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密陽), Secret Sunshine, 나의 하나님? 너의 하나님?
올해 칸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이창동 감독의 ‘밀양’은 ‘Secret Sunshine’이라는 부제 혹은 영어제목이 붙어 있다. 경남의 밀양이 아니라 ‘비밀스런 빛’, 즉 ‘하나님이 사람에게 은밀하게 비춰주는 빛’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이 ‘비밀스런 빛’은 신애(전도연 분)에게도, 그녀의 아들을 죽인 웅변학원장에게도 비춰졌다. 문제는 두 사람 다 ‘소유의 하나님’, 즉 ‘나의 하나님’, ‘나만을 위한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던 데에 있다.
조용하게 지나가버린 클라이맥스는, 신애가 아들의 살인자와 교도소 창살을 사이에 두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신애는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고 생각했던 ‘용서’를 철천지원수에게도 나누어주려 면회를 신청했던 것이다. 이 때 살인자는 담담하게 말한다. 자신이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으며, 비록 몸은 갇혀 있지만 하루하루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노라고.
이게 뭔가? 이게 말이 되는가? 어린 생명의 살인자가 그 어미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눈물을 쏟으며, 죽을 죄를 졌으니, 제발, 한번만, 용서해주십사, 엎드려, 애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의 어처구니없이 뻔뻔스런 ‘신앙고백’은 그가 ‘무례한’ 기독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의 하나님’만을 알고 있었을 뿐이며, 참된 ‘회개’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보여주었던 비상식적이고도 몰염치한 언행의 중요한 원인은 한국 기독교 교회와 신학의 얕음에 있다. 기독교인이 되는 순간 ‘나의 하나님’에만 몰두하며, 사람들에게는 무례해지는. 때로는 잔인해지는.
신애는 반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에 맞서서. “네가 뭔데, 나보다 먼저 그놈을 용서해줬어!” 하나님에 맞선 신애의 반란은 정당할까? 정당하다. 용서의 우선 권한은 하나님이 아니라 신애에게 있다. 물론 하나님도 이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왜 신애보다 먼저 그를 용서해주었을까? 혹자는 대답이 옹색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하나님은 인간이 용서를 빌 때 용서를 미룰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자기 앞에 용서를 구하는 이를 용서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어디서 잘못되었을까?
웅변학원장의 절반의 회개. 하나님의 용서로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고 믿어버리는 철없음. 무심함. 뻔뻔한 자기도취. 그리고 그를 전도했을 목사의 짧은 신학과 그런 목사를 길러낸 한국교회.
가끔 나타나는 기독교 관련 논쟁/싸움을 좀 더 제대로 바라볼수 있을까 해서 퍼왔습니다.
http://news.media.daum.net/editorial/editorial/200707/01/dailyseop/v172825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