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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영예로운게 아닐 때 그는 총애를 잃는 길을 택했다.
게시물ID : history_1697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ble6
추천 : 12
조회수 : 2673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4/07/09 13:04:49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더 시에 포함된 프리더스도르프라는 작은 마을의 교회에 낡은 기념판이 하나 걸려 있다. 이 기념판은 이곳에 매장된 프리드리히 대왕 시절의 중령 요한 프리드리히 아돌프 데어 마르비츠에게 헌정된 것이다. 마르비츠는 드레세덴에서 있었던 '7년전쟁' 때 보복 조치로 후버투스부르크 성을 불태우라는 국왕의 명령을 거부한 대가로 관직을 박탈당했다. 1781년 12월 14일 죽은 마르비츠의 기념판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 아닐때 그는 총애를 잃는 길을 택했다." 이 말은 에르빈 롬멜에게도 해당되는 것이다.
 
 
필립 마우리체 레미의 저서 "Mytos Rommel"중에서....
 
 
 
제 2차 세계대전사에서 가장 이름이 잘 알려진 독일의 장군들 중 한명이 바로 이 롬멜 장군일 것입니다. 롬멜 장군의 공적과 전략전술은 둘째치고 그가 왜 이러한 평가를 받는지를 알아볼까 합니다.
 
사실 그는 히틀러의 충성스러운 장군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히틀러의 신임받는 장군들 중 한명이었으며, 또한 히틀러의 배려로 장군으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니까요. 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군은 그 규모가 축소된 한편 상당수의 군인들, 특히 많은 장교진들이 퇴역하거나 그대로 계급이 정체되는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의 독일군은 제국 시절의 영광스러운 명예가 더이상 없었지요. 롬멜 역시 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독일군 최고 무훈 훈장인 푸어 르 메리테를 수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집권하기 직전까지 대위에서 진급을 못합니다. 정통 프로이센 군사 귀족 계급이 아닌 한계도 있거니와, 당시의 상황은 군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또한 그는 여타 다른 인맥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히틀러와의 만남과 인연을 통해 그는 승승장구를 달리게 됩니다. 그에게 있어서 히틀러는 고마운 존재이지요. 옛 독일 제국군의 영광과 명예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명예와 출세를 도와준 이니까요.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투와 전투를 거듭할 수록 히틀러에게 갈수록 회의를 품게 됩니다. 승리의 영광도 잠시, 갈수록 패퇴를 거듭하는 아프리카의 전장에서 히틀러는 롬멜에게 갈수록 어려운 주문을 요구합니다. 그에 따라 병사들의 희생은 급증하게 되고 롬멜은 히틀러의 명령에서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죠. 결국에는 무조건 사수를 요구하는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과감하게 총퇴각 결정을 내려 수만명의 병사들을 살려냅니다. 결국에 그는 히틀러를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나팔수가 아닌, 뼛속까지 옛 독일 제국군의 군인이었던 것이지요.
 
마침내는 히틀러를 제거하고 최후가 다가오는 독일을 어떻게든 살려내기 위해 골몰하나 끝내는 실패로 돌아가고 히틀러의 명령으로 자살하게 됩니다. 그는 직간접적으로 뜻있는 독일 군인들이 모의하고 있었던 히틀러 암살에 관여되어 있었기 때문이죠. 암살 실패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잔인하게 죽어나갈 때, 히틀러 역시 그를 '배신'한 영웅을 죽이고 싶었으나 국민적 영웅이었던 그를 처리하기에는 골치가 아팠기에 자살 명령을 내려 처리하게끔 한것이지요.
 
히틀러의 신임을 잃을지언정 군인으로서의 최후의 양심을 잃지 않고 명예로움을 선택한 그였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을 이끌었던 파울루스 장군은 우수한 참모이기는 하였으나 융통성 없는 성격과 히틀러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으로 수많은 병사들의 목숨을 지옥으로 밀어넣게 됩니다. 소련군의 반격으로 포위된 독일군을 구하기 위해 불과 몇킬로 앞까지 달려온 만슈타인 장군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그저 총통이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하라 하였으니 벗어날수 없다고 말하며 끝까지 버티다가 결국 소련군에게 항복하게 되지요. 그리고 이 결정은 수만명의 독일군 병사들이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강제 노역에 끌려가 겨우 몇천명만이 돌아오게 되는 비극을 겪게 합니다. 병사들의 목숨보다 총통의 명령이 그에게는 절대적이었던 것이었지요....
 
군인에게 있어서 상관의 명령은 절대적이고 복종해야하는 것이나, 그 명령이 명예롭지 못하였을 때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는지를 분명히 보여준 두 사람....
 
이는 여러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는게 아닐까요?
 
p. s : 롬멜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집안 출신으로 병사에서 시작하여 원수가 된 인물이 바로 발터 모델 원수입니다. 모델 원수는 귀족 계급 출신이 아니었기에 롬멜과 마찬가지로 히틀러의 눈에 들었지요.(히틀러는 귀족 계급 출신 군인들을 좋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역시 평범한 출신이었고 귀족 계급 출신들이 자꾸 그를 무시한다는 열등감에 휩싸여있었지요.)
 
모델 원수 역시 히틀러의 명령에 충실히 따라 전쟁을 수행합니다만, 언제까지나 자신의 지휘권을 보전하고 히틀러가 지휘 체계에 간섭하는 것에 단호히 선을 긋습니다.(히틀러는 휘하 장군들을 믿지 못하여 작전 지휘에 여기저기 관여하죠. 여기에 축복을.... 만일 히틀러가 지휘 자체에 대해 장군들에게 모두 일임했으면 큰일났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군인은 전선을 지키는 것이지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는 자신의 의지를 천명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계속된 패색으로 휘하 병사들이 희생당하고, 히틀러의 무의미한 명령이 지속되자 그 역시 명령을 거부하고 휘하 참모진들을 해산한 뒤 병사들을 항복시켜 수십만 장병들의 목숨을 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이러한 행동에 원색적인 비난이 가해지고 군인이 아닌 민간인들을 현혹하는 독일 정부의 선동이 계속되는 것을 목격하자 모델은 자신이 씻을 수 없는 불명예.... 범죄 정권에 협력하였다는 오점을 남겼다고 생각하여 자살하고 맙니다.
 
그가 연합군에게 항복하던 그 날, '국민돌격대'라는 이름아래 훈련도 못받은채 총을 손에 쥔 유소년과 노년의 부하들에게 자신의 이름으로 제대증을 발부하고 "귀관들은 의무를 다했다. 집으로 돌아가라. 이 서류는 합법적인 것이니 만일 탈주병으로 체포되거나 미군의 포로가 되거든 제시하도록 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질 것이다.

라는 최후의 명령을 남기고 제대증을 발부받지 못한 장병들에겐 보급 물자가 소진하는 즉시 항복하라는 명령까지 남겼습니다.
 
그리고 모델은 항복 후 탈출 도중 한 그룹의 병사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출신지와 이름을 일일히 물으며 악수를 나눈뒤, '귀로에 행운을 비네. 독일의 미래는 자네들에게 달렸어. 전쟁에서 패했더라도 용기를 잃지 말게.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훌륭한 청년이 되어달라고 전해주게'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단순한 나치의 장군이었다면 과연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요?
 
-자신의 아이가 심각한 위험에 처해있다면, 아버지는 어둡고 폭설이 몰아치는 험난한 길이라 해도 두려워 말고 가서 지켜줘야 해. 나의 장병들은 내 아이들이야 (Meine Soldaten sind Meine Kinder)
 
발터 모델 원수
 
대한민국의 군인들 뿐만 아니라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이라면, 이들의 예시를 심사숙고해보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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