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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온라인 단편집] 1. 웜홀의 유령
게시물ID : gametalk_16974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마Maマ
추천 : 10
조회수 : 2879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4/03/13 00:35:05
* 게임에 기초를 둔 팬픽이라 게임토론방에 올립니다...

* 관련설정은 다음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1. http://community.eveonline.com/backstory/scientific-articles/
2. 관심을 가지고 읽은 몇몇 공식 소설
3. 인게임 플레이
제가 공식 설정을 모두 섭렵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에, 팬픽이 공식 설정과 충돌하는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 픽션이 상당부분 가미되어 있지만, 기본 얼개는 제 실제 게임플레이 경험을 바탕으로 합니다.

* 실제 게임플레이와 비교하면, 엄청난 미화와 과장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게임의 암울한(?) 실제 모습은 부록으로 제시해 드리는 ‘현실’ 파트를 참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 게임 용어의 번역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며, 거기에 어떠한 공신력도 없음을 알립니다. 첫 제시 때만 “번역어[원어]”의 형태로 제시하고, 이후로는 상황에 맞게 번역어 또는 원어를 사용합니다.

* 함급 기타 고유명사는 번역하지 않습니다.

* 그냥 심심해서 쓰는 거라, 부정기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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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온라인 단편집 1. 웜홀의 유령

The Forge 구역[Region] > Aulari 성좌[Constellation] > Korsiki 성계[Solar System]
칼다리 국[Caldari State]
치안수준[Security Level] 0.6432
이브 표준시 13:38

 한 척의 함선이 가속 관문[Acceleration Gate]을 작동시켜 돌입한 약 2만 킬로미터의 워프에서 벗어난 순간, 그 함선에서 사출된 카메라 드론이 엔젤 카르텔[Angel Cartel] 소속 총 12기의 포탑, 5기의 드라미엘[Dramiel]급 프리깃, 7기의 시나발[Cynabal]급 순양함[Cruiser], 10기의 마카리엘[Machariel]급 전함[Battleship]을 감지한다. 포탑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이십 대 일이다.

 그렇다고 이 외로운 한 함선이 질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도 아니다. 기술적으로 진보된 장비를 갖추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 높은 함급, 이를테면 항공모함[Carrier]의 함선인 것도 아니다. 심지어는 엔젤 카르텔에게만 특별히 강한 함선인 것조차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방금 진입한 이 함선의 함종은 방금 소개된 바 있는 마카리엘급 전함과 정확하게 동일하다.

Machariel.jpg
<마카리엘급 전함>

 이런 상황에서, 새로 진입한 함선의 함장이 엔젤 카르텔을 상대로 자신이 불청객임을 밝힌다는 것은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러나 함장은 그런 납득하기 힘든 일을 아무 망설임 없이 개시하려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미 잡음에 매우 옅은 농도로 희석된 엔젤 카르텔 통신망에서 조금씩 들려오는 어조가 증명해 주는 것처럼, 절대적 우위에 있는 엔젤 카르텔 쪽이 오히려 크게 당황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처럼 기이한 현상을 합리의 영역 안으로 끌어올 수 있는 개념은, 아마 ‘캡슐리어[Capsuleer]’가 유일할 것이다. 함선을 자신의 정신으로 직접 조종하여, 함선이 가진 능력의 최대한을 이끌어내고, 전투 중 함선은 물론 자신의 육체까지 파괴되더라도 클론 기술을 통해 곧바로 어딘가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는 준불사신. 캡슐리어가 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잘 알려져 있음에도 ‘비캡슐리어로서 캡슐리어를 이길 가장 쉬운 방법은, 캡슐리어가 되는 것이다’는 우스갯소리가 널리 퍼질 정도로, 이들의 전투능력 차이는 극명하다.

 물론, 전투 이외의 영역에 주로 종사하는 캡슐리어도 많고, 아직 전투에 능숙하지 못해 일반 파일럿과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못하는 캡슐리어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엔젤 카르텔의 저 구성원들에게는 매우 불행하게도, 방금 진입한 캡슐리어는 그런 미숙함과 거리가 멀다.

 캡슐리어는 우선적으로, 근거리에서 공전[Orbit]을 시작하면 처리가 귀찮아지는 프리깃들을 락온하기 시작한다. 락온까지 걸리는 시간은 약 10초. 그 동안 캡슐리어는 함선을 적들의 반대 방향으로 회전시켜, 엔젤 카르텔의 함선이 자신을 일직선으로 따라오는 구도를 만들어낸다. 그 사이, 자동으로 제어되는 포탑들이 제일 먼저 캡슐리어의 함선을 락온하여 탄환과 미사일을 발사하기 시작하지만, 함선의 강화된 보호막을 조금 소모시킬 뿐, 치명타를 가하지 못한다.

 프리깃 락온까지 5초. 센서 강도가 가장 강한 프리깃들이 캡슐리어의 함선을 먼저 락온한다. 다소 숙련된 파일럿이 조종을 맡고 있는 순양함 몇몇도 뒤이어 락온한다. 이들은 곧 자신들의 유효사거리 안으로 진입하기 위해, 캡슐리어를 향해 접근해오기 시작한다.

 프리깃 락온까지 1초. 나머지 순양함들과, 센서 강도가 가장 약한 전함들까지 락온을 마치고, 캡슐리어의 방향으로 기수를 틀기 시작한다. 상대방 함선이 자신을 락온하고 있음을 알리는 노란 경고표시와, 상대가 자신을 공격하고 있음을 알리는 빨간 경고표시가 캡슐리어의 전투개요[Overview] 디스플레이를 가득 채운다.

 하지만 캡슐리어는 여전히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다. 이들이 자신에게 전혀 위협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애프터버너[Afterburner, 이하 AB :: 자기 함선의 최대속력을 높이는 모듈]를 사용하면 캡슐리어는 상대의 어떤 함선보다 빠른 속도로 이동할 수 있고, 캡슐리어의 유효사거리는 상대의 어떤 함선보다 길다. 물론, 프리깃들이 웹[Web, Stasis Webifier :: 목표 함선의 속력을 낮추는 모듈]을 걸어버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프리깃 락온이 완료되었음을 알리는, 짧은 전자음이 다섯 번 울린다. 캡슐리어는 락온된 다섯 기의 프리깃 중 현재의 횡단선속도[Transversal Velocity]가 가장 낮은 녀석을 제1목표로 지정하여, 총 일곱 문의 800mm 연발포[800mm Repeating Cannon]를 조준한다. 하지만, 이 캡슐리어는 조준이 끝났음에도 곧바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고, 디스플레이에서 이들의 속력[Velocity]그 자체를 주시한다.

 이삼 초 뒤, 450m/s 전후를 가리키던 프리깃들의 속도가 갑자기 치솟기 시작한다. 마이크로워프 드라이브[Microwarp Drive, 이하 MWD :: 자기 함선의 최대속력을 AB보다 훨씬 높이나, 그만큼 부작용이 따른다]를 가동시킨 것이다. 그 반작용으로, 프리깃들의 신호반경[Signature Radius]이 급증, 대구경 포탑으로도 정확한 조준이 가능한 수준이 된다.

 통상 이러한 부작용은 횡단선속도 내지는 각속도[Angular Velocity]의 증가로 상쇄되게 마련이다. 즉, 작은 물체가 느린 속도로 이동하는 것이 큰 물체가 빠른 속도로 이동하는 것으로 바뀔 뿐이라, ‘정확한 조준’이라는 관점에서 유의미한 차이를 이끌어내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현재와 같이 적들이 순진하게 일직선으로 접근해주는 상황에서는, 속력의 증가가 각속도의 증가로 연결되지 못한다. 저들의 속력이 아무리 빠르더라도, 포탑의 입장에서 보면 이들은 그저 멈춰 있을 뿐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캡슐리어는, 프리깃들이 MWD를 켰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무섭게 일곱 문의 800mm 연발포에 공격 명령을 내린다. 대구경 핵융합 탄두[Fusion L]가 첫 프리깃에 명중한다. 이 단 한 번의 공격은 프리깃의 보호막과 장갑을 모두 관통하고, 프리깃을 순식간에 고철덩어리로 만들어 버린다.

 뒤이어 삼 점 몇 초의 간격으로 캡슐리어의 포탑이 네 번을 더 불을 뿜는다. 그때마다 프리깃이 한 기씩 굉음을 내며(정확히 말하면, 카메라 드론이 자체적으로 합성해 내는 소리일 뿐이지만) 폭발한다. 마지막 프리깃은 상황이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급히 MWD를 끄지만, 일직선 접근을 유지하는 이상, MWD를 끄는 것은 생존을 고작 몇 초 연장시켜주는 외에는 어떠한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다. 첫 공격에서 800mm 탄두 중 두 발만이 프리깃에 명중하지만, 보호막을 모두 날려버리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조금 뒤 발사된 탄환은 다섯 발이 명중하여, 남은 장갑을 모두 뚫고 들어와 프리깃을 박살내는 데 성공한다.

 쉴드 부스터[Shield Booster : 에너지를 소모하여 보호막을 신속히 복구시키는 모듈]를 가동하여 프리깃을 처리하는 동안 다른 함선과 포탑에게 공격을 받아 손상된 보호막을 신속히 복구시키면서, 캡슐리어는 이제 다음으로 귀찮은 순양함급 함선을 락온하기 시작한다. 락온이 완료될 무렵, 초광속 통신망을 통해 이 캡슐리어에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젊은 남성 중 다소 중후한 편에 속할 듯한 목소리이다.

 “웜홀 찾았다. X702, Inaya. 들어가 볼 생각 있어?”

 Inaya 성계는 현재의 Korsiki 성계에서 약 1.5광년 떨어진 곳이다. X702라 함은 웜홀의 분류 코드로서, 이 웜홀이 치안수준이 높은[High-Security] 성계와 규모 3[Class 3]의 W-Space[웜홀 우주]를 연결하고 있다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다. 통신을 걸어 온 캡슐리어가  프로빙[Probing]을 통해 이 웜홀을 발견해 낸 모양이다. 혹시 몰라 덧붙이면, 여기서 ‘(웜홀에) 들어가 볼 생각 있어?’라는 부분은 일반적인 언어생활에서의 의미와 동일하다.

 통신을 수신한 캡슐리어는 일단 포탑에 ‘가장 먼저 락온된 순양함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린 후, 잠깐 생각을 정리한다.

 ‘Inaya 성계까지는 점프 게이트[Jump Gate : 일반 함선에게 성계간 점프를 가능케 하는 시설]를 활용하면 2점프. 중간에 내 본거지인 Osmon 성계가 끼어 있으니, 귀찮은 일은 좀 덜하겠. 그래도 헛걸음하긴 싫으니까…… 확실히 해 둬야지.’

 느긋하게 생각을 정리하는 데 고작 6초의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이미 처음 목표로 잡은 순양함이 우주 잔해로 산화된 모습이 보인다. 캡슐리어는 덤덤하게 다른 순양함을 목표로 잡고 다시 포탑을 가동시키고 나서, 답신한다.

 “생각이야 있지. 하지만 먼저 정찰좀 해 줘, 오빠. 준비 다 해 놨는데 막상 영양가 없는 웜홀이면 짜증만 나잖아.”

 20대 초반정도 되어 보이는 여성의 목소리. 오직 목소리 그 자체만 가지고 따진다면 ‘갸냘픈’ 것에 가깝지만, 어조에 강한 자신감과 씩씩함이 묻어나와서인지 전반적인 인상은 소위 ‘고전적인 여성스러움’과 거리가 멀다. 20대 초반 목소리라고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다. 클론 기술과 본질적으로 불가분인 캡슐리어에게 생물학적 나이는 별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이미 들어와 봤다. 근처에 블랙홀 같이 특별한 천제는 없고, 어노말리[Anomaly :: 모든 함선에 기본적으로 내장된 스캐너만으로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우주 신호]가 9개정도 있고, 시그니처[Signature :: 특수 프로브를 사용한 프로빙을 통해서만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우주 신호]도 6개 정도 잡히네. 광물 신호도 서넛 잡히고. 포스[POS, Player-Owned-Structuer :: 다른 캡슐리어가 만들어 놓은 우주 구조물]가 있긴 하지만… 내 동생이 언제부터 그런거 따졌나?”
 “털 만 하겠네. 알았어. 얘네 떨거지들 처리하는 건 의뢰에 없었으니, 바로 거기로 갈게.”

 송수신을 마친 캡슐리어는 세 번째 순양함이(그 사이 한 척이 더 완파된 것이다) 파괴되자마자, 캡슐리어는 바로 Korsiki 성계 내에 있는 Osmon 게이트로 얼라인[Align :: 워프를 위해 함선의 진행방향을 목적지점과 일렬로 정렬시키는 것]을 시작하고, 얼라인이 완료되자마자 워프를 개시한다.

 첫 일 초 동안, 주변의 함선, 잔해, 구조물은 처음의 위치에서 고작 수 킬로미터정도 멀어진 것으로 보일 뿐이다. 하지만, 그 다음 일 초가 흐르자, 모든 물체는 육안으로 관찰할 수 없을 정도로 멀어진다. 수 초가 흐르자, 캡슐리어의 배는 최대 워프속도인 초당 2AU에 도달한다. 인류의 고향 성계(지금은 거의 전설 취급받지만)인 태양계에서, 고향 행성인 지구와 태양까지를 일 초에 평균 두 번 왕복하기 충분한 속도이자, 빛보다 약 1천 배 빠른 속도이지만, 체감 속력은 우주 정거장 내에서 전력질주를 하는 것보다도 느리다. 속도를 가늠케 할 정도로 가까이 있는 물체라고는 절대등급 7.21의 백색 왜성, Korsiki밖에 없기 때문이다. 특히, 이 캡슐리어가 ‘쓸데없이 어지럽기만 하다’는 이유로, 카메라 드론이 자체적으로 워프 터널 효과를 필터링하도록 설정해 놓아 더욱 속도감이 없다.

 약 75AU의 워프가 거의 끝날 무렵이 되어서야, Korsiki의 7번 행성이 그 황량한 모습을 드러낸다. 클릭 한 번이면 행성의 공전주기, 질량, 지름, 탈출속도, 기압 등 다양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겠지만, 캡슐리어는 그런 정보엔 전혀 관심이 없다. 점프 게이트 근처에 랜딩[Landing :: 워프에서 벗어남]하자마자, 캡슐리어는 곧장 Osmon 성계로 도약명령을 내릴 뿐이다.

****

The Forge 구역 > Aulari 성좌 > Osmon 성계
2번 행성 – 1번 위성 – EVE 수녀단 사무소[Sisters of EVE Bureau]
칼다리 국
치안수준 0.6803
이브 표준시 13:44

Aulari Constellation.jpg

<Aulari 성좌>

 문자 그대로 ‘눈 깜짝할 순간’에, 캡슐리어의 함선은 0.5~1광년 사이에 있는 Osmon 성계에 도착한다. 캡슐리어는 곧바로 성계 내 스테이션 중 하나로 워프 명령을 내린다. 스테이션에 정박[Dock]하자마자, 캡슐리어는 캡슐에서 나와 스테이션 소재 에이전트와 통신을 시작한다.

 “포셀[Lozdod Pousel :: 에이전트의 성], 의뢰한 엔젤 카르텔 퇴치 완료했어요.”
 “고마워요 페일리 로크[Peily Locke]. 보상금은 즉시 계좌로 송금할게요.”

 지극히 사무적이고 간단한 대화가 오고간 뒤, 페일리는 바로 옆에 있는 관리 콘솔로 걸음을 옮긴다. 어깨에 약간 못 미치는 길이의 검은 단발. 앞머리는 짧게 잘려 이마를 덮고 있다. 얼굴은 칼다리 아츄라[Achura] 계열의 전형적인 미인상이나, 조금 큰 눈의 눈매는 약간 순수 갈란테[Gallente]인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 지금은 더 이상 의미가 없는 개념을 빌어오자면, ‘동아시아 미인상에 눈이 조금 크며, 서구형으로 날카롭다’는 것이다.

 관리 콘솔을 작동시킨 페일리는 곧장 자신의 개인 격납고 관리 시스템에 접속하여 목록을 주욱 훑어본다. 갈아탈 함선을 물색하고 있는 것이다. 방금까지 탑승하고 있었던 마카리엘급 전함이 매우 강력한 함선임은 사실이나, 웜홀 탐사로 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페일리는 잠깐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텐구[Tengu]급 전략순양함[Strategic Cruiser]를 선택한다. 소규모 웜홀 탐사에서 준수한 효율성을 보이는 함종이다. 최근 4대 제국이 일제히 일반 순양함 강화 프로젝트를 실시한 이후 그 특별함이 줄어들긴 했지만… 그만큼 평균 거래가격도 줄어들었기에 아직 충분히 효율성이 있다.

 자동화 시스템이 함선 교체를 진행하는 동안, 페일리는 배의 모듈 피팅[Fitting]을 점검한다. 민마타 공화국 함대 규격을 사용한 100메가뉴턴 출력의 애프터버너[Republic Fleet 100MN Afterburner]가 특징적이다. 통상 100메가뉴턴 출력의 추진장비는 전함급 이상의 함선에만 사용되지만, 몇몇 특별한 경우에는 (지금처럼) 그보다 작은 함급에도 가끔 장비되는 때가 있다. 구리스타스 해적의 고위급 인사가 사용하는, 이른바 ‘Pith C-Type’ 대형 쉴드 부스터, 엔젤 카르텔의 중위급 관리직에서 사용한다는 소위 ‘Domination’ 쉴드 부스트 강화기[Shield Boost Amplifier :: 쉴드 부스터 모듈의 성능을 강화시키는 장비], 칼다리 해군 규격의 EM 저항력 강화 필드[EM Ward Field], 역시 칼다리 해군 규격의 미사일 컨트롤 시스템[Ballistic Control System], 이른바 ‘트루 산샤’들이 사용하는 발전 통제 장치[Reactor Control Unit], 기타 ‘평범한’ 수준의 보호막 강화 필드[Invulnerability Field] 둘과 손상 보정 장치[Damage Control Unit]. 그리고 중미사일 런처 5문과 충분한 양의 키네틱[Kinetic] 미사일. 대형 함선에 특화된 퓨리[Fury]탄과 소형 함선에 특화된 정밀[Precision]탄이 골고루 준비되어 있다.

Tengu Wormhole Combat.jpg
<텐구급 전략순양함 - 전투형>

 사실, 이 장비체계는 대-캡슐리어용 계획에서, 비-캡슐리어를 상대할 때 전혀 필요가 없는 몇몇 장비를 교체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고작 규모 3의 웜홀을 탐사하는 데 쓰기에는 지나치게 화려하고, 고가이며, 또 비효율적이지만, 페일리는 단순히 ‘새로 맞추기 귀찮아’ 라는 이유로 이 체계를 고수하고 있다. 굳이 장점을 찾자면, ‘웜홀의 유령’, 그러니까 클로킹이 가능한 함선으로 웜홀을 전전하며 다른 캡슐리어들을 ‘잡아먹는’ 녀석들로부터 도망갈 가능성이 조금 생긴다는 정도가 될 것이다. 장비 체크를 마치고, 페일리가 탑승수속을 밟으려는데, 또다시 목소리가 수신된다.

 “페일리, 이 안에 다른 곳으로 통하는 웜홀이 두 개 더 있어. 둘 다 다른 웜홀 우주로 통하는 것들이고. 어떡할래?”

 어차피 웜홀 우주 안인데, 다른 웜홀 우주로 통하는 곳이 몇 군데 있다고 해서 무슨 차이가 있겠나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저 말은 웜홀 탐사의 위험성이 몇 배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웜홀 우주는 기본적으로 지역 통신망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해당 성계에 어떤 캡슐리어가 있는지 자동으로 파악할 수가 없다. 오로지 수동으로, 출입상황을 철저히 체크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이다.

 특정한 웜홀 우주로 통하는 입구가 하나뿐이라면, 다른 캡슐리어(여기서는 ‘오빠’)가 그 입구를 주시하고만 있으면 웜홀에 누가 출입하는지 모두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입구가 여러 개가 되면 장거리 방향 스캔[Directional Scan]으로 간접적인 감시만이 가능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날렵한 함선이 웜홀 안으로 진입하는 모습이 감시에서 누락될 가능성이 생긴다. 요컨대, ‘웜홀의 유령’들에게 희생당할 위험이 증가한다는 이야기이다.

 “아… 그래? 근데, 나 이미 돌아왔는데……. 들어가 보자. 별 일 있겠어? 뭐, 별 일 있으면 어쩔 거야. 내가 케어베어[Care-Bear :: 오로지 비-캡슐리어만을 상대로 전투하는 캡슐리어를 다소 비하적으로 일컫는 말]도 아니고, 도망칠 수 있어.”

 페일리는 아주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정한다. 함선까지 교체해 놓은 마당에, 작은(?) 위험의 증가 때문에 탐사의 기회를 포기하기는 싫었던 모양이다. 그 말을 듣고, ‘오빠’가 통신망의 건너편에서 유쾌하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사실, 이 ‘오빠’가 실제로 웃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빠’는 우주에 나가 있다. 이는 ‘오빠’가 캡슐 안에 들어가 있음을 의미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캡슐 안은 불쾌한(?) 액체로 가득 차 있다. 그런 상태에서 ‘유쾌하게 웃을’수는 없다. 지금 들리는 이 웃음소리는, 적당히 합성된 소리일 테다. (엄밀하게 따지면, 지금까지의 말소리도 전부!) 하지만 캡슐리어들에게 그러한 사실은 별로 중요치 않고, 또 합성 기술이 워낙 발달했기 때문에 실제와 괴리감이 느껴지지도 않는다.

 “하하하! 너, 그러다 한번 제대로 걸린다.”
 “뭐 어때. 이 배도 터질 때가 됐는 걸. 본전은 한참 전에 뽑았고.”
 “배는 둘째치고, 그러다 네 뇌에 박은 임플란트[Implant]들까지 털린다고. 어디 그뿐이냐? 전략순양함 터뜨려 먹으면, 관련된 기억에 손상도 입잖아. 그러다 또 페일[Fail]리 된다?”

 캡슐리어들의 대화가 이렇다. ‘죽는다’는 개념에서 벗어난 이들이기에, ‘웜홀의 유령’이나 ‘해적’들에게 잡혀 배와 캡슐이 모두 터지는 상황에서 중요한 건 이들의 목숨이 아니라, 이들의 함선, 신체에 부착된 고가의 물품들이다.

 “아 또 왜 시비야 라키라스. 몰라. 안 터지면 되잖아. 맞다. 너 전투용 정신연결 모듈[Warfare Mindlink]가지고 들어간 거 아냐? 그럼 됐잖아.”

 페일리는 라키라스[Rakiras Locke]의 계속된 비아냥과, 도저히 참고 들어줄 수 없는 썰렁한 농담에 짜증이 난 듯, ‘오빠’라는 호칭 대신 이름을 강하게 부르거나, ‘너’라고 지칭한다. 굳이 따져 보자면, 화가 났을 때만 이런 행동을 보인다는 건 이 둘의 사이가 정말로 화목하다는 징표이다. 남매간의 평균적인 우호도는 오래 전 이브 게이트가 열려 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갱 부스터[Gang Booster, 정신연결(마인드링크) 모듈의 다른 표현] 빵빵하게 돌려줘 봐야 뭐하냐. 네가 제대로 잡혀버리면 고작 몇 초 더 버틸 뿐인데.”
 “말릴 생각도 없으면서 괜히 트집잡지 마 라키라스. 아무튼, 간다.”
 “하하! 그래. 알겠다. 아, 좌표 뽑아내기 귀찮으니, 내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통신이 끝나자마자 페일리는 캡슐 속으로 들어가고, 뒤이어 텐구급 전략순양함에 결합한다. 곧바로 스테이션에 출항 허가를 구한다. 평시에 특별한 허가절차가 있는 것은 아니고, 다만 ‘버튼을 누르면 곧바로 허가가 떨어지는’정도의 형식적인 과정이 있을 뿐이다. 허가가 나자 마자 페일리는 곧바로 스테이션 밖으로 나가, Osmon 성계 내의 Inaya 게이트로 워프한다. 마카리엘 급 전함도 전함치고는 날렵한 편이지만, 순양함급에 비할 정도는 아니다. 텐구급 전략순양함은 훨씬 빨리 워프에 돌입하고, 최고 워프속도(50% 더 빠른 초당 3AU)에도 더 빨리 도달한다.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의 워프와는 달리 워프 시작지점과 도착지점이 서로 태양의 맞은편에 있기 때문에, 체감 속도도 훨씬 빠르다. 푸른색 빛을 내뿜는 Osmon 항성이 순식간에 등 뒤로 밀려난다. 하지만 페일리가 이런 광경에 신기함을 느끼기엔 경력이 너무 길다. 페일리는 명령을 두 번 내리기도 귀찮다는 듯, ‘도착과 동시에 점프’명령을 내려 놓고는,  (캡슐리어라면 예외적인 상황이 아닌 한 벗어날 수 없는) 뇌로 주입되어 들어오는 지식에 생각을 맡긴다.

****

The Forge 구역 > Aulari 성좌 > Inaya 성계
칼다리 국
치안수준 0.5523
이브 표준시 13:55

 점프가 끝나자마자, Inaya의 8번 행성, 지름 26,340km의 가스 덩어리가 페일리를 맞이한다. 행성들의 공전면이 조금씩 비틀려 있는 성계라 그런지, 행성이 있는 위치가 약간의 위화감을 조성한다.

 “Inaya에 들어왔어. 그쪽으로 워프하면 돼?”
“응.”

 라키라스가 페일리의 질문에 단답형으로 대답한다. 페일리는 곧장 함대 시스템에 명령하여, 라키라스가 있는 좌표로 워프할 것을 명령한다. 함선이 허공을 향해 얼라인을 시작한다. 당연한 일이다. 프로브를 통한 측량 없이는 찾는 것이 불가능한, 수 AU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웜홀이 육안이나, 함선의 자체 레이더에 포착될 리 없기 때문이다. 몇 초 뒤, 함선이 워프 터널로 진입하고, 약 10여 AU를 워프하여 라키라스의 근처에 랜딩한다.

 ‘X702. 자연소멸까지 4시간 이상 20시간 미만 남았고, 허용 질량엔 아직 이상 없음. 좌표를 저장하고… 됐다.’

 페일리는 습관적으로 웜홀의 기본적 정보를 확인하고, 성계 내 웜홀의 좌표를 기록해 둔다. 웜홀 탐사에 있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웜홀 탐사에 익숙하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시절, 대충 넘어갔다가 웜홀 안에 갇혀 곤욕을 치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귀찮음을 잘 타는 페일리도 여기서만큼은 철저함을 지킨다.

 “1분만 기다려. 자기장이 안정화되려면 시간이 좀 걸려”

 라키라스가 페일리에게 말한다. 같은 웜홀에 짧은 간격으로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해서, 함선의 극성이 부자연스럽게 바뀐 모양이다. 이 상태로 웜홀에 진입하지만 않으면,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소되는 사소한 문제이다.

 “여기서 1분을 기다리자고?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페일리가 반문한다. 그도 그럴 것이, 하이 시큐리티 우주의 웜홀 입구에 두 대의 텐구급 전략순양함이 앉아 있는 광경은 해적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저희 곧 웜홀에 들어가서 탐사할 거예요. 기회를 봐서 몰래 들어와 잡아먹으세요’라고 광고하는 것과 다를 게 없는 것이다.

 “언젠 해적같은 거 신경쓰지 않는다며. 갑자기 왜 겁을 먹고 그래.”
 “……뭐, 그건 그렇네.”

 그렇게 라키라스의 말에 수긍한 페일리는, 웜홀로부터 약 2.5km 궤도를 공전하도록 함선에 명령을 내린 후, 잠깐을 기다린다. 1분이 지나자, 곧바로 라키라스가 웜홀로 진입한다. 자기장이 정상화되자마자 웜홀 안으로 진입하도록 명령을 예약해 놓았던 모양이다.

 ‘아, 저 오빠놈이 정말…… 말은 하고 들어가라 좀!’

 페일리는 혼자만의 생각으로 투덜거리고 나서, 함선에 웜홀 진입 명령을 내린다. 함선이 웜홀로 빨려들어가면서, 카메라 드론에 비치는 주변의 우주가 왜곡되기 시작한다. 푸른 빛에 둘러싸인 칼다리 지역의 성운이 점차 흐려지면서, 웜홀 우주의 불길한 감청색 성운이 자리를 잡아간다.

****

Unknown R09 > Unknown C80 > J114048
Unknown
치안수준 –1.0000
이브 표준시 13:59

 - 경고 : 치안 수준이 낮은 지역에 진입합니다. CONCORD의 보호를 받을 수 없습니다 -

 대-캡슐리어 전투를 경험한 적은 물론, 저치안 지역[Low-Security Space]에 진입해 본 적도 없으며, 간단한 대응수칙조차 숙지하지 않은 캡슐리어들이 이 경고문을 마주쳤을 때 보이는 반응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이 경고문을 무시하는 순간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될 마냥, 곧장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이고, 둘째는 경고문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계속 진행하는 것이다. 보통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캡슐리어들은, 짧으면 이삼 분, 길면 몇 시간 내에 자신의 홈 스테이션으로 강제 이송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우주 해적에게 잡혀 배와 캡슐이 파괴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관련 경험이 풍부한 페일리에게 이 경고문은 워프하며 지나치는 소행성대보다도 가치가 없다. 페일리는 경고문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웜홀의 출구 좌표를 기록한 뒤, 함선 자체 장거리 레이더가 포착한 어노말리 목록을 검토한다. 웜홀에는, 이브 게이트 붕괴 전 고대 지구인들이 남기고 갔다고 ‘추측되는’, 이른바 ‘슬리퍼[Sleeper]’들의 잔재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다. 여기서 포착되는 어노말리는 이 잔재들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이다. ‘Fortification Frontier Stronghold’, ‘Outpost Frontier Stronghold’, ‘Solar Cell’, ‘The Oruze Consturct’ 따위의 명칭, 규모 3 웜홀에서 나타나는 슬리퍼 구조물들이 목록화되어 나타난다.

 “뭐, 이제 알아서 털어먹어. 난 여기서 클록하고 누가 들어오나 감시나 하고 있을게.”
“오케이.”

 라키라스의 함선이 MWD를 가동하여 웜홀 입구에서 멀어지기 시작한다. 적당히 거리가 벌어지자, 라키라스는 클로킹 모듈을 작동시킨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페일리의 함선의 모든 디스플레이에서 라키라스가 포착되지 않는다. 물론, 유의미한 크기의 물체가 2km 이내로 접근하면 클로킹이 해제되기는 하지만, 특수한 상황이 아닌 한 우주 공간에서 그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페일리는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그렇다고 해도 1.2AU가 떨어져 있는) “Fortification Frontier Stronghold” 로 분류된 신호로 워프 명령을 내린다. 워프가 개시됨과 동시에, 페일리는 총 3종의 보호막 강화 필드를 모두 미리 작동시켜 둔다. 모듈 하나가 1회 작동할 때마다 10초간 보호막의 저항력을 강화시키면서, 20에서 32GJ[Giga Joule, 기가줄]의 에너지를 소모하지만, 최대 에너지 저장량이 2750GJ에 육박하고, 초당 최대 36GJ의 에너지를 생산해낼 수 있는 텐구급 전략순양함에겐 별로 의미 있는 수치가 아니다.

 보호막 강화 장치가 두 번째 작동주기에 접어들 무렵, 페일리의 함선이 목표지점에 랜딩하기 시작한다. 페일리는 어떤 캡슐리어가 이 “Fortification Frontier Stronghold”를 줄이면 “ffs”임을 소재로 썰렁한 농담을 했던 것, 그걸 듣고 짜증이 난 나머지 그 캡슐리어에 백만 Isk[EVE의 화폐단위]정도의 현상금을 걸어버렸던 것을 기억해낸다.

 ‘하, 그때 난 조금이나마 순수했었는데.’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슬리퍼 드론들이 깨어나 순식간에 텐구를 락온하고 공격하기 시작한다. 고작 두 대의 프리깃급 슬리퍼와, 또 두 대의 순양함급 슬리퍼가 있을 뿐이지만, 텐구에 가해지는 유효 타격은 약 20분 전 싸웠던 엔젤 카르텔의 전함 수십 대의 화력보다 강하다. 화력 자체는 엔젤 카르텔의 전함이 조금 높을지 모르나, 명중률의 측면에서 슬리퍼들이 엄청난 우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 이럴 때가 아니지’

 페일리는 곧장 집중을 시작해, 네 기의 슬리퍼를 모두 락온하기 시작한 다음, 소형 함종에 적합한 정밀 미사일을 준비한다. 그러면서 비상시에 빠르게 워프아웃할 수 있도록 웜홀 내 1번 행성 쪽으로 얼라인을 해 놓은 뒤, 애프터버너를 가동시킨다. 하지만, 슬리퍼 프리깃들이 어느새 접근하여 웹을 걸어 놓은 상태라 속도가 크게 붙지는 않는다. 페일리는 한편으로, 지금 감시되고 있지 않은 다른 웜홀 입구로부터 ‘웜홀의 유령’이 잠입해 오지는 않는지 확인하기 위해, 약 14AU 내에 있는 모든 캡슐리어의 함선을 감지하도록 설정되어 있는 장거리 방향 스캔 결과를 1~2초에 한 번씩 살펴본다.

 프리깃 슬리퍼의 락온이 완료될 무렵, 텐구의 보호막이 약 10%정도 손상을 입는다. 페일리는 조용히 쉴드 부스터를 작동시킨다. 150GJ에 육박하는 엄청난 에너지가 한순간에 소모되면서, 텐구의 보호막이 모두 복구된다. 락온이 모두 완료됨과 동시에 텐구로부터 5발의 미사일이 슬리퍼 프리깃을 향해 날아간다. 만약 배를 바꾸지 않고, 마카리엘급 전함으로 웜홀에 들어오는 미친 짓(?)을 했더라면 어땠을까. 800mm 연발포로는 빠르게 주위를 공전하는 프리깃을 제대로 조준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텐구급 전략순양함은 사용할 수 없는) 드론을 풀어 공격할 수는 있었겠지만, 나름 똑똑한 슬리퍼들이 그 드론을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정밀 미사일은 작고 빠른 슬리퍼 프리깃에도 충분한 유효타격을 가한다. 몇십 초 되지 않아 첫 번째 슬리퍼 프리깃이 파괴되고, 또 몇십 초 뒤 두 번째 슬리퍼 프리깃이 우주의 잔해로 승화한다. 페일리는 미사일의 종류를 바꾸지 않고 곧장 순양함급 함선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엄밀히 따지면, 대형함 공격용 Fury 미사일이 조금 더 효율적이기는 하지만, 미사일의 종류를 바꿀 때 생기는 시간낭비를 메꿀 수준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간이 조금 더 걸릴 뿐, 두 기의 순양함도 얼마 되지 않아 텐구의 미사일 세례에 운명을 달리한다.

 4척의 함선이 모두 파괴되었음을 감지한 슬리퍼가 추가로 깨어난다. 이번엔 총 4기의 순양함급 함선이다. 함종 분류를 보아하니, 그 중 둘은 에너지 무력화 장치[Energy Neutralizer]와 웹을 장착한 특수 순양함인 것 같다. 하지만 고급 장비를 충분히 갖추고, 풍부한 경험을 보유한 캡슐리어에 의해 조종되는 텐구급 전략순양함 앞에서 크게 위협적인 상대는 아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들 역시 모두 파괴가 완료된다.

 슬리퍼들의 인공지능을 프로그래밍한 고대의 지구인은, 순차투입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전략인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모두 파괴가 완료되고 나서야, 1척의 전함급 슬리퍼와 4척의 순양함급 슬리퍼가 추가적으로 깨어난다.

 페일리는 어느새 자신과 슬리퍼들 사이의 거리가 미사일의 최대사정거리보다 벗어났음을 깨닫고, 함선의 방향을 돌린다. 그로 인해 순간적으로 함선과 슬리퍼 전함간의 횡단선 속도가 두자릿수로 떨어진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리퍼 전함의 주포가 텐구에 명중한다. 순식간에 보호막의 사분의 일 정도가 손상된다. 하지만 페일리는 쉴드 부스터를 서너 차례 돌려 손상된 보호막을 모두 복구시키고는, 슬리퍼 전함을 중심으로 한 약 30km 궤도를 최대 속력으로 돌도록 함선에 명령을 내린 뒤, 순양함에부터 차례로 미사일을 날리기 시작한다. 궤도 공전에 들어간 이후부터, 슬리퍼 전함의 거대한 주포는 텐구급 전략순양함을 제대로 조준할 수 없어 계속 빗맞추기만 할 뿐이다. 결국, 이번에도 네 척의 보조 순양함이 전멸하고, 퓨리탄으로 재장전을 마친 텐구가 슬리퍼 전함의 장갑을 천천히 잠식해 들어가면서, 하나의 ‘ffs’가 ‘털린다’.

 페일리는 일단 쉴드 강화 필드를 제외한 모든 모듈을 끈 뒤, 현재 위치의 좌표를 기록하여, 나중에 슬리퍼 함선의 잔해를 인양해갈 수 있도록 한다. 그리고 곧이어 다음 어노말리로 워프할 준비를 한다. 다음 목표는 “Solar Cell”이라 명명된 구조물. 현재 위치에서 약 2.7AU정도 떨어져 있다. 또 한번의 무의미한(?) 워프가 끝나고, 페일리는 이 “Solar Cell”에 도착한다.

 전투개요 디스플레이에 한 기씩의 프리깃, 순양함, 전함이 포착된다. “Solar Cell” 구조물에 처음부터 전함이 순찰을 돌고 있는 사례는 드물지만, 가끔씩은 있는 일이다. 이 경우 주의할 사항은, 당황한 나머지 워프 방해장치[Warp Disrupter]를 사용하는 프리깃을 먼저 파괴해 버리면 그 프리깃과 연결되어 있는 다른 슬리퍼들이 줄줄이 깨어나 집중공격을 받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새로 깨어난 슬리퍼들이 워프 방해장치를 사용하는 사례는 보고되지 않았으나, 다수의 웹과 에너지 무력화 장치를 사용하기 때문에, 빠른 속력과 에너지 재생이 주 방어수단인 텐구에게는 치명적이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페일리는, 순식간에 접근하여 웹과 워프 방해를 거는 프리깃과, 웹을 걸고 있는 순양함을 무시하고, 우선 전함급 슬리퍼를 향해 공격을 개시한다. 전함급 슬리퍼의 장갑이 모두 뚫리고, 그 구조에 타격이 가해져 금방이라도 파괴될 상태에 놓였을 무렵, 장거리 방향 스캐너에 불길한 함종이 감지되었다는 보고가 들어온다. 거의 동시에, 오빠 라키라스로부터 통신이 들어온다.

 “장거리 스캔에 프로테우스[Proteus]급 전략순양함이 잡힌다. 다른 입구에서 들어온 것 같아. 잡히기 전에 빨리 빠져나와.”

 프로테우스함은, 갈란테 연방의 전략순양함으로, 클로킹 능력과 장거리 워프 방해 능력, 그리고 강한 방어력을 동시에 갖출 수 있기에 이른바 ‘웜홀의 유령’들이 먹이감을 ‘잡아 놓는’ 역할로 간혹 사용한다. 같은 갈란테 연방의 아라주[Arazu]급 첩보함[Recon Ship], 민마타 공화국의 로키[Loki]급 전략순양함이나, 레이피어[Rapier]급 첩보함이 더 효율적이라는 의견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Proteus.jpg
<프로테우스급 전략순양함 - 클록&태클>

 클로킹을 장착한 프로테우스함의 최대 공격력을 수치화하면, 초당 500을 넘기기 어렵다. 반면, 현재 페일리가 타고 있는 텐구급 전략순양함의 장비체계가 프로테우스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는 양을 수치화하면 최소 800이 넘고, 라키라스의 마인드링크를 얻는다면 최소치가 1300, 순간 최대치는 3500에 육박한다. 슬리퍼들의 공격력을 포함하더라도 충분히 여유 있는 수치이다. 하지만, 웜홀의 유령은 혼자 다니는 일이 거의 없다. 프로테우스가 돌아다니고 있다면, 필시 웜홀의 반대편에 다른 함선들이 대기하고 있을 것이다. 예컨대, 텐구의 에너지를 순식간에 0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아마르 제국의 커스[Curse]급 첩보함이 있다면, 쉴드 부스터를 작동시키지 못해 순식간에 배를 잃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 어떡하지? 프리깃한테 워프 방해가 걸려있는데……”

 페일리가 처음으로 다소 불안한 목소리를 낸다. 이 말을 들은 라키라스도, 여유를 잃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뭐? 먼저 처리 안하고 뭐했어! 빨리 죽이고 빠져나와. 진짜 큰일난다, 너.”

 물론, 페일리가 이런 상황에 당황하여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페일리는 이미 프리깃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다. 문제가 있다면, 방금 전까지 전함급 슬리퍼를 상대하느라 대형 함선용 퓨리탄을 장착한 상대였기 때문에, 프리깃에 큰 타격을 줄 수 없어 시간이 지체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 Solar Cell이야. 어쩔 수 없었다고. 아, 진짜 큰일났네… 지금 퓨리탄 쓰고 있는데…….”

 페일리는 슬리퍼 프리깃의 잔여 장갑량을 주시하며 약간 떨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한다. (물론, 이조차 캡슐리어의 심리상태를 분석하여 합성해 낸 것이기는 하다) 라키라스는 크게 한숨을 쉬며 말한다.

 “진짜 큰일이구만. 일단 난 구석에 쳐박혔어. 프로테우스가 근거리 스캔에 잡히면 바로 말해. 마인드링크 줄 테니까.”
 “……응”

 어찌 보면 라키라스의 행동이 매우 무책임해보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라키라스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라키라스가 같은 텐구급 전략순양함을 타고 있기는 하지만, 장비체계가 전혀 다르기에 전투능력은 전무하다. 이 상황에서 라키라스가 전투지역에 진입해 봐야, 전혀 의미 없는 손실만이 추가될 뿐이다.

Tengu Wormhole Recon and Boost.jpg
<텐구급 전략순양함 - 정찰&함대지원>

 ‘두 발만 더…….’

 슬리퍼 프리깃의 장갑이 거의 모두 파괴되었다. 미사일이 두 번만 더 사출된다면 슬리퍼 프리깃이 파괴될 것이고, 페일리는 곧바로 얼라인하고 있던 천체로 도망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프로테우스급 전략순양함이 페일리의 텐구로부터 약 45km 떨어진 곳에 랜딩한다.

 “프로테우스! 45km 랜딩. 오빠! 빨리! 갱 부스터! 당장!”

 페일리가 다급하게 통신에 대고 외친다. 프로테우스급 함선에 다소 고급의 워프 방해장치가 장착되었다면, 단기적으로는 최대 54km, 지속적으로는 45km 떨어진 목표에까지 워프 방해를 걸 수가 있다. 물론, 100MN 애프터버너를 장착한 텐구의 최대 속력은 프로테우스보다 빠르지만, 현재 페일리는 슬리퍼 순양함에게 웹이 걸려 있는 상태이기에 최대 속력의 절반도 낼 수 없는 상황이다. 아주 위험하다.

 “못 도망가겠어? 일단 마인드링크 작동시켰어. 최대한 도망쳐 봐.”

 마인드링크 덕에 추진장비와 보호막 장비의 효율이 급증한다. 페일리는 곧바로 애프터버너에 과부하[Overload/Overheat]를 걸어 순간 최대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그 사이, 프리깃을 파괴하는 데 필요한 마지막 미사일 뭉치가 발사된다. 하지만, 미사일이 프리깃을 향해 날아가는 사이, 프로테우스가 페일리의 텐구를 락온하고, 장거리 워프 방해를 승계하는 데 성공한다.

 - 경고! 워프 방해 -

 “걸렸어!”
 “젠장! 어떻게든 빠져나와 봐! 도망갈 수 있다며!”

 슬리퍼 프리깃이 파괴되고, 그와 연결된 다른 슬리퍼들이 깨어난다. 희망이 있다면, 이 슬리퍼들이 프로테우스에게 웹을 걸어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슬리퍼들은 그 기대를 배신하고, 오히려 페일리의 텐구를 락온하기 시작한다.

 ‘아… 진짜 큰일났네’

 페일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자기 함선과 프로테우스의 속력을 확인한다. 슬리퍼 순양함에게 웹이 하나 걸려있는 지금, 계속 애프터버너를 과부하시키고 있음에도 최대 속력은 1000m/s 전후. 반면, MWD를 장착한 것으로 추측되는 프로테우스의 현재 속력은 거의 1700m/s에 가까워지고 있다. 물론, 프로테우스도 과부하를 걸고 있는 상태겠지만, 거리를 충분히 좁힐때까지는 과부하가 유지될 수 있을 것이기에 큰 의미가 없는 사실이다.

 프로테우스에게 고급 웹이 장착되어 있다면, 19.5km 지점에서부터 웹을 거는 것이 가능하다. 랜딩 이후 벌려놓은 거리가 이미 45km로 다시 줄어들었으므로, 현재 여유거리는 45-19.5 = 25.5km. 상대속도는 –0.7km/s이니 프로테우스의 웹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기까지는 36초 정도의 시간이 남았다. 프로테우스에게 웹까지 걸려버리면 거의 희망이 없다. 36초 내에 슬리퍼들이 프로테우스로 목표를 바꾸기를 기도할 뿐이다. 슬리퍼의 인공지능은 어디까지나 대 침입자에 최적화되어 있기에, 침입자가 여러 갈래로 분열된 상태에서 간혹 효율적이지 못한 선택을 하는 경우가 있으니 말이다.

 “필그림[Pilgrim]급 첩보함, 레이피어급 첩보함 진입. 아직 못 빠져나왔어?”
 “아… 돌겠네. 어떻게 방법 없을까 오빠?”

  약 10초 뒤, 프로테우스와의 거리가 38km까지 좁혀졌을 때, 장거리 스캔에 레이피어와 필그림이 잡힌다. 로키급, 리전급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지만, 이들만으로도 페일리의 텐구를 파괴하기에 충분하다. 레이피어급 첩보함은 기본 장비만으로도 최대 52km에서 웹을 걸 수 있고, 필그림급 첩보함은 접근하기만 하면 수십 초 내에 텐구의 에너지를 고갈시켜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 어쩌겠니. 슬리퍼들한테 기도해야지. 아, 거기 좌표 찍어놔라. 나중에 네 시체나 수습해야겠다.”
 “자기 일 아니라고 농담하는 것 봐. 캡슐까지 터질 상황은 아니거든?”

 라키라스의 태도가 갑자기 바뀐 이유는, 아마 나름대로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일 것이다. 어차피 터질 배, 이미 잃은 셈 치자는 식이다. 페일리는 그런 오빠에게 퉁명스럽게 말을 쏘아붙이고는, 다시 전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과부하가 걸린 애프터버너가 조금씩 손상되고 있다. 프로테우스와의 거리는 어느새 24km까지 좁혀졌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필그림과 레이피어도 이쪽으로 워프를 시작한 후일 것이다. 라키라스가 상황에 맞지 않은 농담을 섞어 말하긴 했지만, 사실 현재 탈출구는 그것밖에 없다. 슬리퍼에게 기도하는 것.

 7초 뒤, 결국 프로테우스가 텐구에게 웹을 거는 데 성공한다. 지금 상황에서는 애프터버너를 과부하시켜봐야 더 이상 의미가 없다. 페일리는 일단 애프터버너의 과부하를 종료한다. 얼마 되지 않아, 레이피어와 필그림이 약 75km 떨어진 지점에 랜딩한다. 이들이 워프를 시작한 시점이 언제인지를 생각해도 조금 멀리 떨어진 거리이기는 하다. ‘웜홀의 유령’짓을 하는 놈들치고는 겁이 많은 녀석들이었던것 같다. 모르긴 해도, 곧장 워프하기 겁이 나 ‘프로테우스에서 10km 떨어진 지점’으로 워프명령을 내렸을 것이다.
레이피어의 최대 속력은 2300m/s. 필그림은 최근 자주 사용되는 함선이 아니기에 무슨 장비체계를 갖추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1800m/s 근처인 것 같다. 일단, 30초 내에 레이피어는 페일리에게 웹을 걸어버릴 것이고, 그렇게 되면 페일리는 필그림이 가까이 다가와 에너지를 모두 고갈시켜버릴 때까지 가만히 멈춰 있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페일리는 일단, 상황을 최대한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하여, 레이피어를 락온하고, 미사일 런처에 과부하를 건 이후 공격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장비체계를 갖춘 레이피어의 방어력, 다른 말로 유효체력[EHP, Effective HitPoint]을 계산하면 약 31,000. 약 1분동안 미사일 세례를 퍼붓는다면 충분히 퇴각을 유도할 수 있다. 슬리퍼들이 도와준다면 더욱 빨리. 그렇게만 된다면, 탈출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어느새 프로테우스가 근접무기인 블라스터의 유효사거리 안으로 접근해, 공격을 퍼붓기 시작한다. 반물질 탄환이 보호막을 계속 강타한다. 하지만 앞서 검토해 봤던 것처럼, 클로킹 모듈을 갖춘 프로테우스의 공격력은 텐구의 보호막을 뚫기에 역부족이다. 페일리는 프로테우스를 무시하고 레이피어와 필그림과의 거리와, 슬리퍼들의 행동에만 모든 신경을 집중한다.

 약 20초 뒤, 레이피어가 50km 이내로 접근해 장거리 웹을 걸기 시작한다. 애프터버너를 켠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텐구의 속도가 200m/s 이하까지 떨어진다. 레이피어에 몇 묶음의 미사일이 명중하긴 했지만, 아직 레이피어의 보호막 잔여량은 40초 정도를 버티기에 충분하다. 레이피어보다 약간 느린 필그림은 아직 65km지점에 있다. 필그림이 위협이 되려면 최소한 13km 이내까지 접근해야 하지만, 지금과 같이 페일리가 사실상 멈춰 있는 상태라면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어렵다. 현재 MWD 과부하를 중지한 필그림의 속도는 1300m/s. 초당 1.1km씩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아! 슬리퍼들이 레이피어 친다!”

 그 순간, 슬리퍼들이 기도에 응답했는지, 공격대상을 레이피어로 바꾸기 시작한다. 페일리는 반가운 나머지 그 사실을 라키라스에게 생중계한다. 라키라스가 뭐라고 대답을 해 주지만, 페일리의 귀에는 들리지 않은 것 같다. 레이피어의 보호막이 빠른 속도로 고갈된다. 레이피어는 약 20초 뒤, 보호막이 모두 고갈되고 나서도 어떻게든 버텨보려 하지만, 강화가 전혀 되지 않은 장갑이 순식간에 파괴되는 것을 깨닫고는 4번 행성 방향으로 워프하며 전장에서 이탈한다.

 레이피어가 걸었던 두개의 웹이 무효화되면서, 텐구에 걸린 웹은 다시 프로테우스의 웹 하나로 돌아갔고, 텐구의 최대속력은 700m/s까지 상승한다. 현재 필그림과의 거리는 25km. 상대속도는 –0.6km/s. 필그림이 위험거리인 13km까지 접근하기에는 20초가 남아 있다. 하지만, 프로테우스에게 웹이 걸려 있는 이상, 텐구의 속력이 필그림보다 빨라질 수 없기에, 결국 잡히는 건 시간문제이다.

 ‘일단 어떻게든 필그림을 쫓아내야 돼.’

 페일리는 이렇게 생각하며, 필그림을 향해 미사일을 날리기 시작한다. 저 필그림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장비를 맞췄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속도로 보면 필그림은 800mm 두께의 추가장갑을 하나 장착한 다소 비효율적인 방어체계를 사용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대 키네틱 EHP는 28,000 전후. 56초만 버티면 필그림을 쫓아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56초는 필그림이 텐구에게 완전히 접근하여 에너지를 완전히 뽑아내기에도 충분한 시간이다. 페일리가 희망을 버리려는 순간, 슬리퍼들이 목표를 프로테우스로 바꿔 프로테우스에게 다중의 웹을 걸기 시작한다. 프로테우스의 속력이 200m/s까지 감소한다.

 “아!”

 페일리는 재빨리 현재의 상황을 계산해 본다. 현재 프로테우스와의 거리는 2km. 프로테우스의 웹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려면 13km를 더 벌리면 된다. 현재의 상대속도는 +0.5km/s. 26초, 26초가 필요하다. 물론, 프로테우스가 모듈들에 과부하를 건다면 얘기가 달라질 지 모르나, 모르긴 해도 프로테우스는 이미 MWD를 비롯한 많은 장비를 장기간 과부하시킨 상태라, 추가로 과부하를 하기엔 부담스러운 상태일 것이다.

 다른 한편, 필그림과의 거리는 현재 22km. 위험거리까지는 9km가 남았다. 상대속도는 –0.6km/s이니, 15초 내에 필그림에게 에너지 무력화 및 웹을 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애프터버너의 과열 정도를 보면, 조금 더 과부하를 시켜도 큰 탈이 나지는 않을 것 같다. 과부하를 시키면 어떻게 될까…….

 애프터버너 과부하시 내 최대속력은 1km/s까지 증가한다. 그렇게 되면 프로테우스와의 상대속도는 +0.8km/s. 가속되는 시간까지 감안하면 18초 정도가 필요하다. 한편 필그림과의 상대속도는 –0.3km/s. 가속되는 시간을 염두에 두더라도 30초의 여유가 있다.

 “아차!”

 하지만, 페일리는 자신이 생각을 너무 오래 했다는 걸 깨닫는다. 그 사이 시간이 흘러, 필그림은 어느새 19km지점까지 접근해 있다. 페일리는 우선 애프터버너에 과부하를 건 이후 계산을 재개하기 시작하지만… 모르겠다. 지나치게 아슬아슬하다.

 15초가 느리지만 빠르게 지나간다. 프로테우스와의 거리가 14km까지 벌어진다. 필그림과의 거리도 14km에 있다. 1초 뒤, 프로테우스와는 14.8km, 필그림과는 13.7km가 된다. 불과 수m 차이로 운명이 갈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희망마저도 프로테우스가 적기에 웹을 오버로드한다면 끝이다. 또 1초 뒤, 프로테우스와의 거리가 15.6km까지 벌어진다. 필그림과는 13.4km까지 줄어든다. 웹의 사정거리인 15km는 벗어났지만, 웹 모듈이 한 사이클을 돌지 않았기에 그 영향력이 유지되고 있다.

 그렇게 또 다시 1초가 지나는 순간, 자신의 현재 속력을 알리는 숫자가 서서히 증가하기 시작한다. 프로테우스의 웹이 풀렸다. 100MN짜리 출력장비를 달은 탓에 가속이 신속하지는 못하지만, 과부하를 시켜놓은 덕에 필그림의 현재 속도인 1300m/s까지는 충분히 빠르게 도달한다. 필그림과의 위험거리인 13km를 정말 불과 몇십 미터 남겨두고, 텐구의 속력이 필그림보다 빨라진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페일리의 눈에, 애프터버너가 치명적 손상을 입기 직전까지 가열되어 있음을 알리는 경고가 들어온다. 페일리는 과부하를 바로 중단한다.

 하지만, 워프아웃을 위해서는 프로테우스의 워프 방해 사거리인 45km~52km 밖까지 벗어나야 한다. 프로테우스의 속력을 0으로 두더라도 25초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페일리는 필그림을 지속적으로 공격한다. 지금까지 약 26초동안 필그림을 공격했으니, 필그림의 잔여 EHP는 15,000정도 될 것이다. 필그림이 제때 워프아웃을 하지 못하는 실수를 저지른다면, 도망가기 전에 필그림을 잡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그 순간, 페일리는 프로테우스의 속력이 갑자기 증가하는 것을 확인한다. 슬리퍼들이 또 다시 타겟을 바꾸었다. 천만 다행으로, 이번의 타겟은 필그림인 것 같다. 슬리퍼들의 입장에서는 네 기의 침입자를 골고루 때려준(?) 것이지만, 사정을 모두 아는 사람의 입장에서 슬리퍼들은 나에게 1:3의 비율로 유리한 결정을 내려준 꼴이 된다. 이렇게 되면, 현재 필그림에게 가해지는 공격량은 대략 초당 800. 20초 내에 필그림을 파괴할 수 있다. 페일리는 이제야 심리적 압박감에서 해방된 듯, 기쁜 목소리로 라키라스에게 말을 건다.

 “오빠! 오빠! 나 도망쳤어! 잘하면 필그림도 잡을 것 같아!”
 “뭔 소리야. 워프 방해 장비도 없으면서. 적이 워프 명령도 못 내리는 바보도 아니고……”

 라키라스의 말처럼, 필그림이 워프 명령도 못 내리는 바보인 것은 아니었다. 장갑이 빠른 속도로 감소하는 것을 깨달은 필그림이 워프아웃을 시도한다. 다만, 필그림은 여기서 아주 사소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않고, 가장 눈에 잘 뜨이는 천체인 태양을 향해 워프아웃을 시도했던 것이다. 필그림의 현재 진행방향은 태양의 반대쪽. 이는 워프아웃 전 얼라인을 하려면 함선을 180도 선회시켜야 함을 의미한다. 게다가, 슬리퍼들은 아직 필그림에 웹까지 걸지는 못한 상태이며, 필그림은 MWD를 끄지도 않은 상태. 그렇다면, 필그림이 워프에 돌입하기까지는 10초가 훨씬 넘는 시간이 소요된다.

 “아냐! 아냐! 쟤 바보 맞아! 바보 맞아! 잡겠다!”

 페일리는 천 대가 넘는 다른 캡슐리어의 배를 파괴한 경험이 있는 베테랑임에도, 마치 첫 킬을 하는 캡슐리어처럼 기뻐한다. 라키라스는 이런 페일리가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다. 복합적인 이유, 이를테면 ‘3대 1로 기습당하는 상황에서’ ‘대-캡슐리어 장비가 전혀 없는 함선으로’ ‘상대를 역으로 잡아먹는’ 상황이라는 이유 등이 작용했기 때문에, 이번 킬은 전형적인 PvP상황에서 일어나는 어떤 킬보다 재미있을 수가 있다. 하지만 라키라스는 괜히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거 참, 킬 처음 하는 놈도 아니고 뭐가 그리 기쁘냐?”

 이 통신과 함께, 마지막 미사일이 필그림의 선체 깊숙히 박혀, 필그림과 함께 폭발한다. 그 안에 탑승하고 있던 캡슐이 긴급탈출하여, 곧장 다른 천체로 워프아웃한다.

 - gf[Good Fight] :D-

 그 광경을 본 페일리는, 광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웃음을 한 차례 내뿜고는 웜홀 전역에 위와 같은 메시지를 타전한다. 수위 높은 도발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페일리는 이처럼 겉으로는 매너를 지키면서 미묘하게 비하적인 뉘앙스를 풍겨 줌으로써 ‘있어 보이는’ 효과를 누리기로 한다.

 “난리 났네 난리 났어. 잘 한다. 아주 여기 있다고 광고를 하고 다녀라.”
 “뭐, 이제 상관없잖아!”

 그 순간, 아까 도망갔던 레이피어가 약 46km 떨어진 지점에 랜딩한다. 페일리는 순간적으로 당황하지만, 레이피어는 더 이상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없음을 깨닫고 다시 안도한다. 현재 자신의 속도라면, 레이피어가 자신을 락온하기 전에 웹 최대사정거리인 52km 밖으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며, 추가적인 웹 없이는 자신의 최대속력이 레이피어보다 빠르다는 것을 상기해 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필그림이 없는 이상 프로테우스와 레이피어만으로는 말 그대로 ‘평생을 공격해도’ 페일리의 탱구의 탱킹을 뚫을 수 없다.

 그렇더라도, 다시 잡히게 되면 이 녀석들이 어떤 친구를 불러올 지 모르므로, 페일리는 혹시라도 슬리퍼들이 다시 자신을 공격하는 일이 없도록 정밀 미사일을 장전해 프리깃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순양함도 웹을 걸 수는 있으나, 자신의 속력을 따라오지는 못하므로 굳이 신경쓸 필요는 없다. 예상대로 프리깃들이 이번엔 페일리를 목표로 쫓아오기 시작하지만, 이미 락온이 끝나고 미사일을 수 차례 발사한 상태라 프리깃들은 금방 파괴된다. 심지어 프리깃 중 하나는 프로테우스가 공격을 해 둔 모양인지 장갑이 상당히 손상된 상태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프로테우스와의 거리가 45km 이상으로 벌어진다. 프로테우스는 이미 추격할 의욕을 상실한 듯, 워프 방해 장비에 과부하를 걸지도 않은 모양이다. 페일리는 유유히 근처 천체로 워프아웃한 이후, 웜홀 출구에 별다른 방해꾼이 없는 것을 재차 확인하고 곧바로 출구를 향해 워프, 웜홀을 빠져나간다. 라키라스도 그 뒤를 이어 빠져나간다.
 
****

The Forge 구역 > Aulari 성좌 > Inaya 성계
칼다리 국
치안수준 0.5523
이브 표준시 14:37

 “휴, 재밌었다.”
 “그럴 거면 그냥 다시 해적질이나 하고 다니자니까.”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빠져나오자마자, 페일리의 말에 라키라스가 또다시 비틀린 어조로 대답한다. 페일리는 곧바로 Osmon 게이트를 향해 워프를 시작하면서, 얄미운 어투로 다시 대답을 해 준다.

 “일단 돈 좀 충분히 벌고 나서. 아, 오빠. 아까 털어놓은 한 군데 좌표 줄게. 슬리퍼들 잔해는 모두 수거해야지.”
 “하, 그래. 할 일은 해야지. 일단 배부터 갈아타고.”

 라키라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페일리의 뒤를 따라 같은 방향으로 워프를 개시한다. 페일리는 워프하는 도중에도, 아직 흥분이 가시지 않은 들뜬 목소리로 말한다.

 “그나저나 오빠, 해적질은 둘째 치고, 우리도 막 웜홀 유령짓 해보자. 응?”
 “됐어. 또 나만 프로빙하느라 고생하라고?”
 “에이, 그러지 말고!”

*** 기록 종료 ***

============== [현실편] ==============

 소위 ‘엔젤엑바’라 불리는 미션의 보너스 포켓에 진입한다. 벌써 수십번도 더 반복해 본 미션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분명히 안다. 프리깃부터 줄줄이 락온. F1 버튼 클릭. 클릭. 클릭. 미션만 수행하기에는 영 지겨우니, 다른 계정을 사용하여 주변 시스템을 프로빙한다. 그 결과, 털어볼 만한 웜홀이 발견된다.

 미션 목표는 이미 달성했으니, 때려치고 스테이션으로 복귀한 다음 배를 갈아타고 웜홀로 들어간다. 첫 사이트로 워프한다. 슬리퍼 줄줄이 락온하고 F1. 디렉셔널 스캔의 ‘Scan’버튼을 일초에 한 번씩 클릭. F1, 클릭, 클릭, 클릭 …… 클릭, 클릭, F1, 클릭, 클릭 ……… 이 단순노동을 10여분 반복하면 한 사이트가 털린다.

 다음 사이트로 이동, 반복. F1, 클릭, 클릭, 클릭 …… 하는데 갑자기 스캔 목록에 “Proteus”가 잡힌다. 그런데 슬리퍼에게 워프 방해를 받고 있다. 어떻게든 프로테우스가 오기 전에 도망가보려 하지만 실패. 일단 프리깃을 마무리하고, 적당한 천체로 얼라인한 상태로 달리며 워프버튼을 연타한다.

 클릭, 클릭, 클릭, 클릭. 아, AB 오버로드해야겠네, 오버로드. 워프버튼 클릭, 클릭 클릭…… 하고 있자니 필그림과 레이피어가 보인다. 망했구나, 생각하지만 그래도 프로테우스가 튕기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워프버튼을 계속 무한정 연타한다.

 레이피어 랜딩하자마자, 일단 레이피어를 때리고 본다. 어차피 프로테우스는 평생 때려도 안 죽으니까…… 레이피어 락온하고 F1 한번 눌러 놓은 다음엔 계속 워프버튼 클릭, 클릭 클릭, 클릭, 클릭.

 그러다보니 레이피어가 도망간다. 다음은 필그림. 역시 F1 눌러 놓고 워프버튼만 계속 클릭…… 하는데 슬리퍼가 웹을 적당히 걸어준 덕에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어? 탈출할 수도 있겠네 싶어서 AB 오버로드. 웹 사정거리에서 벗어남. 만세.

 다음부터는 그냥 프로테우스의 워프재밍 사정거리에서 벗어나면 바로 워프할 수 있게 워프버튼을 또 무한정 연타한다. 그러고 있으려니, 필그림이 워프재밍도 안 걸렸는데 못 도망가고 죽어준다. ‘저 XX’하고 속으로 비웃으면서 그냥 계속 워프버튼 연타.

 그러다 거리가 충분히 벌어지면 워프가 된다. 도망 끝. 상황 종료. 갱킹도 제대로 못하는 적을 비웃어주고 하이시큐로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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