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한국 온라인게임 시장은 ‘혼돈’ 그 자체였다. [리니지]를 시작으로 탄탄대로를 달렸던 한국게임은 블리자드의 [월드오브워크래프트]를 맞아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2005년 1월 국내 오픈한 와우는 외국게임에 철저히 배타적이었던 한국시장의 문을 깨고 입성했다. 한국형 MMORPG들은 이 무지막지한 점령군 앞에서 약한 속살을 드러냈다. [리니지]류의 게임만 만들어온 개발자들은 [와우]가 보여준 엄청난 콘텐츠에 망연자실했다. 이후 한국 온라인게임 시장은 ‘와우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장르 간 경쟁도 치열했다. 캐주얼게임의 인기가 주춤하고, FPS와 MMORPG가 시장의 패권을 놓고 격돌했다. [서든어택]의 장기집권을 종식시키기 위해 수많은 게임들이 출사표를 던전다. 격동의 시기, 한국게임의 대표선수 ‘엔씨소프트’는 전에 없는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거듭된 흥행실패로 회사가 위기를 맞았고, 기술유출 사건으로 프로젝트 자체가 무산되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다. [아이온]이 나올 2008년까지 엔씨소프트는 뼈를 깎는 자기혁신의 기로위에 놓였다. [아이온]은 이런 난세를 정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게임이다.
2004년, [리니지2]의 성공은 한국 MMORPG 시장을 한껏 고무시켰다. 중국에 수출되어 큰 성공까지 거뒀다. 한국게임의 주가는 덩달아 올랐다. EA, THQ, 유비소프트 등 글로벌 메이커들도 한국 온라인게임 배우기에 열을 올렸다. 한국게임 앞엔 탄탄대로가 열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낮 신기루에 불과했다. 한국게임은 오만에 빠졌다. 하나같이 [리니지2]의 겉모습만 본떠서 고만고만한 아류작들을 양산했다. 개발 규모는 커졌지만 시장을 이끌만한 혁신적인 작품이 없었다. ‘빅3’의 실패는 한국 MMORPG를 벼랑 끝까지 몰았다. 2004년, 당대 최고 개발사로 불리는 ‘넥슨’, ‘그라비티’, ‘웹젠’이 “타도! 리니지”를 외치며 엔씨소프트에 도전장을 냈다. [제라], [그라나도 에스파다], [썬 온라인], 하나같이 천문학적인 개발비와 인력이 투입된 블록버스터 게임이었다.
그러나 허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빅3’의 성적은 참담했다. 잦은 버그와 운영미숙, 기대 이하의 콘텐츠는 화려한 명성을 ‘빛 좋은 개살구’로 만들었다. 2006년부터 차례로 오픈한 ‘빅3’는 제대로 실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실패의 대가는 가혹했다. 넥슨은 창사 이래 최초로 게임을 중단하는 실패를 겪었다. 웹젠은 [썬 온라인] 실패 후 기업이 휘청거릴 정도로 매출에 타격을 받았다. 한빛소프트도 [그라나도 에스파다] 이후 줄 곳 내리막길을 걸었다. 게임사뿐만 아니다. 빅3 실패는 흥행작 가뭄으로 이어졌다. 2006년부터 2007년까지 2년 동안, 시장을 리드할 흥행작이 하나도 없었다. 나오는 게임마다 연전연패였다. 이런 극심한 가뭄 속에서 오직 블리자드의 [와우]만 승승장구하고 있었다.
기존에 보지 못했던 전혀 다른 게임을 만났을 때 유저들이 느끼는 충격은 상상 이상으로 크다. 당시 한국시장은 [와우]의 상륙에 바싹 긴장하고 있었다. 이른바 [리니지]를 대표로하는 동양식 MMORPG와 [와우]를 대표로 한 서양식 MMORPG의 충돌이다. 그래픽부터 하는 방식까지 전혀 다른 게임이 온라인게임 종주국 한국에서 정면충돌한 것이다.
먼저 [와우] 이전 시대를 보자. 그때만 해도 한국 MMORPG는 [리니지]처럼 ‘비움의 미학’을 따랐다. 개발자는 환경만 제작하고 그 안의 콘텐츠는 유저에게 맡겼다. 유저들이 알아서 사냥을 하고, 파티를 맺고, 조직을 결정하고, 게임의 스토리까지 만들었다. 유저 중심의 패러다임은 한국형 MMORPG의 기틀을 마련했다. 유저들은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않고 게임에 그대로 표출시켰다. 이런 욕망들이 게임 안에서 차곡차곡 쌓여 누구도 예측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들이 연출했다. 하지만 한국형 MMORPG은 부작용도 있었다. 게임이 너무 획일화되고, 유저간의 경쟁이 심해졌다. 캐릭터를 성장시키기 위해 엄청난 단순반복 작업을 감수해야 했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고가의 현금거래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가다 게임’, ‘현질 게임’이라는 반갑지 않은 별명까지 얻었다. 유저들도 이런 한국형 MMORPG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와우]는 한국 MMORPG 시장을 뿌리째 흔들었다. 유저들은 [와우]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았다. 유저가 아닌, 개발자가 주도해 콘텐츠를 쌓아가는 세상이었다. 퀘스트, 던전, 전쟁, 이야기 등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개발자에 의해 연출되고 설계됐다. 의미 없는 사냥으로 시간을 허비할 필요 없이 개발자가 만들어준 양질의 콘텐츠를 즐기면 된다. [와우]가 제공한 콘텐츠의 만찬은 유저들을 열광시켰다. 동접자 10만 명을 가뿐히 넘었고 전 세계 수 천 만 명의 마니아들을 양산했다. 그러나 한국게임들은 [와우]를 따라갈 수 없었다. 퀘스트는 어설펐고, 스토리는 빈약했다. 중국에서 맹위를 떨쳤던 한국 MMORPG들이 순식간에 [와우]를 맹종하는 처지에 놓였다. 김택진 대표도 지난 서울대학 강연에서 “와우 외에 다른 게임은 솔직히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할 정도다. [와우]에 대한 한국 게임시장의 애증은 그만큼 깊었다. [아이온]은 이런 시기에 엔씨소프트 한 귀퉁이에서 시작된 프로젝트였다.
당시 [와우]를 견제 할 유일한 한국 개발사는 엔씨소프트였다. 업계에선 [리니지]같은 대작이 빨리 나와서 한국게임의 자존심을 살리길 내심 바랬다. 이때 엔씨소프트의 위세는 대단했다. 마치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와도 같이 목표를 향해 맹렬히 돌진했다. 선수들도 일류급이었다. 먼저 [리니지3] 프로젝트가 있었다. 배재현, 박용현 등 리니지 신화를 일구었던 핵심인력들이 대거 투입됐다. 또, ‘리처드 게리엇’의 신작 ‘타뷸라 라사’도 [와우]를 향해 포문을 열었다. [리니지3]로 아시아 시장을 석권하고, [타뷸라라사]로 서구권 시장을 공략하면서, 엔씨소프트는 동, 서양을 아우르는 거대한 온라인제국을 건설하려 했다. [아이온]은 이 제국의 간판급 스타는 아니었다. 엔씨소프트 사단의 [리니지3]와 [타뷸라라사]라는 두 주연의 그늘 밑에서 활동한 수많은 조연들 중 하나였다.
주인을 위해 일하다 결국 가마솥에 삶기는 사냥개처럼 [아이온]의 효용가치는 [리니지3]가 나올 때까지만 이었다. 2006년 5월, 미국 LA에서 열린 ‘E3 게임쇼’에서 엔씨소프트는 아이온 프로젝트를 처음 공개했다. 게임의 앞 글자 이름을 따 ‘A프로젝트’라고 이름 짓고, 개발자 20명 안팎의 조촐한 규모로 시작됐다. 핵심 개발자들은 대부분 [리니지3]에 매달려 있는 터라 주로 경력이 많지 않는 개발자들로 팀이 구성됐다. 이렇다보니 회사 자체도 [아이온]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당시 개발자들은 인터뷰에서 “아이온은 리니지2와 리니지3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게임”이라고 공공연히 밝혔다. 두게임 간의 공백을 채워주는 정도가 [아이온]의 목표였다. 물론 [리니지3]가 나오면 두 말 없이 대권을 물려줘야 하는 것도 [아이온]의 운명이다. 당시 시장의 관심은 [아이온]이 아니라 [리니지3]에 쏠려 있었다.
[아이온]은 개발기간 내내 유저들로부터 ‘이단아’ 취급받았다. 먼저 게임의 정체성에 대해 의심했다. [리니지]처럼 만들 수 도 없고, [와우]를 똑같이 따라 해서도 안 된다. “리니지도 아니고, 와우도 아니라면, 도대체 어떤 게임인가?” 유저들은 아이온의 정체성에 대해 끝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본래 아이온은 ‘국내 유저들에게 먹힐 수 있는 해외 스타일의 게임을 만들자’라는 의도로 시작됐다. [리니지]와 [와우]가 가지고 있는 양 극단의 재미를 하나로 모아, 누가 해도 즐길만한 보편적인 재미를 구현하자는 것이다. 아이온 개발을 총괄한 지용찬 전 팀장은 “특정 게임의 재미에 편승하기보다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오래 하며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주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 당시 MMORPG 시장은 [리니지]와 [와우]의 그늘에서 머물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아이온]의 취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잘나가는 빅3도 하루아침에 고꾸라지는 살얼음판 같은 시장에서 [리니지]와 [와우]를 합친 게임을 만들겠다는 게 허세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 내세운 카드가 공중전투다. 아이온 팀은 지금까지 어떤 게임에서도 시도하지 않았던 공중전투 장면을 게임의 첫인상으로 공개했다. 캐릭터가 날개를 달고 공중에서 전투를 펼치는 장면은 그 자체가 장관이었다. 하지만 영상을 접한 사람들은 의심부터 했다. 사람들은 ‘기술적으로 구현도 못할 시스템!’이라고 평가절하 했다. 유저뿐만 아니라 업계 전문가들도 고개를 내저었다. 이때만 해도 [아이온]은 검증받지 않은 낮선 게임에 불과했다.
아마 엔씨소프트에게 2007년은 꿈에서도 기억하기 싫은 악몽의 해일 것이다. 그해 4월, 예상치 못할 사건이 벌어졌다. [리니지3]의 핵심소스가 외부 게임사에 유출된 것이다.[리니지3]는 회사의 모든 역량이 투입된 간판 프로젝트였다. 그러나 몇몇 개발자들이 게임 소스를 USB에 담아 해외 게임사에 유출시키려다 발각되자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이때 받은 충격과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김택진 대표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엔씨소프트는 유출 당사자를 고발하고 사건은 법원으로 넘겨졌다. 이 사건으로 그동안 고공행진을 했던 엔씨소프트는 꺾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리니지3] 프로젝트가 중단됐다. 믿고 일했던 동료들의 배신으로 조직 전체의 신뢰가 무너졌다. 세간에선 엔씨소프트에 대한 비관론이 고개를 들었다. 유저들의 비난과 투자자들의 압박에 시달렸다.
문제는 밖에서도 터졌다. [리니지3] 만큼 기대를 걸었던 [타뷸라 라사]가 흥행에 참패한 것이다. [타뷸라 라사]는 ‘리처드 게리엇’이 1천억 원 넘는 제작비를 들여 만든 초대작게임이다. 절대 실패해서는 안 될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리처드 게리엇’은 개발기간 내내 수시로 기획을 바꾸고 게임을 뒤집었다. 스케줄이 예상보다 길어지면서 엔씨소프트 경영진들과 마찰을 빚었다. 그러다보니 게임이 제대로 나올 리가 없었다. 처음엔 판타지로 시작한 게임이 돌연 SF 세계관으로 바뀌었다. [타뷸라 라사]는 발매 후 부진을 면치 못하더니 급기야 서비스 2년 만에 서비스가 중단됐다. 회사의 기둥역할을 했던 두 게임이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지면서 엔씨소프트는 엄청난 비난에 시달렸다. 당장 김택진 대표의 책임론부터 불거져 나왔다. 투자자들은 김 사장이 물러나고 전문경영인을 도입하라고 요구했다. 때마침 유저들도 [리니지]에서 이탈해 다른 게임으로 갈아탔다. 엔씨의 위기는 국내 MMORPG의 총체적 위기와 궤를 같이 했다. 전통의 강자였던 한국 MMORPG가 [서든어택] 같은 FPS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위기를 헤쳐 나갈 돌파구가 필요했다. 엔씨소프트는 변방에서 개발 중인 [아이온]을 불러올렸다. 이때부터 아이온은 엔씨소프트 주력 타이틀로 위기를 돌파할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됐다.
아이온 개발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개발자들이 3번이나 바뀌는 고초를 겪었다. 이마저 실패하면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부담감이 회사를 옭죄었다. 김택진 대표는 본인이 직접 QA팀을 꾸려 개발을 챙길 정도로 [아이온]에 매달렸다. 개발회의에도 참여해 중요한 결정은 그가 직접 내렸다고 한다. 프로젝트를 수차례 뒤엎었지만 만족할만한 게임이 나오지 않았다. 고된 개발기간으로 사람들은 지쳐갔다. 대부분 건강상의 문제로 중도 하차했다. [리니지2]와 [와우]를 뛰어넘는 완성도를 보여야 한다는 압박은 개발자들을 끊임없는 야근과 철야로 몰았다. 그만큼 스트레스가 심했고 체력적으로 힘든 프로젝트였다. 개발자들의 불운도 이어졌다. 첫 번째 프로듀서는 위암 판정을 받고 게임에서 하차했다. 두 번째 맡은 프로듀서도 고된 노동으로 건강이 악화되어 그만뒀다. 핵심기획자들이 몇 번이나 바뀌면서 본래 기획했던 내용들도 틀어졌다. 게임을 총괄한 김택진 대표도 한때 불면증에 시달릴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 한다.
[아이온] 프로젝트는 회사의 중역인 우원식 팀장(현재 엔씨소프트 부사장)이 총괄해 맡았다. 우원식은 국내 3대 프로그래머로 꼽히는 실력자다. 그는 송재경(리니지), 배재현(리니지2, 블레이드앤소울)과 함께 지금의 엔씨소프트를 만든 핵심인물이다. 송재경, 배재현과는 달리 우원식은 일반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스타일이다. 대학 졸업 후 ‘한글과 컴퓨터’에서 김택진 대표와 함께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그는 2002년, 엔씨소프트에 합류해 아이온 프로그램 팀장을 맡았다.
우 팀장이 이끈 프로그램 팀은 기획자가 가져온 내용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그에 대해선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실제 회사에 신입사원이 들어오면 선배들은 농담반 진담반으로 “코딩의 괴물 하나가 여러분을 괴롭힐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겁(?)을 준다고 한다. 깐깐한 김택진 대표도 우 팀장를 가리켜 ‘능력자’라고 평가할 정도로 최고의 실력을 겸비한 인물이다. 강력한 프로그램 팀을 만난 [아이온]은 개발에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개발 일정에 가속도가 붙었다. 개발팀이 두 번 교체되고, 세 번째 개발팀이 맡으면서 프로젝트는 비로소 안정을 찾았다.
[아이온]은 개발과정 자체가 한편의 승부사였다. 개발 단계부터 수많은 맞수들을 하나하나 밟고 올라가야 했다. 당시 [아이온]의 라이벌로 지목된 게임은 플래그십 스튜디오의 [헬게이트: 런던]이었다. [헬게이트]는 블리자드 개발자들이 분사해 나와 만든 야심작이었다. ‘빌로퍼’, ‘데이비드 브레빅’ 등 쟁쟁한 개발자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헬게이트]는 이름만 다를 뿐 ‘디아블로’의 정통 후계자나 다를 바 없었다. 명성이나 규모 면에서 어느 하나 밀릴 게 없는 작품이었다.
비슷한 시기 나온 [아이온]과 [헬게이트]는 여러모로 비교가 됐다. ‘외국게임과 국산게임의 경쟁’, ‘빅3 이후 차세대 대권을 노리는 기대작’, ‘블리자드 출신 개발자와 엔씨소프트 개발자의 자존심 대결’ 등 두 게임의 묘한 경쟁관계는 수많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유저들 사이에선 ‘아이온이냐, 헬게이트냐’를 놓고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두 게임이 처음 맞붙은 곳은 2006년 지스타였다. [아이온]과 [헬게이트]는 행사장에 각각 대형 부스를 마련하고 기싸움을 펼쳤다. 두 게임의 대결은 지스타 행사장의 최대 화두였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필자는 두 부스 분위기가 확연히 달랐던 점을 기억한다. 헬게이트 부스는 이벤트와 행사로 들떠 있었던 반면, 아이온은 차분히 게임을 시연하는 분위기였다. 스타 개발자 빌로퍼 사인회가 열리면 헬게이트 부스는 인산인해를 이뤘다. 게임시연에 중점을 둔 아이온 부스와는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결국 지스타 베스트 콘텐츠에 헬게이트가 뽑혔다.
아이온과의 격차는 불과 3표차. 당시 현장에 있던 엔씨소프트 관계자는 베스트 콘텐츠 상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해 상당히 아쉬워했다. 전초전은 [헬게이트]가 앞서 있었다. 본격적인 승부는 서비스 이후 갈렸다. 먼저 나선 게임은 [헬게이트]였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2008년 1월 오픈한 [헬게이트]는 오픈 첫날 동접자 10만 명을 가뿐히 넘었다. 설날 연휴까지 겹쳐 이용자는 계속 늘었다. 개발자들도 성공을 자신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헬게이트]는 곧 한계를 드러냈다. 턱없이 부족한 콘텐츠, 더딘 업데이트, 갈팡질팡 운영 등 과거 빅3가 보여준 폐단을 그대로 답습했다. 빌로퍼는 인터뷰에서 게임의 실패요인을 이렇게 분석했다.
두 게임의 승패는 개발 프로세스에서 결판났다. 플래그십스튜디오는 핵심인력만 남기고 모든 작업을 아웃소싱으로 넘겼다. 여기저기서 일을 벌였기 때문에 결국은 통제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렀다. 자금은 물 새듯이 술술 새고, 콘텐츠는 방향을 잃었다. 빌로퍼도 이러한 부분을 실패의 요인으로 삼았다. 반면 엔씨소프트는 기획 단계부터 모든 개발팀을 하나로 통일해 관리했다. 대표적인예가 오디오 팀이다. 보통 게임 후반부에 참여하는 오디오 팀을 기획 단계부터 합류시켰다. 개발 과정에 참여하며 게임의 느낌을 정확히 파악해 사운드를 만들었다. 세계적 작곡가 양방언을 섭외해 게임의 느낌을 살리는 OST를 만들었다. 그 또한 [아이온]의 개발과정에 참여하며 음악의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개발 초기에는 원화 이미지, 동영상, 스크린샷부터 전체적인 게임 컨셉에 대한 설명까지 방대한 양의 자료를 개발사 측에 요구하기도 했다. 엔씨소프트를 직접 방문하여 제작 과정을 지켜보기도 하고, 아이온 관련 이미지로 작업실 사방 벽을 도배하면서 상상에 세계에 빠져 지내기도 했다. 밝은 이미지의 천족은 가벼운 느낌의 피아노로, 어두운 이미지의 마족은 저음 위주의 첼로를 사용해 표현했다.
이렇듯 각 파트의 개발자들을 적극적으로 참여시킨 개발 프로세스의 결과는 게임의 완성도에서 확실히 드러났다. [헬게이트]는 완성도에서 [아이온]에게 밀렸다.
[헬게이트]가 무너진 후, 유저들의 시선은 [아이온]에 집중됐다. 그 사이 [프리우스 온라인](CJ인터넷)’, [SP1](넥슨) 등 중견 MMORPG가 도전장을 냈지만 [아이온]의 상대는 못됐다. 이미 [아이온]은 마지막 상대 [와우]와 같은 라인에 있었다. 그리고 2008년 11월 11일,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다.
필자는 엔씨소프트 창업이례 결정적인 장면 3가지 꼽으라면 ‘김택진과 송재경의 만남’, ‘바츠해방전쟁’, 그리고 ‘11월 11일 아이온 오픈일’을 꼽는다. 이 3가지 사건은 엔씨소프트뿐만 아니라 한국 게임사의 흐름을 바꾼 터닝 포인트였다. [아이온]은 11월 11일 새벽 6시에 오픈했다. 미리 서버를 열어두고 차분히 유저들을 맞으려고 일부러 사람이 없는 새벽 시간대를 택했다. 그러나 엔씨소프트의 예상은 빗나갔다. 마치 [아이온]에 접속하기 위해 밤을 센 사람들처럼 오픈 시작순간 유저들이 구름 때처럼 몰렸다.
오픈 하자마자 20개 서버들이 모두 차서 대기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7시간 만에 동시접속자 10만 명을 찍었다. 하루 만에 [서든어택]을 밀어내고 피시방 순위 1위에 올랐다. 4일 만에 동시접속자 20만 명을 넘겼다. 보름 만에 상용화에 들어가서 안정적인 매출을 뽑았다. 3개월 만에 엔씨소프트는 1,334억 원을 벌어들여 창사이례 최대 실적을 냈다. [아이온]의 거침없는 행보에 [와우]도 당황했다. 11월 말, 시리즈 사상 최강의 콘텐츠라고 자부하는 ‘리치왕의 분노’를 업데이트 했지만, 결국 [아이온]을 잡지 못했다. 전 세계 게임시장을 석권한 [와우]도 한국에서만은 예외였다. 흥행만큼이나 작품성도 인정받았다. 2008년에는 대한민국게임상을 수상하고, 2009년 독일 게임스컴에서 최고의 온라인게임상을 받았다. 2011년에는 아시아 온라인게임 어워드에서 대상을 받고, 2012년까지 국내 PC방 점유율 160주 연속 1위를 달성했다. 2013년에는 누적매출 1조원을 돌파해 제왕의 자리를 확고히 했다. 이후 [아이온]은 5년 동안 정상을 뺏긴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까다롭기로 유명한 한국유저들에게 통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이온]은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김택진 대표는 “[리니지]에 대한 반성에서부터 시작했다”고 밝혔다. [리니지]는 철저히 현실을 반영한 게임이다. 판타지라는 배경만 다를 뿐 다양한 인간 군상들이 현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강한 자는 더 많은 것을 누리고 약한 자는 더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하는 약육강식의 세계, 그것이 리니지 세계의 법칙이다. [아이온]은 게임 안의 정서는 [리니지]와 비슷하지만, 게임 속 질서는 [와우]와 닮았다. 평소에는 [와우]처럼 퀘스트를 풀고 던전을 돌면서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전쟁이 벌어지면 서로 힘을 합쳐 상대 종족을 막아내야 한다. 개발사는 ‘어비스’라는 전쟁터를 마련해 종족간의 대결을 유도했다. PVE에서 RVR(집단전투)로 자연스럽게 넘어가는 구조다. [리니지]의 단점을 반성하고, [와우]의 장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면서 [아이온]만의 새로운 영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됐다
필자는 [아이온]을 ‘창조와 혁신의 게임’이라기보다 ‘관리와 조율의 게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아이온]은 차별화에 집착하지 않고 익숙함을 따랐다. 그래서 서비스 초기에 다른 게임들과의 유사성문제로 많은 비난을 받았다. 20레벨까지는 [와우]과 같은데, 그 다음부터는 [리니지]같은 단순반복 작업 게임과 같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런 지적은 엔씨소프트도 인정을 했다. 그들은 구성면에서 이전 게임들의 큰 틀을 벗어나지 않고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대신 새롭지는 않지만 기본기가 탄탄한 게임을 만들었다고 한다.
새로운 것을 어설프게 내놓기보다, 익숙한 것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콘텐츠의 완성도는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시스템에서 빛을 발했다. [아이온]은 온라인게임 최고 수준의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선보였다. 캐릭터의 얼굴모양부터 표정, 신체의 각 부위까지 세세하게 설정할 수 있다. 유저들은 세세하게 분류된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이용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이후 수많은 게임들이 [아이온]의 커스터마이징을 벤치마킹했다. 이밖에 그래픽이나 사운드 등 게임을 이루는 모든 콘텐츠들이 최고의 완성도를 이루며 인기를 끌었다. 유저들은 아이온의 익숙함 속에서 새로운 재미를 발견했다.
[아이온]은 다양한 콘텐츠를 효율적으로 조율했다. 독특한 콘텐츠를 만들기보다 익숙한 콘텐츠를 적제적소에 배치했다. 스토리의 진행에 따라 테마별로 업데이트를 단행했다. 미국 드라마의 시즌제와 비슷한 개념이다. 2009년 3월 ‘잠든 과거가 눈을 뜬다’부터 2014년 1월 ‘보랏빛 혁명’까지 총 15번의 굵직한 업데이트가 진행됐다. 5번째 ‘용계 진격(2010년 10월)’ 업데이트에서 [아이온]은 역대 최고의 동시접속자를 기록했다. 앞으로 나올 콘텐츠를 미리 준비하고 기대할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어느 한 콘텐츠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다양한 콘텐츠가 오케스트라처럼 조화롭게 맞물려 제법 그럴싸한 ‘재미’를 만들어 냈다.
어떤 콘텐츠를 즐기든 유저의 자유다. 누구는 퀘스트를 깨고, 누구는 어비스에 나가 종일 전투만 한다. 집 꾸미기나 캐릭터 의상 수집에 열중하는 사람도 있다. 마을에 삼삼오오 모여 하루 종일 기타치고 노래 부르고 춤추기도 한다. 캐릭터 꾸미기에 관심 있는 유저도 많다. 잘 꾸민 캐릭터 '소스'는 게시판에서 최고의 인기다. 각기 색깔이 다른 콘텐츠들이 전체 게임 안에서 균형감 있게 배치된다. 어느 하나 튀거나 밀리는 경우는 없다. 김택진 대표는 “리니지는 바이올린 독주, 리니지2는 현악 4중주, 아이온은 대규모 오케스트라”로 비유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음악, 그래픽, 시나리오 등 다양한 콘텐츠를 마치 오케스트라 음악처럼 조화롭게 펼쳐 놓았다.
2009년 엔씨소프트는 [아이온]의 오토사용 계정 7만개를 삭제했다. 전에 없는 강력한 조치였다. 오토는 온라인게임에서 캐릭터를 자동으로 키우는 불법프로그램이다. 게임의 밸런싱을 훼손하고 상대적 박탈감을 조성하는 등 게임을 망치는 암적인 존재다. [아이온]에도 오토 프로그램이 극성을 부렸다. 엔씨소프트는 오토와의 전면전을 선포하고 오토 계정을 영국 삭제하는 등 강력한 조치를 펼쳤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오토 배포 사이트에 대한 수사를 의뢰하는 등 적극적인 오토근절에 나섰다. 매출 감소에도 불구하고 자체단속 및 계정압류 등 다양한 방면의 오토근절 캠페인을 펼쳤다.
각종 오토 프로그램의 폐해가 수면위로 떠올랐다. 유저들 사이에선 오토 프로그램의 적법성에 대해 날선 공방전이 계속됐다. [아이온]에서 시작된 오토와의 전쟁은 이후 온라인게임 시장의 새로운 화두가 됐다. [테라], [아키에이지] 같은 국산게임은 물론 중국에서도 오토와의 전쟁이 확산됐다.
[리니지], [와우], [아이온]으로 이어지는 지난 십년 간, 한국 MMORPG는 화려한 제국을 건설했다. 모든 것이 MMORPG로 통하던 시절이었다. 유저들은 MMORPG가 구현한 드넓은 필드에서, 마음껏 활개를 치며 사이버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대작들 간의 흥행전쟁은 그 자체가 흥미진진한 드라마를 연출했다. [아이온]은 이 치열한 각축전에서 최후의 승자로 남은 게임이다. 그러나 [아이온]은 MMORPG 제국을 지키지 못했다. 5년 동안 지켜온 권좌를 [리그오브레전드]에게 뺏기면서 급속도로 쇠락했다.
[아이온]은 [리니지]나 [와우]처럼 게임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던지지 못했다. 익숙한 재미를 적절하게 조율한 ‘웰메이드’ 게임으로 자신의 한계를 그어버렸다. 유저들은 뻔한 재미에 싫증을 냈다. 힘을 잃은 [아이온]은 너무나 빨리 유저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160주 동안 PC방 1위를 기록했던 저력은 어디가고, 지금은 10위권 밖으로 멀찌감치 떨어져 있다. 엔씨소프트의 주력게임이 아직도 20년 전 [리니지]라는 사실이 더욱 씁쓸하게 다가온다.
[아이온]의 쇠락과 함께 사실상 한국 MMORPG도 동력을 잃었다. [블레이드앤소울], [아키에이지] 같은 대작들이 나왔지만 [아이온]만큼 파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독창성’을 배재한 [아이온]은 태생부터 한계가 있었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비전이 없었던 것이다. [아이온]은 한국형 MMORPG의 미완의 혁명으로 남아있다. 한편 [아이온]을 무너뜨리고 새롭게 권좌에 오른 게임은 장르부터 낯선 혁명가였다. [리그오브레전드] 앞에서 유저들은 새로운 혁명의 시대를 맞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