 
 조공은 친히 출병해 동쪽을 정벌하고 선주를 도와 하비에서 여포를 포위했다가 사로잡았다.
 
- 조조의 본거지인 연주를 공격했지만 패배한 여포는 조표와 함께 서주를 공략하는데 성공하고 이후 유비가 화친을 구하고 서주의 관문들을 직접 맡아 군사를 기르는것을 여포가 꺼려하며 유비를 공격하고 유비는 조조에게 귀부하여 조조의 지원을 받고 여포를 사로잡게됩니다.
 
7. 조조와 유비
 
  원술이 서주를 지나 북쪽으로 원소에게 가려고 하자, 조공은 선주를 보내 주령(朱靈), 노초(路招)를 이끌고 원술을 요격(要擊)하게 했는데, 도착하기 전에 원술이 병으로 죽었다. 선주가 출발하기 전, 헌제(獻帝)의 구(舅-장인) 거기장군(車騎將軍) 동승(董承)이 이르길, 황제의 의대(衣帶)를 받으니 그 속에 조공을 주살하라는 밀조(密詔)가 있었다고 했다. 선주는 아직 실행하지 못했다. 
 
- 여기서 동승의 밀서에 유비가 관여한것으로 나오고 타이밍좋게 유비가 원술을 막기위해 출정하는 동안 동승일파는 숙청당하게되며 유비는 서주를 차지하고 원소와 동맹을 맺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군세를 이기지 못하였고 청주의 원담이 유비를 맞이하게 되어 유비는 원소에게 의탁하게됩니다. 여기서 객장의 신분인지 귀부한것인지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8. 원소와 유비
 
  조공이 원소와 관도에서 서로 대치하자 여남(汝南)의 황건 유벽(劉辟) 등이 조공을 배반하고 원소에 호응했다. 원소는 선주를 보내 군을 이끌고 유벽 등과 함께 허도 아래를 공략하게 했다. 관우는 달아나 선주에게로 돌아왔다. 
조공은 조인을 보내 군을 이끌고 선주를 공격하자 선주는 원소군에게로 되돌아갔다. 은밀히 원소를 떠나고자 하여, 원소를 설득해 남쪽으로 형주목 유표(劉表)와 연결하도록 했다. 원소는 선주를 보내 본래 있던 군사들을 이끌고 다시 여남에 이르도록 하니, 적(賊) 공도(龔都) 등과 합쳐 그 무리가 수천 명에 이르렀다. 조공이 채양(蔡陽)을 보내 이를 공격했으나 선주에게 죽임을 당했다. 
조공이 원소를 격파한 후 친히 남쪽으로 선주를 공격했다. 선주는 미축(麋竺), 손건(孫乾)을 유표에게 보내 서로 소식을 전하자, 유표는 직접 교외에서 선주를 영접해 상빈(上賓)의 예의로 대우하고, 군사들을 보태어 신야(新野-형주 남양군 신야현)에 주둔하게 했다. 선주에게 귀부하는 형주의 호걸(豪傑)들이 날로 많아지자 유표는 선주의 마음을 의심해 은밀히 그를 방비했다.
 
 - 원소는 유비를 여남으로 보내어 후방을 공격하였으나 관도대전의 패배이후 유비역시 조조군을 이기지못하고 유표에게 의탁하는데 유표가 직접 상빈의 예우로 대우하며 신야를 내주는 대목이 나옵니다. 참신기한게 조조 원소 유표 쟁쟁한 군웅들은 모두 유비를 좋아하며 대접하고 써먹기위해 노력합니다. 우리가 알수없는 무언가가 있긴있나봐요.
 
9. 유표와 유비
 
  하후돈(夏侯惇), 우금(于禁) 등을 박망(博望-남양군 박망현)에서 막게 했다. 얼마 뒤, 선주는 복병(伏兵)을 두고 하루아침에 스스로 둔영을 불사르고 거짓으로 달아났는데, 하후돈 등이 이를 추격하다 복병에 의해 격파되었다. 
건안 12년 (207년), 조공이 북쪽으로 오환(烏丸)을 정벌하자 선주는 유표에게 허도를 습격하도록 설득했으나 유표는 이 계책을 쓰지 않았다 
조공이 남쪽으로 유표를 정벌하자 때마침 유표가 죽고 아들인 유종(劉琮)이 그를 대신해 서고,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했다. 
 
-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전략이라 나오는 방망전투는 유비의 작품이었으며 제갈량 역시 이때 영입하게됩니다. 제갈량은 아직 비중이 없으며 또한 방망과 허도 습격은 유비의 계책이라고 나오군요. 조조에게 계속 패한것으로 나오지만 조조가 보냈던 채양 유대 왕충 등의 장수들은 끔살하는 모습도 나옵니다. 서주에서는 원술과의 싸움에서 밀리지않는 모습을 보여주어 유비의 군재는 낮지 않다는걸 보여줍니다.
 
10. 유비와 손권
 
  선주는 번(樊)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조공이 졸지에 당도한 것을 몰랐다. (조공의 군이) 완(宛-남양군 완현)에 이르렀을 때야 이를 듣고 군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양양을 지날 때 제갈량이 선주를 설득하기를, 유종을 공격해 형주를 차지하라고 했다. 선주가 말했다,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소.”  이에 말을 멈추고 유종을 부르자 유종이 두려워하며 일어나지 못했다. 유종의 좌우(左右-주변인, 측근)와 형주인들 다수가 선주에게 귀부했다. 당양(當陽-형주 남군 당양현)에 도착했을 무렵 그 무리가 십여 만에 이르고 치중(輜重-짐수레)이 수천 량(兩)으로 하루에 10여 리 밖에 가지 못하자, 별도로 관우를 보내 배 수백 척을 타고 가서 강릉(江陵-남군 강릉현)에서 만나기로 했다. 
어떤이가 선주에게 말했다.
“의당 신속히 행군해 강릉을 보전해야 합니다. 지금 비록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있으나 갑옷을 입은 자는 적으니, 만약 조공의 군사가 도착한다면 이를 어찌 막으려 하십니까?” 
선주가 말했다. 
“무릇 큰일을 이룰 때는 필히 사람을 근본으로 삼는 법이오. 지금 사람들이 내게 귀부하는데 내가 어찌 차마 버리고 떠나겠소!”
(습착치와 여시춘추등에서 유비의 행로를 적은 기록들이있습니다.)
조공은 군비가 충실한 강릉을 선주가 먼저 점거하는 것을 두려워해, 치중(輜重)을 내버려두고 경군(輕軍-경병)으로 양양에 도착했다.  
선주가 이미 지나갔다는 것을 듣고 조공은 정기(精騎-정예기병) 5천을 이끌고 이를 추격했다. 하루 밤낮에 3백여 리를 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 이르렀다. 선주는 처자를 버리고 제갈량, 장비, 조운 등 수십 기를 이끌고 달아났고, 조공은 그의 무리들과 치중을 크게 노획했다. 
선주는 한진(漢 津)을 비껴 달려가다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沔水-한수)를 건널 수 있었고, 유표의 장자(長子)인 강하(江夏)태수 유기(劉琦)의 군사 만여 명을 만나 함께 하구(夏口-한수가 장강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선주가 제갈량을 보내 손권과 결친했다.
 
- 유비는 여포에게 그리고 조조에게 또다시 조조군에 쫓기며 처자를 버리고 도망을 갑니다. (개인적으로 창천항로를 보면 그모습을 묘사한게 떠오르네요.) 객관적인 내용은 최대한 담지않기위해 넘어가겠습니다. 유비와 유기 그리고 손권과의 결친이 시작되죠.
 
11. 적벽대전
 
  선주는 오군(吳軍)과 함께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하고, (조공의 군을) 추격해 남군(南郡)에 이르렀다. 이때 또한 질역(疾疫-역병)이 돌아 북군(北軍-조조군)에 사망자가 많자, 조공이 군을 이끌고 되돌아갔다.(여기에도 많은 황개전 제갈량전 주유전 수많은 인물들의 전에 자세한 묘사가 나옵니다.)
선주는 표를 올려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고 또한 남쪽으로 4군(四郡)을 정벌했다. 무릉(武陵)태수 김선(金旋), 장사(長沙)태수 한현(韓玄), 계양(桂陽)태수 조범(趙範), 영릉(零陵)태수 유도(劉度)가 모두 항복했다. 여강(廬江)의 뇌서(雷緖)는 부곡 수만 명을 이끌고 계상(稽顙-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함. 투항함)했다. 유기가 병들어 죽자 군하(群下-뭇 부하)들이 선주를 추대해 형주목으로 삼고 공안(公安)을 다스렸다. 손권이 점차 이를 두려워해 여동생을 시집보내 우호를 굳건히 했다. 선주가 경(京-경구京口)에 이르러 손권을 만나고, 은기(恩紀-은정)를 주무(綢繆-끈끈히 얽어맴)했다.
 
 - 간략하게 나온 적벽대전과 그후 상황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물과 뭍으로 진격하고 그 승리의 배후에는 역병또한 있었다고 나옵니다. 자세한 묘사를 보고싶으신분들은 조조전과 주유전 황개전 등등 적벽대전당시 장수전들을 살펴보면 좀더 깊이 알수있습니다. 주유전에서는 관우의 독자적인 군을 운영하는 모습니 보여지죠. 유비는 유기를 형주자사로 삼아 형남을 평정하는데 이는 확실한 명분으로 보여집니다. 손권역시 여기에 맞추어 여동생과 혼담을 맺게 됩니다. 하지만 선주전에서는(유비전) 형주에 대한 손권과 토론은 전혀 나와있지않죠.
 
12. 유장과 유비
 
  손권은 사자를 보내 함께 촉(蜀)을 취하자고 했다. 어떤 이가 의당 청을 들어주어야 한다고 하며 오(吳)는 끝내 형(荊) 땅을 넘어 촉을 소유할 수 없으니 촉 땅은 가히 우리가 차지할 수 있다고 하였다. 
형주 주부(主簿) 은관(殷觀)이 진언했다, 
“만약 오(吳)의 선구(先驅-선두, 선봉)가 된다면, 나아가서는(進) 능히 촉을 이길 수 없고, 물러나서는(退) 오(吳)가 이를 틈탈 것이니 일이 어그러질 것입니다. 지금 다만 그들이 촉을 치는 것을 도와주는 것처럼 하되, 우리가 새로이 여러 군(郡)을 점거하여 군을 일으켜 움직일 수 없다고 하면, 필시 오(吳)는 감히 우리를 넘어 홀로 촉을 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퇴지계(進退之計)를 이처럼 하면 가히 오(吳), 촉(蜀)의 이익을 거둘 수 있습니다.” 
선주가 이에 따르자 손권은 과연 (촉을 칠) 계획을 그만두었다. 은관을 올려 별가종사(別駕從事)로 삼았다.
건안 16년(211년), 익주목 유장(劉璋)은 조공이 장차 종요(鍾繇) 등을 보내 한중으로 향하여 장로(張魯)를 토벌한다는 것을 멀리서 듣고, 내심 두려움을 품게 되었다. 
별가종사 촉군(蜀郡)의 장송(張松)이 유장을 설득했다, 
"조공의 군사는 강하고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으니 만약 장로의 물자를 이용해 촉 땅을 취하려 한다면 누가 능히 막겠습니까?” 
유장이 말했다, 
“내가 이 일로 우려하고 있으나 아직 계책이 없소.” 
장송이 말했다,
“유예주(劉豫州)는 사군(使君)의 종실(宗室)이며 조공의 깊은 원수이고, 용병(用兵)을 잘하니 만약 그로 하여금 장로를 치게 한다면 필시 장로를 격파할 것입니다. 장로가 격파되면 익주가 강성해지니 비록 조공이 온다 해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유장이 이를 옳게 여겼다. 법정(法正)을 보내 4천 명을 이끌고 선주를 맞도록 하고 앞뒤로 거억(巨億)의 선물을 보냈다. 이로 인해 법정은 (선주에게) 익주를 취할 계책을 진언했다.
 
  선주는 제갈량, 관우 등을 남겨 형주를 지키게 하고는, 보졸(步卒-보병) 수만 명을 이끌고 익주로 들어갔다. 부(涪-익주 광한군 부현)에 이르러 유장이 몸소 나와 영접하니 서로 만나보고 매우 기뻐하였다. 장송이 법정을 통해 선주에게 고하고 아울러 모신(謀臣) 방통(龐統)이 진언하길, 만난 자리에서 유장을 습격하도록 권했다. 선주가 말했다, 
“이는 큰일이니 창졸간에 할 수 없소.” 
유장은 선주를 행 대사마, 영 사례교위로 추천하고 선주는 또한 유장을 행 진서대장군, 영 익주목으로 추천했다. 유장은 선주의 군사를 늘려주어 장로를 공격하도록 하고 또한 백수군(白水軍-백수는 광한군 백수현)을 지휘하도록 했다. 선주의 군사는 통틀어 3만여 명에, 수레, 갑옷, 기계, 물자가 매우 많았다. 
이 해, 유장은 성도로 돌아갔다. 선주는 북쪽으로 가맹(葭萌-광한군 가맹현)에 도착하고, 즉시 장로를 치지 않고 은덕을 후하게 베풀어 중심(衆心-민심)을 거두었다.
다음해(212년), 조공이 손권을 정벌하자 손권은 선주에게 구원을 청했다. 
선주가 사자를 보내 유장에게 고했다, 
“조공이 오(吳)를 정벌하니 오(吳)에서는 위급함을 근심하고 있습니다. 손씨(孫氏)와 고(孤-나)는 본래 순치(脣齒-입술과 이)의 관계입니다. 또한 악진(樂進)이 청니(靑泥)에서 관우와 서로 맞서고 있으니 지금 가서 관우를 구원하지 않으면 악진이 필시 대승할 것이고, 그들이 군을 돌려 주(州)의 경계를 침범한다면 장로보다 더욱 심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장로는 스스로를 지키는 적이니 족히 염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에 유장에게 군사 1만과 물자를 청하고 동쪽으로 가려고 했다. 유장은 다만 군사 4천을 허락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절반만을 주었다
장송이 선주와 법정에게 서신을 보냈다, 
“지금 대사가 거의 이루어지려 하는데, 어찌 이를 내버려두고 떠나려 하십니까!” 
장송의 형 광한태수 장숙(張肅)은 화(禍)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그 모의를 유장에게 고했다. 이에 유장이 장송을 붙잡아 참수하자, (유비와 유장 사이에) 혐극(嫌隙-서로 싫어해 벌어진 틈)이 처음 생기게 되었다 .
유장은 관문을 지키는 제장들에게 문서를 보내, 다시는 선주와 관통(關通-결탁하거나 내통함)하지 말도록 명했다. 
선주가 대노해 유장의 백수군독(白水軍督) 양회(楊懷)를 불러 무례함을 질책하며 참수했다. 이에 황충(黃忠), 탁응(卓膺)을 시켜 군을 이끌고 유장에게 향하도록 했다. 선주는 곧바로 관(關) 안으로 들어가 제장, 사졸들의 처자를 인질로 잡고, 황충, 탁응과 함께 군을 이끌고 부(涪)현으로 진격해 그 성을 점거했다. 유장은 유괴(劉璝), 냉포(冷苞), 장임(張任), 등현(鄧賢) 등을 보내 부(涪)에서 선주를 막게 했으나 모두 격파되었고, 물러나 면죽(綿竹-광한군 면죽현)에 의지했다.
유장은 다시 이엄을 보내 면죽의 제군을 지휘하게 했으나, 이엄은 무리들을 이끌고 선주에게 항복했다. 선주의 군이 더욱 강성해지자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속현들을 평정했다. 제갈량, 장비, 조운 등은 군사를 이끌고 강을 거슬러 올라와 백제(白帝), 강주(江州), 강양(江陽)을 평정하고, 오직 관우만이 남아 형주를 진수했다. 선주가 진군하여 낙(雒-광한군 낙현)을 포위했다. 이때 유장의 아들 유순(劉循)이 성을 수비했는데 공격을 받고 근 1년이 지났다.
건안 19년(214년) 여름, 낙성(雒城) 이 격파되었다.
진군하여 성도(成都-촉군 성도현)를 포위한 지 수십 일 만에 유장이 성을 나와 항복했다
 
- 정사 선주전에서는 유비와 유장의 불화로 인해 일어난 싸움이라고 기록된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싸움역시 간략하게 적혀있으며 타 기록들의 주석들이 있지만 정사를 기반으로한 객관적인 사실을 쓰고있기에 과감히 생략하고있습니다. 형주의 청니대치가 나왔네요. 이 청니대치도 토론이 많이나왔죠. 대치로만끝났다와 기록의 부실로 적벽이후 형주전투의 일부분이 넘어온것이다 악진 문빙 소비가 관우를 상대로 국지전에서 승리하였다 등등의 이야기가많죠.
 
13. 익양대치 그리고 한중전
 
  촉이 부유하고 풍성하니 선주는 주연을 베풀어 사졸들을 크게 대접하고 촉성(蜀城) 중의 금은을 취해 제장들에게 나누어주고 곡식과 비단은 되돌려 보냈다. 
선주는 또 익주목(益 州牧)을 겸했는데(영 익주목), 제갈량을 고굉(股肱-신임하는 중신), 법정을 모주(謀主-주요한 모사), 관우, 장비, 마초 등을 조아(爪牙-용맹한 무장), 허정(許靖), 미축(麋竺), 간옹(簡雍)을 빈우(賓友-빈객 같은 벗)로 삼았다. 동화(董和), 황권(黃權), 이엄(李嚴) 등은 본래 유장이 임용했고, 오일(吳壹), 비관(費觀) 등은 또한 유장의 혼친(婚親-인척)이고, 팽양(彭羕)은 또한 유장에게 배척되었고, 유파는 예전에 기한(忌恨-증오하고 원망함)한 자이나, 이들 모두를 현임(顯任-현요직)에 두어 그 기량과 재능을 다하게 하니, 뜻있는 선비치고 다투어 힘쓰지 않는 이가 없었다.
건안 20년(215년), 손권은 선주가 이미 익주를 얻었다 하여, 사자를 보내 형주를 돌려받고자 한다고 통보했다. 선주가 말했다, 
“양주(涼州)를 얻으 형주(荊州)를 주겠소.” 
손권이 분노하여, 여몽을 보내 장사(長沙), 영릉(零陵), 계양(桂陽)의 세 군(郡)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선주는 군사 5만을 이끌고 공안(公安)으로 내려가고, 관우에게 익양(益陽-장사군 익양현)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 해, 조공이 한중을 평정하자 장로는 파서(巴西)로 달아났다. 선주가 이를 듣고 손권과 화해하니, 형주를 분할해 강하, 장사, 계양은 동쪽(손권)에 속하게 하고, 남군, 영릉, 무릉은 서쪽(유비)에 속하게 하고는, 군을 이끌고 강주(江州-파군 강주현)로 돌아왔다. 황권을 보내 군을 이끌고 가서 장로를 맞이하게 했으나 장로는 이미 조공에 항복한 뒤였다. 
조공은 하후연, 장합을 한중에 주둔하게 하고, 여러 번 파(巴)의 경계를 침범했다.
선주는 장비에게 명해 탕거(宕渠-파군 탕거현)로 진병하게 하자, 와구(瓦口)에서 싸워 장합 등을 격파했다. 장합은 군사를 거두어 남정(南鄭-한중군 남정현)으로 돌아갔고, 선주 또한 성도로 돌아갔다.
건안 23년(218년), 선주가 제장들을 이끌고 한중으로 진병했다. 장군 오란(吳蘭), 뇌동(雷銅) 등을 나누어 보내 무도(武都-양주 무도군)로 들어가게 했으나 모두 조공의 군대에게 함몰되었다. 선주가 양평관(陽平關)에 머물며 하후연, 장합 등과 서로 맞섰다. 
건안 24년(219년) 봄, 양평에서 남쪽으로 면수(沔水)를 건너 산을 따라 점차 전진하여 정군산(定軍山)에 영채를 세웠다. 하후연이 군을 이끌고 와서 그 땅을 다투었다. 선주는 황충에 명해 높은 곳에 올라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이를 공격하게 하여 하후연군을 대파하고, 하후연과 조공이 임명한 익주자사 조옹(趙顒) 등을 참수했다. 
조공이 장안으로부터 친히 대군을 이끌고 남쪽을 정벌했다. 선주가 멀리서 이를 헤아려 말했다, 
“비록 조공이 온다해도 어쩔 수 없을 것이니 내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차지할 것이다.” 
조공이 도착하자 선주는 군사들을 모아 험고한 곳을 지키고 끝내 교봉(交鋒-교전)하지 않자 (조공이) 여러 달이 지나도 이를 함락하지 못하고 사망자가 날로 많아졌다. 
여름, 조공은 과연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선주가 마침내 한중을 차지했다. 유봉(劉封), 맹달(孟達), 이평(李平) 등을 보내 상용(上庸)에서 신탐(申耽)을 공격했다.
 
- 유명한 익양대치 이후 손권과 형주합의 그리고 한중전투 이후 상용까지 점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14. 한중왕 유비
 
  가을, 군하(群下)들이 선주를 올려 한중왕(漢中王)으로 삼고, 한나라 황제에 다음과 같은 표(表)를 올렸다.
 
- “평서장군(平西將軍) 도정후(都亭侯) 신(臣) 마초(馬超), 좌장군(左將軍) 장사(長史) 영(領) 진군장군(鎭軍將軍) 신 허정(許靖), 영사마(營司馬) 신 방희(龐羲), 의조종사중랑(議曹從事中郎) 군의중랑장(軍議中郎將) 신 사원(射援), 군사장군(軍師將軍) 신 제갈량(諸葛亮), 탕구장군(盪寇將軍) 한수정후(漢壽亭侯) 신 관우(關羽), 정로장군(征虜將軍) 신정후(新亭侯) 신 장비(張飛), 정서장군(征西將軍) 신 황충(黃忠), 진원장군(鎭遠將軍) 신 뇌공(賴恭), 양무장군(揚武將軍) 신 법정(法正), 흥업장군(興業將軍) 신 이엄(李嚴) 등이 120인이 상언합니다. (이하 한중왕에 즉위해야하는 타당성에 대한 내용들과 표의 내용들은 생략하겠습니다.)
 
- 한중왕 즉위에 관련된 내용들입니다.
 
15. 관우의 죽음 그리고 황제 유비
 
  이때 관우가 조공의 장수 조인(曹仁)을 공격하고, 번(樊)성에서 우금(于禁)을 사로잡았다. 갑자기 손권이 관우를 습격해 죽이고 형주를 차지했다.
 건안 25년(220년),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존호(尊號)를 칭하고 연호를 고쳐 황초(黃初)라고 했다. 혹 전해 듣기로 한나라 황제가 해를 입었다 하니, 이에 선주는 발상(發喪)하여 상복을 입고, 시호를 추존해 효민황제(孝愍皇帝)라 했다. 이 이후로 여러 곳에서 뭇 길조들이 있다고 말하여 해와 달처럼 서로 잇대었다.(日月相屬) 
 이 때문에 의랑 양천후(陽泉侯) 유표(劉豹), 청의후(靑衣侯) 상거(向擧), 편장군 장예(張裔), 황권(黃權), 대사마 속(屬) 은순(殷純), 익주 별가종사 조작(趙莋), 치중종사 양홍(楊洪), 종사좨주 하종(何宗), 의조종사 두경(杜瓊), 권학종사(勸學從事) 장상(張爽), 윤묵(尹黙), 초주(譙周) 등이 상언했다.(이하 황제즉위를 해야하는 이유와 정당성등을 서술한것인데 생략하겠습니다.)
장무(章武) 원년(221년) 여름 4월, 대사령을 내리고 연호를 고쳤다. 제갈량(諸葛亮)을 승상(丞相), 허정(許靖)을 사도(司徒)로 삼고, 백관(百官)을 두고 종묘(宗廟)를 세워 고황제 이하 선조들에게 협제(祫祭-멀고 가까운 선조를 함께 크게 제사지냄)했다.
5월, 황후(皇后) 오씨(吳氏)를 세우고 아들 유선(劉禪)을 황태자로 삼았다.
6월, 아들 유영(劉永)을 노왕(魯王), 유리(劉理)를 양왕(梁王)으로 삼았다. 거기장군 장비(張飛)가 좌우(左右-주변인)에 의해 해를 입었다. 
 
- 관우의 죽음에 대해서 간략히 나왔네요. 그리고 황제가 됩니다. 이떄 제갈량은 승상이 되는데 제갈량의 관직을 보면 한중왕때는 군사장군이었습니다. 황제에 등극하면서 제갈량은 승상에 임명합니다. 유비의 신뢰와 신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인사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분명 한중왕 즉위에는 직위상 마초와 허정 방희 등등 제갈량보다 높은 관직에 있던 출중한 인물들이 있었음에도 제갈량이 승상에 임명된것은 능력보다는 신뢰가 기본이 있었기에 가능하지않았을까 싶습니다. 다른 내용과 사례를 들고싶지만 주관적인 판단과 주장이 들어갈거같아 생략하겠습니다.
 
16. 이릉대전
 
  당초 선주는 손권이 관우를 습격한 일에 분노하여 장차 동쪽을 정벌하려 했었다. 이에 가을 7월, 마침내 제군(諸軍)을 이끌고 오(吳)를 정벌했다. 손권은 서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으나 선주는 몹시 성내며 허락지 않았다. 오의 장수 육의(陸議-육손), 이이(李異), 유아(劉阿) 등은 무(巫-형주 남군 무현), 자귀(秭歸-남군 자귀현)에 주둔했다. 오반(吳班), 풍습(馮習)이 무(巫)현에서부터 이이 등을 공파(攻破)하고 자귀에 주둔했다. 무릉(武陵)의 오계만이(五谿蠻夷)가 사자를 보내 군사를 청했다.
장무 2년(222년) 봄 정월, 선주군(先主軍)은 자귀로 돌아오고, 장군 오반(吳班), 진식(陳式)의 수군(水軍)은 이릉(夷陵-남군 이릉현)에서 장강을 끼고 동서 연안에 주둔했다.
2월, 선주가 친히 제장들을 이끌고 자귀에서 진군하여, 산을 따라 고개를 넘어 이도(夷道-남군 이도현) 효정(猇亭)에 주둔했다. 한산(佷山)에서 무릉으로 통하여 시중 마량(馬良)을 보내 오계만이를 위로하자, 이들이 모두 서로 잇따르며 호응했다. 진북장군 황권은 장강 북쪽의 제군을 감독하며 이릉도(夷陵道)에서 오군(吳軍)과 서로 맞섰다.  
여름 6월, 누런 기운이 자귀에서부터 10여 리 되는 곳에서 보였는데 그 넓이가 수십 장에 이르렀다. 그 10여 일 뒤, 육의(陸議)가 선주군을 효정에서 대파하고, 장군 풍습(馮習), 장남(張南) 등이 모두 전몰했다. 
선주는 효정에서 자귀로 돌아와 흩어진 군사들을 수합(收合-거두어 합침)하여 마침내 배를 버리고 육로로 어복(魚復-익주 파군 어복현)으로 돌아왔고, 어복현을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오(吳)에서는 장군 이이, 유아 등을 보내 선주군을 뒤쫓게 하여 남산(南山)에 주둔했다. 
 
- 대망의 이릉전투 입니다.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형남으로 출병 무릉 만족까지 가세한 전투였습니다. 6월의 날씨가 원망스럽기만한 유비는 대패를 하고 돌아오게됩니다.
 
17. 유비의 죽음
 
  가을 8월, 군사를 거두어 무(巫)현으로 돌아왔다. 사도 허정이 죽었다.
겨울 10월, 승상 제갈량에게 조령을 내려 성도의 남북 교외에서 영건(營建)하도록 했다. 손권은 선주가 백제(白帝)에 머문다는 것을 듣고 심히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선주가 이를 허락하고 태중대부 종위(宗瑋)를 보내 보명(報命-답례)했다. 
겨울 12월, 한가(漢嘉)태수 황원(黃元)이 선주의 병이 깊다는 것을 듣고 군을 일으켜 거수(拒守-막아서 지킴)했다.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영안에 도착했다.
3월, 황언이 진병하여 임공현(臨邛縣-촉군 임공현)을 공격했다. 장군 진홀(陳曶) 을 보내 황원을 토벌했다. 황원은 군이 패하고 장강을 따라 내려갔는데, 그 친병(親兵)에게 결박되어 산 채로 성도로 보내져 참수되었다. 선주는 병이 깊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탁고(託孤-고아를 맡김)하고 상서령 이엄(李嚴)이 이를 돕게 했다. 
여름 4월 계사일, 선주가 영안궁(永安宮)에서 조(殂)했다. 그때 나이 63세였다.
제갈량이 후주에게 상언했다 
- “엎드려 생각건대, 대행황제(大行皇帝-대행은 제왕이 죽은 후 시호를 정하기 전 임시로 부르던 호칭)께서는 인(仁)에 힘쓰고 덕(德)을 세워 (인, 덕으로) 부도(覆燾-뒤덮고 널리 비춤)함이 무궁했으나 하늘이 어여삐 여기지 않아 오래도록 침질(寢疾-중병으로 앓아누움)하시더니 이번 달 24일에 홀연 승하(升遐)하셨습니다. 신첩(臣妾)들이 부르짖으며 우니 마치 죽은 부모의 상을 치르는 것 같습니다.  
이에 유조(遺詔-임금의 유언)를 돌아보니, 상을 치르는 일에는 대종(大宗)을 염려해 그 동용(動容-거동과 몸가짐)에 더하고 뺌이 있었습니다. 백료(百寮-백관)들은 발상하여 사흘을 채우면 상복을 벗고 매장하는 날에 이르러 다시 예법에 따르게 하고, 군국(郡國)의 태수, 상(相), 도위(都尉), 현령, 현장들은 사흘이 지나면 상복을 벗으라 했습니다. 신 제갈량은 직접 칙계(敕戒)를 받았으므로 신령(神靈)을 두려워하여 감히 이를 어길 수 없습니다. 신이 청컨대, 선하(宣下-조령을 내림)해 봉행(奉行)하시기 바랍니다.”
5월, 재궁(梓宮-임금의 관)이 영안에서 성도로 돌아왔고, 시호를 소열황제(昭烈皇帝)라 했다. 
가을 8월, 혜릉惠陵)에 매장했다.
 
- 이렇게 유비의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황손이지만 서민처럼 태어나 자라온 한 영웅의 일대기라고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기록들로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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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오베의 유비에 관한 사실이라는 글을 보고 기본적인 정사를 바탕으로 사실을 알았으면 하는 마음에 이렇게 글을 적었습니다.
양도 양이지만 읽기도 어려울거 같네요. ㄷㄷ
주석들도 최대한 배제 하고 선주전 내용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가장 객관적이고 신뢰성있는 자료라고 개인적으로 생각을 했구요.
(주석을 인용하게 되면 배송지와 영웅기가 다르다 화양국지와 상이한다 이런 많은 이야기들이 나오고 주석때문에 신뢰할수없다는 이야기가 나오는건 별로 안좋아서요 ㅎ 그런건 토론할때 다시 한번 찾아 쓰시구요!)
이를 바탕으로 이런저런 추론을 하면 좋을거같아서요.
하나 하나 읽어보면서도 소설과 대응되고 또 다른 기록들과도 비교해서 보면 더 재밌는 사실이 나올거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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