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은 소통보조장비이다.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타인과 편하게 소통을 할 수있다.
특히 IT기술로 스마트폰은 우리에게 이전의 소통장비들과는 다른 차원의 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스마트폰으로 우리는 전화는 물론이고, 정보도 얻고, 영상도 보고, 게임도 하고, 지인이나 모르는 이들과도 소통을 할수 있다.
스마트폰은 사용자에게 주도권을 주는 특별한 장비이기도 하다.
현실은 너무나 빈약해서 뭔가 해볼꺼리가 별로 없을수 있는데, 스마트폰에는 찾아보면 흥미로운것들투성이다.
현실앞에 자신은 주변에 휘둘리는 나약한 존재일수 있는데, 스마트폰앞에 자신은 주도권을 거머쥔 절대자이다.
항상 부족하고 조건 절차가 필요한 현실에서와 달리 스마트폰에서는 하고 싶은 것이라면 하고 싶을때 하고 싶은 만큼 할수 있다.
마냥 거부만 할수 없는 현실에서와 달리 스마트폰에서는 실증나거나 하기 싫은 것이라면 손가락 하나로 언제든지 그만 둘수 있다.
정보든, 게임이든, 영상이든, SNS든, 스마트폰으로 가능한 그 수많은 것들이 말이다.
즉, 스마트폰을 쥐고 있다는 것은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스마트폰이 자신이 쥘수 있는 유일한 주도권일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현실은 항상 해야만 하는 것, 맞춰줘야만 하는 것,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들 뿐일수도 있다.
이들에게라면 주변에서 받는 것이라고는 지배, 구속, 억압, 눈치, 압박 따위의 것들 뿐일 것이다.
이들에게라면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이 아닌 결정하고 통제할 주도권을 받을 수 있는 곳은 스마트폰 밖에 없을 것이다.
주도권은 사람이 궁극에 가깝게 갈망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과 자신의 주변을 주도하고 통제하는 상태는 어떤 궁극에 닿아있다.
그런 상태라야 자신이 추구하는 어떤 목적을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추구해 나가고 있고 나갈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확신만이 사람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살아있는 존재로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주도권은 누구나가 갈망하는 것이고, 휘둘리고 끌려다니는 상태라면 어떻게든 피하거나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과 주변에 어떤 조그마한 주도권(예컨데 취미나 낙)이라도 하나 쥐고 있어야 사람은 행동에 힘을 실을수 있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면 그것은 현실에서의 주도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떤 신념이 없어서 자신에 대한 주도권이 없고 주변에 대한 주도권도 없는 사람에게
스마트폰은 자신의 주도권에 대한 갈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는 유일하면서도 편리한 도구가 된다.
이들에게라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을 이유가 없다.
이들에게라면 스마트폰을 놓는 것은 자신의 유일한 주도권을 놓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스마트폰에서 본질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은 시사정보도, 게임의 쾌락도, 누군가의 사연도 아니고 주도권이다.
그리하여 현실에서의 결핍된 욕구를 그렇게라도 충족시키고, 현실에서의 불편함이나 불안함을 쉽게 해소하는 것이다.
온종일 격무로 아무리 피곤해도 퇴근해서 스마트폰 할 힘은 있을 뿐 아니라 하려고 까지하고,
특별히 할수 있는 것이 없는 지하철에서 다들 스마트폰을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의 상황이다.
상태적이건, 일시적이건 이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역량을 주변상황에 덜 소모되게 하기위한 나름의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스마트폰은 결국 가상이다.
스마트폰으로 누릴수 있는 것이 아무리 충만하다 하더라도 현실을 따라갈수 없다.
현실에서 주도권이 충분히 주어졌다면 스마트폰에 매달릴 이유가 별로 없다.
실제로 현실에서 충분히 주도권을 쥔 위치의 사람이 스마트폰에 집착하는 경우는 상상하기 어렵다.
또한, 현실에서 충분한 주도권이 확보된 시점에서 스마트폰을 찾는 경우도 상상하기 어렵다.
즉, 스마트폰은 최악에 가까운 현실을 피하기 위한 가상에서 찾은 차선 또는 차악이다.
그러니 스마트폰만 본다고 너무 그러지 말자.
그런 잔소리 보다는 그들의 입장과 페이스에 맞춰주는 것이 스마트폰을 그만보게 하는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