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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균과 칠천량 해전
게시물ID : history_162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눈비비고
추천 : 12
조회수 : 1759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1/06/09 23:45:25
이전에 쓴 글 올려 봅니다. (이 글 보시는 어떤 분, 죄송합니다 (.. )) 원 출처는 여기구요.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on&divpage=5&sn=on&ss=off&sc=off&keyword=눈시BB&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8844 이 글과 함께 보시면 재밌으실 겁니다. http://www.pgr21.com/zboard4/zboard.php?id=freedom&page=1&sn1=on&divpage=5&sn=on&ss=off&sc=off&keyword=눈시BB&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8804 다 같이 M이 돼서 원균의 병시니즘을 즐겨봅시다. -_- --------------------------------------------------------------------------- 1. 통제사 원균의 떨리는 시작 좋지 않은 이유로 지휘관이 바뀌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해야 될 것은 무엇일까요? 마치 전 감독이 초딩 야구를 한다고 했던 모 감독처럼 전임자를 부정하는 거죠. 원균은 통제사에 부임되는 날 친척 어른 안중홍을 찾아갑니다. 이 떄 이렇게 말하죠. "이 직책이 영광스러운 것이 아니라 오직 이순신에게 치욕을 갚은 것이 통쾌합니다." 안중홍이 "니가 힘들 다 해 적을 이겨서 이순신보다 공이 더 높아진다면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순신 갈았다고 통쾌히 여기면 어떻게 치욕을 씻었다고 할 수 있겠냐" 고 하니 "적을 만나 싸울 때 거리가 멀면 편전을 쓰고 가까우면 장전 쓰고 백병전 하면 칼 쓰고 칼 부러지면 곤봉 쓰니 어찌 이기지 못 하겠습니까" 고 했죠. 안중홍은 "대장이 되어서 칼과 정(곤봉)을 사용하는 데 이른다면 옳겠는가?"라고 하면서 원균이 돌아가고 안방준에게 말합니다. "원균의 사람됨을 보니 큰일을 하기는 글렀다. 조괄(유명하죠? 40만을 말아먹은 -_-;)과 기겁(화우계-소 꼬리에 불 붙여서 적진에 돌격-의 피해자로 역시 졸장의 대명사 중 하나)도 필시 이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하고 오래도록 탄식했다고 합니다. 남쪽의 사람들이 지금도 이 일을 말하면 팔뚝을 걷고 분통해하지 않음이 없다고 마무리하죠. 이것이 안방준의 은봉전서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친척인데도 이렇게 까고 있죠. 2월 28일 원균이 보낸 장계에는 뜬금 없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이전에 이순신이 부산포 앞바다에서 나갔을 때 썰물 때문에 배를 빼앗길 뻔 하다가 다른 배가 와서 구해줬고 이순신은 안골포 만호 우수의 등에 업혀서 도망갔다. 나주 판관 어운급은 불조심하지 않아서 불 나면서 적의 웃음거리가 됐으니 벌을 줘야 된다" 이전 부산포 진격을 까는 내용이었죠. 아마 권율의 정탐꾼이 봤다는 실화가 저 나주 판관 어운급의 배였겠습니다만, 느낌이 전혀 다릅니다. 자... 또 다른 가능성일까요? 아니면 그냥 모함일까요? 에 뭐 모 감독처럼 그 후에 원균이 한 것 중에 진실이 얼마나 있는가를 보고 따져야 될 듯 합니다. 3월 2일에 보낸 장계가 위 장계와 같은 날(3월 20일)에 있는데 여기서는 이전에 이순신이 요구했던 아군 포로 송환자를 받았는데 (가덕도에서 잡힌 포로들은 바로 돌려받습니다) 그것도 사로잡혀서 아군의 허실을 알려줬다며 까 버리죠. 그냥 이전의 출동을 모조리 부정한 겁니다. 그래야 이순신을 갈아버린 명분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어차피 곧바로 장계가 올라와요. 기자와 참 친한 모 감독처럼 장계가 카카오톡도 아니고 심심하면 보내네요. 3월 19일 권율의 서장을 보면 "3월 8일 왜선 대,중,소 3척이 기문포에 왔는데 원균이 항왜 하나를 보내서 회유하니 그 수가 80명이었고 무서워 하고 있었다. 원균이 술을 주고 떠나게 하니 기뻐서 떠나는데 그 뒤를 공격하니 조응도의 배가 선봉에 갔다가 반격을 받았지만 피해가 크지 않다. 조응도는 전사. 그렇게 다 죽이고 18급을 베었다." 고 적혀 있죠. ... 이거 뒤통수죠? 요약하지 말고 그대로 읊으면 "생환하게 되는 것을 기뻐하여 죽 늘어서서 절을 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수히 치사하고는 저희 배 있는 데로 내려가서 두 배에 나누어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 돛을 달려는 즈음에 통제사가 먼저 지자총통을 쏘고 ~ 제선(모든 배)이 앞을 다투어 공격하였다." ... 80명을 상대로 뒤통수를 작렬한 겁니다. 그런데도 배 한 척을 뺏겼다고 하죠. "피해가 크지 않지만요". 선조는 간단한 것도 띄워주는 모 구단 프론트처럼 원균에게 포상할 것을 명합니다. 25일 3척 포획, 수급 47척을 "바쳤으니" 원균에게 논상하라고 했습니다. 수급과 계본을 가지고 온 사람도 같이 상을 주라고 했죠. 비변사가 나무를 하러 온 걸 잡았으니 쉽게 상 주기는 뭐 하다고 하니까 선조는 "나무하러 온 적도 적이다. 딱 보니까 나무하러 오는 척 한 놈들인 거 같다"면서 무마시키죠. 그런데... 22일 김응서의 서장이 올라옵니다. "19일 왜장이 수하를 보내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32명이 중선 한 척을 타고서 나무를 베려고 거제도로 갔는데 조선 주사(수군 대장)가 은밀히 다 죽였다. 또 따로 15명이 있었는데 얘네는 조선 주사가 우리 보면 다 죽인대서 죽이지 말라는 표문까지 보냈는데 이것도 다 죽였다" 고 했다고 하죠. ... 뭐 침략자가 비겁을 논한다는 게 우습긴 하지만 그들에게 비겁하다고 욕을, 그것도 조선 조정에 정식으로 먹게 한 것이 원균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이들은 "32명"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따로 15명이 있었고 얘네도 속아서 죽었답니다. 보통 피해자 측이 자기들 피해를 과장한다면 몰라도 축소하지는 않죠. (원균이 조정에 보낸 수급이 딱 47개였습니다) 권율의 서장에는 대중소 배 한 척씩, 그리고 총 80명이라고 하고 있죠. 문제는 또 있습니다. 사실 조정에서 무시한 거였지만요. 18일 경상 감사 이용순의 서장을 보면 "3월 10일 고성의 배가 사군, 격군 등 140명을 현령이 직접 거느리고 갔는데 패하고 현령도 전사했고 시체를 싣고 돌아왔다. 패전한 절차는 자세히 조사하겠지만, 새로 사람을 뽑아서 현령으로 삼아달라"고 하죠. ... 패전. 패전. 패전. 패전. 권율의 서장에는 "바다로 도망쳐서 많이 죽지 않았다"고 했지만 이 서장의 뉘앙스를 보면 140명 전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적은 단 32명, 거기에 "판옥선"이 빼앗기고 장수 한 명이 전사한 겁니다. ... 뭘까요 이거 -_-; 결국 별 말 없이 무마되는 것 같네요. 적선이 몇 척이든 단 한 척도 뺏기지 않았던 판옥선이 겨우 32명, 그것도 뒤통수를 치다가 한 척이 뺏긴 거예요. 하아... 이게 시작이었습니다. -_- 2. 거가대교 조선시대 완공설 혹은 조선 육군 해병대 설 3월 29일 원균은 서장을 올립니다. "가덕도, 안골포, 죽도, 부산에 드나드는 적들은 거리가 가깝지만 그 수는 수 만이고 각기 고립돼 있다. 그 중 안골포, 가덕도는 3~4천도 안 되니 형세가 고단하다. 육군이 몰아치고 수군이 뒤에 간다면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다. "우신"(어리석은 신하)의 망령된 생각에는 우리 군의 정병이 30여만은 될 수 있을테니 농사 전 4~5월에 한 번 밀어보는 게 어떤가" 하는 내용이었죠. ... 가덕도? 가덕도를 육군으로? 아, 거가대교가 있죠. 거기에 이열종대로 차례대로 건너가면... 에 조선시대에? 그랬으면 동남권 신공항은 바로 가덕도가 됐겠죠. -_-; 거가대교 적자 메꾸기도 벅찬 판에. 그도 아니면 조선 육군에 "상륙전"을 벌이라는 걸까요? 아니면 낙하산으로 공수부대 투입? 진주성에서 나타난 비거가 이제 확실히 군사용으로 쓰인 걸까요? 아니면 조선 육군은 해병대, UDT였던 걸까요? 많은 의문을 뒤로 한 채 비변사는 원균이 잘 몰라서 그런 것 같다면서 애써 감싸면서 무시합니다. 대신 빨리 쳐야 되는 건 맞다고 하죠. 선조는 이에 "안 될 거 같지만, 시험삼아 해 보라고 (권율에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날 일본에서 또 나무하러 온 애들 죽인 걸 따지러 옵니다. -_-; 얘네도 뒤끝 쩌네요. 물론 원균에게는 어떠한 해가 가지도 않았습니다. 이 가운데에서 약 석 달간 원균과 권율의 은근한 힘겨루기가 있었던 듯 합니다. 권율은 당연히 수군으로 먼저 치자고 했고, 원균은 육군이 치라고 했던 거죠. "가덕도"를요. -_-; 이 과정에서 수군의 증강도 순조롭게 이루어져서 제석 산성에 있는 병력 5천 명이 모두 수군에 충원됩니다. (권율 휘하 병력에 대해서 이만얼마 수준이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중에 오천이라면 어마어마하죠) 결국 조정은 남이공을 보내 원균에게 진격을 명하죠. 이 기록이 있는 게 6월 10일. 6월 11일 원균은 다시 안골포와 가덕도의 적을 육군으로 칠 것을 요청합니다. 이에 비변사는 이런 말을 하죠. "대저 군중(軍中)의 일을 제어하는 권한이 체찰사와 도원수에게 있으니, 제장(諸將)으로서는 품하여 지휘를 받아서 진퇴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근일 남쪽의 장수들이 조정에 처치해 달라고 자청하는 일이 다반사여서 체통을 유지시키는 뜻이 도무지 없습니다." 권율이랑 얘기해야지 왜 직접 조정에 얘기하냐는 거죠. -_-; 이런 가운데서 일본의 전쟁 협박은 계속되고 (특히 전라도를 말하죠) 중국 군대를 부르는 일 등이 계속됩니다. 6월 26일, 비변사는 이런 말을 합니다. "“체찰사는 대신(大臣)이고 도원수는 주장(主將)인데도, 절제(節制)의 권한이 주사(舟師)에게 행해지지 않고 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거기에 상응하여 행해야 할 법규대로 적용해야 할 것이요, 그저 고지식하여 어리둥절하게 몇 마디만 조정에 치보(馳報)하고 그만둘 일이 아닙니다." 도체찰사(이원익)과 도원수 권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 누구를 얘기하는 걸까요? 비변사는 수군을 몇 개 부대로 나누어서 교대로 부산포로 나가자고 합니다. 6월 28일, 제목도 좋네요. "원균이 드디어 가덕도 앞바다로 나가다" 그 날의 기사 제목입니다. 이 날 권율의 장계에서 "원균이 맨날 육군보고 안골포 치라고 해서 계속 뭐라 하다가 남이공이 한산도로 가서 독촉하니까 비로소 18일에 나갔다. 이게 남이공의 힘이지 어찌 원균의 마음이었겠는가" 였습니다. -_-; 그 결과를 보죠. 29일 이원익이 남이공에게 받아서 조정에 올린 보고를 보면... "첫 날 장문포에서 자고 이튿날 안골포로 가서 공격하니 적들도 배를 타고 싸움에 응했는데 적이 버티지 못 하고 2척을 빼앗았다. 가덕도로 가니 적은 이미 도망갔고 역시 배만 빼앗았다. 다시 안골포로 가니 적이 공격해 와서 싸우다가 돌아갔다. 여기서 평산포 만호 김축이 눈 밑에 탄환을 맞았고 보성 군수 안홍국이 머리에 맞아 끝내 전사했다." 였습니다. 뭐 나름 적도 이제 물러설 곳이 없다 싶어서 치열하게 싸운 듯 합니다. 거기다 전술도 변해서 이제 대장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으로 보이죠. 임진란 때부터 싸운 김축은 끝내 수군으로 돌아오지 못 합니다. 한 차례 싸움에 장수 둘을 잃은 겁니다. 이 전투야 어느 정도 변명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마지막에 다시 논하겠습니다. 이 때 원균이 상대한 병력은 다치바나, 다카하시 등 큐슈 지역 병력이었는데 조선 수군과 싸운 경험이 없어서 무서움도 몰라서 잘 싸울 수 있었을 거다, 고 김경진님이 추정하시더군요. (전국시대 큐슈 지역에서 명문 가문들입니다. 다치바나 무네시게는 히데요시에게 서국 제일의 명장이라는 말도 듣죠) 원균은 다시 가덕도 육군으로 쳐달라 드립을 치다가 다시 나갑니다. 그 때가 7월 4일. 이 때 조선 수군의 병력은 실록에 확인되는 게 판옥선 134척, 김경진님은 140척으로 추산하시는데 어디서 나온 건지는 모르겠네요. 2월에 이순신이 출동할 때의 63척보다 두 배 이상 많아진 거죠. 7월 10일, 선조는 이렇게 말 합니다. "원균(元均)에게도 아울러 말을 만들어 하유하기를, ‘전일과 같이 후퇴하여 적을 놓아준다면 나라에는 법이 있고 나 역시 사사로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라" 원균의 정치생명도 간당간당하고 있었죠. 이원익은 7월 14일 "이 달 8일 왜선 6백여 척이 부산 앞바다에 있었는데 우도 주사가 7일에 정박했다가 8일에 적선 10여 척을 포획했다"는 장계를 올립니다. 여기서 우도 주사는 배설이죠. 이후 조정의 논의에서 9일의 싸움에서는 아군이 겁 먹어서 화살 한 번 못 쏴 봤다는 말이 나오죠. 8일부터 계속 싸움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기간의 전투 및 가슴이 찢어지고 뼈가 녹을 듯한 상황을 재구성 해 보겠습니다. 3. 칠천량으로 31년 2월 23일,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정기수의 보고에 따르면 "왜적이 풍신수길에게 보고하기를 조선의 주사가 매우 왕성하여 쉽게 거사하기가 쉽지 않다"고 했고, 수길이 감독관 7명을 파견해서 독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들도 수군을 보고 "과연 매우 성대하다. 버틸 수가 없겠다" -_-; 고 했다고 하죠. 그래서 철군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뒷부분은... 뒤에 논할게요. 하아........ 아나 진짜. 7일에는 적선 천척이 바다를 건너오는 것을 보고 열나게 쫓습니다. 이 때 물마루를 넘어서 대마도가 제대로 보일 정도까지 쫓아갔다고 하죠. 김식은 이를 "유인"했다느니 하지만... 천척이 유인할까요? 얘네들은 조선 수군을 보고 죽어라 도망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도 적당히 쫓았으면 돌아와야죠. 그런데 이 정도로 먼 바다까지 나갔다는 것은 어떻게 생각해야 될까요? 여기서 전라우수영 소속 판옥선 일곱 척이 표류해서 서생포로 가고, 육지에 내렸다가 적의 기습을 받고 전멸합니다. 또 경상우수영 소속 다섯 척이 두모포에 표류하죠. 삽시간에 적은 못 잡고 아군만 열 척 넘게 잃은 겁니다. 10척을 뺏았다는 것이 7일인지 8일인지는 확실히 모르겠네요. 이원익의 기록에는 8일인데 -_-a 흐음... 아무튼 재밌는 건 이 때 부산포에도 적이 있었고 조선 수군을 보고 도망갔는데, 조선 수군이 대마도에서 건너 오는 천척을 쫓을 때도 전혀 구원하러 오지 않았다는 거겠죠. 일본은 조선 수군을 무서워 하는데 정작 수군은 이 꼴이니... 9일에는 결국 일본군이 강력하게 반격해 옵니다. 이 때 "군졸들이 겁을 먹어 화살 하나 쏘지 못 했다"고 했죠. 여기서 일본군은 포락(화약을 가득 넣어서 대충 수류탄 비스무리했죠) 등을 던져서 판옥선을 태웠다고 했죠. 재밌는 건 이 때의 주체가 수군이 아닌 일본 수송함대, 시마즈 요시히로 등이었다고 하는군요. 이 해전의 실체는 불분명하지만 "일본은 공격하고" "조선 수군은 도망치는" 상식과는 전혀 다른 일방적인 전투였다는 것은 확실한 듯 하네요. 그리고 그건 권율을 열 받게 할 정도였나 봅니다. 권율은 11일 직접 곤양으로 가서 원균을 불러 곤장을 칩니다. 보통 이럴 땐 휘하 군관들이 대신 맞기 마련인데, 여기서는 원균에게 직접 때렸다는 거죠. 아무리 부하라 하지만 통제사가 직접 곤장을 맞았습니다. (이 때문에 현대 해군은 군함 이름에 권율을 붙이는 걸 반대했다는군요) 14일 다시 출항한 원균, 하지만 이 날도 별 전과를 올리지 못 하고 돌아옵니다. 적선이 너무 많았죠. 하지만 일본 역시 조선 수군이 무서워서 딱히 전투는 없었던 모양입니다. (일본군에서 판옥선 한 척에 타는 병력이 삼백 명 수준이었다고 추정했던 걸 기억해 봅시다) 난중잡록의 경우 적선을 추적하다가 아군이 표류된 걸 이 때라고 기록하는데 일단은 김경진님의 시선을 따라 보겠습니다. 아마 김완의 해소실기에 따른 것 같네요. 거기 있던 인물의 말이니 가장 정확하겠죠. 날이 저물자 원균은 가덕도에 정박합니다. 이 때 가덕도를 맡은 다카하시 무네마쓰는 조선 수군의 상륙을 기다려 공격합니다. 2월 이순신 출동 때도 그랬고 6월에도 잘 싸운 걸 보면 이 양반도 무섭네요 -_-; 그런데... 이 때 원균은 상륙한 병력을 버리고 도망가죠. 400명이 이렇게 학살됩니다. ... 이순신이 이 때 5명 잡혀간 걸로 공성전 한 거 기억나시죠? 이후 조선 수군은 15일에는 칠천량으로 향합니다. 네. 칠천량입니다. 4. 야밤의 기습 김경진님은 징비록에서 이 때 권율에게 곤장을 맞았다는 것을 통해 곤장을 맞은 건 11일, 15일 두 번이라고 설정하셨습니다. 그럴 듯 한 게 이럴 경우 원균의 말이 설명이 되거든요. 11일이면 아직 선조의 말 "원균이 저번처럼 용서 안 한다"는 게 전달되기 어려운 시점이지만 15일이면 가능하죠. 곤장을 치면서 이 말을 전했을 겁니다. 난중잡록에 따르면 이 때 원균은 "적세가 이 모양이니 아무래도 지탱할 수 없다.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으니 어찌하랴. 오늘의 일은 일심으로 순국할 따름이다"고 했습니다. 배설이 이에 강하게 반대하죠. 이에 원균은 "죽고나면 그만이니 너는 많은 말을 말라"고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원균의 태도 변화, 이것은 임금의 말을 들었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징비록에서는 이 때 술을 마셔 누워 있었다고 합니다. 난중잡록의 저 말도 의심해 보긴 해야겠지만, 일단은 넘어 가죠. 어느 쪽이든 자포자기한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의 운명의 밤이 다가 왔습니다.. 15일 밤, 소규모의 적이 난입해서 아군 전선에 화공을 취했다는 것이 공통된 서술입니다. 이제 현장에 있던 김완의 해소실기를 보도록 하죠. 16일 새벽 4시쯤 적이 아군의 군량선을 포위해서 빼앗았고, 이 때 "주장은 조치를 잘 못 하여" 전선들이 붕괴되어 절반은 북으로, 절반은 거제로 달아났다고 합니다. 이 때 김완은 배설과 함께 남아서 적을 상대했는데 그 수가 무려... 무려... 두 척입니다. -_-; 네, 두 척이요. 물론 이들이 선봉이라고 하니 그 뒤에 또 있었겠죠. 하지만 맨 뒤에 남은 김완이 상대한 배가 겨우 두 척이었습니다. 천 척이 포위? 언제 했죠? -_-; 이 때 강응표, 민정붕, 정공청, 등이 "수사를 따라" 먼바다로 도주했다고 했습니다. 그냥 도망간 게 아니라 수사를 따라간 거죠. 마구 도망간 배도 있었지만 이렇게 지휘관이 직접 지휘하는 배들은 명령체계를 따라 도주한 겁니다. 이 때 원균이 직접 "홀로 죽을 각오를 했으니 훌륭하다"는 식의 말을 했다는데 김완이 "상황이 급한데 달아나기만 한다"고 했다고 하죠. 그런데 이 뒤의 서술에 원균은 술에 취해 누워 있었고 군관 김대복이 편전 10발을 쏘고 갔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김대복이 원균의 말을 전하고 갔을 수도 있죠. ... 누구랑 했든 김완이 이렇게 대화하고 다시 적을 봤는데 그 때 적이 2척이었던 겁니다. 이억기와 최호가 전사한 걸 보면 도망갈 사람이 아니죠. 각 배들이 수사를 따라갔다는 것으로 보아 제각기 후퇴한 게 아닌 후퇴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며, 수사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건 통제사 원균밖에 없습니다. 김완과 배설은 항명을 한 거죠. 이 상황에서 배설이 배멀미로 쓰러집니다. -_-; 이에 따라 경상우수군도 후퇴. 남은 건 김완의 배 뿐이었죠. 결국 적이 배 위로 올라왔고, 김완은 적과 상대하다가 바다에 빠져서 포로가 됩니다. "주장! 주장은 어째서 구하러 오지 않는가?" 해소실기 중 한 대목입니다. 그럼 남은 병력은 어디로 갔을까요? 춘원포죠. 5. 한산이 무너지다 소식을 들은 선조부터가 말했듯 이 때의 가장 큰 미스테리는 왜 견내량으로 내려가서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이 때의 후퇴는 낙오야 많았겠지만 명령에 따른 후퇴였죠. 견내량이 막혔는데 배설이 도망갔다면, 배설은 후퇴하는 과정에서도 적의 포위를 뚫고 도망간 게 됩니다. 그런데 이응표, 홍견 등 판옥선을 타고 도망간 전라도 장수들도 있죠. 칠천량에서 견내량으로 도망간 건 배설의 12척만 있었던 게 아닙니다. 그런 면에서 배설이 먼저 도망가서 졌다는 것은 죄를 뒤집어 씌운 거죠. 조선 수군은 충분히 견내량으로 도망갈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춘원포로 갔다는 것은 무엇을 뜻 할까요? 김식의 장계에서도 수군 전체가 흩어진 것이 아니라 같이 후퇴한 것으로 나오고, 싸우다가 모두 불에 타서 침몰되었다고 합니다. 즉, 조선 수군은 원균의 명령이 유지되고 있었던 겁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은 한산도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이런 가정을 해 보고 싶습니다. 원균이 술에 취했다는 것이 공통적인 것이니, 그냥 적이 왔다는 것에 겁 먹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 후퇴 명령을 내렸다는 거죠. 지도를 보시면 견내량 바로 왼쪽으로 움푹 들어간 곳이 있습니다. 노량해전에서 시마즈군이 관음포가 막힌 줄 모르고 들어갔듯 이 때 조선 수군도 그 곳이 견내량인 줄 알고 들어간 게 아니었냐는 거겠죠. 물길에 익숙한데 설마 그랬을까요? 원균이 남의 말 들을 양반이예요. -_-; 술 취한 상태에서 억지를 부렸고, 그게 조선 수군 전체를 끌고 간 게 되었을 거라는 겁니다. 즉 춘원포는 견내량 옆 움푹 들어간 곳이었다는 거죠. ... 왜 굳이 이걸 생각하고 싶냐면... 그게 아니라면 원균은 정말 제정신인 상태에서 조선 수군 전체를 사지로 끌고 갔다는 게 되니까요. 그리고 김경진님은 이걸 따르고 있죠 (...) 이유는 단 하나, 육지에 내리고 싶어서요. 한마디로 술에 취해서 실수했다는 것은 오히려 원균을 옹호해주는 말이라는 겁니다. 진실은 뭘까요? 이렇게 조선 수군은 전멸합니다. 남은 병력 중 지휘가 그나마 유지되던 것은 배설 휘하의 12척 뿐, 나머지는 육지로 도망가거나 견내량으로 도망갔죠. 전사한 것은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 둘 뿐이었습니다. 최호의 경우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공을 세웠듯 유능한 이였고, 이억기는 "원균만 못 하다"는 어이 없는 평가를 받고, 지금도 이순신과 원균에 비해 인지도에서 밀리지만 조선 수군에서 가장 많은 군선을 동원한 주역이었습니다. 왕의 종친이라서 견제받은 건지 몰라도 크게 평가를 못 받지만, 결국 그는 조선 수군의 마지막 명예를 짊어지고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이렇게 조선 수군은 전멸합니다. 6. 칠천량 해전의 진실 김식은 원균, 우치적과 함께 도망갔다가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서 보고합니다. "적이 기습해서 4척이 전소되고 날이 밝자 수많은 왜적이 서너 겹으로 포위해서 우리는 싸우면서 후퇴했다가 추원포에 상륙했다. 전선은 모두 불에 타고 병사들도 죽었는데 원균은 늙어서 맨몸으로 소나무 밑에 앉아 있다가 적 6~7명이 칼을 휘두르며 달려드는 것을 보았는데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경상 우수사 배설 등만이 목숨을 건졌고, 무수한 왜선들이 한산도로 향하였다. 김식의 장계입니다. 이것을 듣고 조정은 혼란에 빠지지만 이후 다른 보고들이 들어오면서 싸운 게 아니라 그냥 도망간 거라는 것을 알게 되죠. 이걸 대표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말이겠죠 -_-; 그렇다면 일본측 기록은 어떨까요? 우선 위에서 언급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정기수의 말부터 보겠습니다. "철군해 돌아가려고 하던 즈음에 소서행장(小西行長) 진중의 졸왜(卒倭) 한 사람이 우리 나라의 군사들이 모두 협착한 속에 있어서 배를 제어 할 수 없는 것을 보고 불의에 습격하기 위해 군사를 잠복시켰다가 밤을 타 쳐들어 갔기 때문에 주사(舟師)의 장졸(將卒)이 창황히 질서를 잃었고 적병이 크게 몰려온 줄 알고 모두 육지로 내렸다가 결국 낭패를 당했다.’ 하였고" 한마디로 이건 그냥 소수의 병력이 틈을 타서 기습했고, 아군은 적이 많은 줄 알고 도망갔다는 거였죠. 이게 당시 일본에서 칠천량 해전의 평가였습니다. 정한위략을 보면 이 때의 전과를 시마즈 타다유타 160척, 도도 다카도라 60여척, 와키자카 야스하루 16척 등으로 나타납니다. 이들 중 제 1공은 역시 도도 다카도라죠. 시마즈 가문의 공적이 크다는 것은 시마즈 가문이 전장에서 그만큼 빨리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수전 준비도 안 했을 시마즈 가문인 것을 생각하면 신기하죠.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16척을 잡았지만 피해가 커서 공이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와키자카가 만난 조선군이 이억기, 최호 등 유일하게 싸운 수군 장수들인 것 같습니다. -_-; 운이 없었던 거죠. 도도 가문의 기록에는 구키 요시아키가 공을 크게 다투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가토 요시아키가 해전에 투입된 시점은 도도 다카도라를 제외한 두 다이묘들에 비해 그리 늦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작은 가문이라서 결정적인 공을 세운 도도와 숫자로 밀어붙인 시마즈와 공을 다툰 것으로 보이네요. +) 전과가 백몇십척씩 되는 것은 과장법도 있지만 판옥선 외에 사후선, 협선 등이 못 해도 판옥선만큼의 수가 되었다는 걸로 설명 가능하죠. 조선 수군은 총 300척 이상이었습니다. 일본은 이 해전에서 공을 크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정기수가 탈출한 후 한 얘기에서도 볼 수 있죠. 조선 수군 때문에 철수까지 생각했던 일본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입니다. 이것은 이것이 그만큼 큰 해전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전투가 아니라, 조선 수군의 자멸이었던 것입니다. 당연히 공을 과장해도 상관 없는 해전을 "조선 수군이 작은 기습을 큰 건 줄 알고 도망간 거다"고 평가 절하 했다는 것은 당시 일본의 인식을 볼 수 있는 거죠. 7. 원균생존설 7월 21일에 성첩(成貼)한 도원수 권율의 서장에 아뢰기를, “신의 군관인 최영길(崔永吉)이 한산도에서 지금에야 비로소 나왔는데 그가 말하기를 ‘원균(元均)이 사지를 벗어나 진주로 향하면서 말하기를, 「사량(蛇梁)에 도착한 대선(大船) 18척과 전라선(全羅船) 20척은 본도에 산재해 있고, 한산에 머물러 있던 군민(軍民)·남녀·군기(軍器)와 여러 곳에서 모여든 잡선(雜船) 등을 남김없이 창선도(昌善島)에 집합시켜 놓았으며, 군량 1만여 석은 일시에 운반하지 못하여 덜어내어 불태웠고, 격군(格軍)은 도망하다 패배한 배는 모두 육지 가까운 곳에 정박시켰으므로 사망자는 많지 않았다. 」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최영길을 곧이어 올려보내겠습니다. 이순신(李舜臣)에게 흩어져 도망한 배를 수습하도록 사량으로 들여보내소서.” 이것은 7월 26일 올라온 권율의 장계입니다. 여기서 권율의 군관 최영길이 원균을 직접 만났다고 돼 있죠. 거짓말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상세합니다. 이것은 원균이 해전에서 패하고도 살아 있다는 것을 뜻 합니다. 김식은 어디까지나 "원균에게 적이 오는 것을 봤다"고 돼 있습니다. 이후 김식의 행적을 보면 그의 말을 믿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그냥 조선군이 원균을 구하러 간 것을 적이라 착각했을 가능성도 있죠 - -a 최영길은 원균을 독촉하고 감시하기 위해 권율이 보낸 군관입니다. 문제는 최영길이 어디에 있다가 원균을 만났는가, 저 보고가 사실이라면 원균은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됐는가겠죠. 저것을 문제 삼은 것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김경진님은 최영길이 감기로 해전에 참전 못 했다가 패전 소식 듣고 원수부로 갔고, 가던 길에 우연히 원균을 만난 것으로 설정했습니다. 또한 저 사실을 알게 된 건 배설이 한산도를 불태운 후 원균에게 보고한 것으로 설정하고 있구요. 하지만 미스터리일 뿐입니다. -_-; 어쨌든 저 장계가 문제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원균이 살아 있다는 것은 조정에서도 확신한 것으로 보입니다. 선조가 도망간 수군 장수들을 벌 주자고 하자 신하들은 주장인 원균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벌을 줘야 된다면서 반박합니다. 이에 선조는 "원균에게만 책임을 전가하지 마라"면서 거부하긴 하지만 결론은 원균이 돌아오면으로 나오죠. 재미 있는 것은 일본에서 "원균을 잡았다"는 게 없다는 거죠. 진주성 전투 후 서예원의 목을 김시민인 척 보낸 적도 있고, 군관 제만춘을 잡아서 통제사인 척 한 적도 있는 게 일본입니다. 그런데 정작 가장 중요한 칠천량 해전의 대장 목을 베었다는 것은 없습니다. 이것은 일본에서도 해전 당시 조선의 대장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을 말해주죠. 뭐 결국 원균은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조정에서 원균이 죽었다는 것을 확정한 건 1601년입니다. 그 최후까지 도저히 알 수 없는 게 원균입니다. 8. 정리 칠천량 해전을 옹호하는 데 있어 가장 큰 것이 "권율이 무모한 작전을 강요했다"는 것입니다. 애초에 역사에 나오는 패전 중에 장수 자신의 능력보다는 상부에서 정한 제한에 묶여 패전한 것이 많기는 합니다. 이것도 좋은 예 중 하나긴 하겠죠. 여기서 많은 압박이 가해지긴 했습니다. 선조는 김식을, 이원익은 남이공을, 권율은 최영길을 보내 압박했고, 직접 두 번 곤장을 치죠. 하지만 원균이 행한 작전들을 보면 이런 일반화에 같이 묶어야 할 지 정말 의문입니다. 거기다 권율에게만 죄를 주기는 뭐 한 게 선조는 그렇게 옹호하던 원균에게 태도를 싹 바꿔서 법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라 했고, 그걸 6년동안 강요받은 이순신은 부산포에서 잘만 싸우기만 했다는 거죠. 일본이 조선 수군을 두려워 해서 전면 철수까지 고려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것은 일반적인 "무리한 작전"이 아니라는 겁니다. 결정적인 것은 이것을 자처한 건 그 누구도 아닌 원균이었습니다. 이순신은 부산포 진공을 반대하지 않았고, 하더라도 "가덕도를 쳐 달라"는 말도 안 되는 요청은 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은 아다케후네 20척을 건조하는 등 각 수군을 크게 늘리고 다수의 육군을 수군으로 전환합니다. 하치스카군은 아예 수군이 되었고, 9일의 해전에서 앞장선 것은 시마즈, 쵸소카베 등 일본 육군이었습니다. 거기다 군감인 오타 가즈요시까지 해전에 참전하죠. 거기다 여기서 효과적인 야습을 시도하게 됩니다. 실제 김완의 유군 중 5척은 거제도로, 4척은 진해만으로 갔습니다. 단지 원균만 도망간 게 아니라 야습 자체의 효과로 수군들이 조선 육군들처럼 -_-; 겁 먹고 도망간 것은 분명히 있죠. 적의 병력도 임지년과는 크게 차이나는 수백척에서 천 척이 넘는 상황이었습니다. +) 유군에 대한 설명이 빠졌네요. 김완은 조방장으로 삼도 수군에서 차출해서 유군 혹은 복병함대를 형성했습니다. 문제는 그렇게 겁 먹고 도망간 장수들 중에 원균이 끼어 있었다는 거겠죠. 그리고 김완이 휘하 유군이 흩어져서 도망간 게 아니라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수사를 따라서 후퇴"했다고 하는 것을 봐서 명령체계는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명령은 수사 윗 단계, 즉 통제사 레벨에서 내려왔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명령 체계가 유지된 게 더 악운이었던 것이죠. 기습한 일본군은 김식의 말과는 달리 소규모였고, 견내량이 막혀서 춘원포에 상륙할 정도의 대군은 절대 아니었습니다. 경계의 중요성이 정말 강조된 해전이지만 더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죠. 원균이 "이순신의 부하들에게 둘러쌓여" 지휘권을 제대로 못 휘둘렀다고 하지만 이건 선수 탓 하는 모 감독 같은 방식일 뿐 이 전투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칠천량 해전이라는 말이 공식 명칭이지만, 칠천량에서는 전투가 거의 벌어지지 않았습니다. 기껏해야 김완과 적 선봉 2척의 전투 뿐이었죠. 나머지는 춘원포로 가서 도망갔거나 이억기처럼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이런 면에서 명칭을 춘원포 해전이라고 하거나 아예 임진년에서 하던대로 원균의 2차 출동으로 봐야 될 것입니다. 7월 4일 출동 후 10일 넘는 기간 동안의 일들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애초에 이것을 "해전"이라고 불러야 될지도 의문입니다. 조선 수군은 그냥 도망가기만 했으니까요. 일본조차도 그 엄청난 의미에 비해 해전 자체의 전과를 크게 보지 않을 정도면 말 다 했죠. 신나게 치고 들어온 임진년에 비해 정유년에는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상륙한 후 6개월이 지난 상황에서도 일본은 본토에서 병력이 계속 바다를 건너 와도 딱히 진격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조선 수군이 전멸한 후 적은 단 두 달만에 경상우도와 전라도를 휩쓸고 충청도로 진입, 한양을 노리게 됩니다. 조선 수군이 별 탈이 없었다면 정유재란은 시도도 못 해 보고 일본의 전면 철수로 끝나거나 일어났더라도 경상도, 전라도 일부 지역에 국한되었겠죠. 하지만 조선 수군은 이렇게 전멸했고, 정유재란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사실상 이 전투 아닌 전투가 정유재란을 시작했다고 봐야 되겠습니다. ... 담배를 몇 대 핀 건지... 만약 하늘이 있었다면 조선을 멸망시키려고 일부러 한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두 달 후의 일을 생각하면 딱히 그런 것 같지도 않군요. 사실 원균 같은 인물한테 이 정도로 자세한 조사가 이루어질 필요가 없습니다. -_-; 그런데 원균옹호론의 등장으로 원균에 대한 자세한 연구가 이루어지면서 이렇게 바닥까지 까도 부족할 결과가 나온 거죠. 대체 이런 인물을 왜 옹호하려고 하는 건지.... 춘원포의 정확한 위치가 어디냐는 논란거리 중 하나지만 여기에선 크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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