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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식민지화 과정 - 2
게시물ID : history_1702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뭐이어드래?
추천 : 21
조회수 : 1564회
댓글수 : 10개
등록시간 : 2014/07/11 22:44:30

1825년, 명명제(明命帝)의 명으로 카톨릭 금지령이 내려지긴 했지만 믿는다고 잡아다 죽인다든지 극형으로 다스리는 수준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국내에 머무르고 있던 카톨릭 선교사들도 포교행위는 금하되, 외국서적을 번역하는 일에만 종사할 것을 요구하는 등, 탄압의 수준이 그리 가혹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1830년대에 들어서면서 '레 반 코이의 난' 이라는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카톨릭에 대한 탄압과 박해가 이루어집니다. 

 

레 반 코이의 난은 1833년, 베트남 남부에서 당시 한창 이루어지던 명명제의 과도한 중앙집권화 정책, 특히 명명제가 남부에 대한 직접적인 통치를 선언한 것에 대한 반발, (자꾸 다른 얘기로 새는 것 같아 좀 그렇지만 이왕 쓴김에 몇글자 적어보자면 당시 베트남은 아무래도 나라가 길게 생겨먹었던지라 북부, 중부, 남부로 나누어 통치했었고 중부는 황제가 직접 통치, 북부와 남부는 공신들에게 분봉하여 위임하는 식의 형태였습니다)  특히 레 반 코이(黎文? : 코이에 해당되는 한자가 나와있지 않아 ?로 썼습니다) 라는 사람의 주도 하에 일어난 사건을 말합니다. 특히 레 반 코이가 자신의 양부이자 완 왕조의 개국공신이었던 환관 여문열(黎文悅 : 베트남어로는 레 반 주엣)이 명명제에게 핍박당해 죽은 일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것이 도화선이 되었던 것인데, 여기서 레 반 코이는 선제 가륭제의 차남이자 명명제의 형인 완복경(阮福景)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할 것을 내세우며 명명제를 부정, 완 왕조를 전복시키려 들었습니다.

 

Prince_Canh_MEP.jpg
 
완복경(阮福景).
 
프랑스에서의 유학시절 때 그림.

 

 

난은 3년씩이나 이어졌고 한때 남부 최대의 도시인 사이공 (오늘의 호치민시)을 두들길 정도로 막강했는데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베트남 내부의 혼란을 틈타 한몫 챙기려는 태국이 가세하여 반란군을 지원하니 이는 완 왕조에게 상당한 위협이었습니다. 결국은 어찌어찌 난은 진압했습니다만 난 직후 뒷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난에 적잖은 카톨릭 신도들이 가담했고 또 지원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명명제는 격노하여 1836년, 칙령을 내려 국내의 외국 선교사들을 살해해도 죄를 묻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숨겨주는 자 또한 극형으로 다스리겠다는 엄포를 놓습니다.

 

 

Jean-Charles_Cornay.jpg
 
좀 혐짤이긴 한데;;; 문제시 이 부분은 자삭하겠습니다
 
1837년 거행된 장 샤를 코르네이라는 신부의 처형장면을 그린 그림입니다.
 
 
Martyrdom_of_Joseph_Marchand.jpg
 
1835년에 거행된 조셉 머찬드라는 신부의 사형장면

 

 

결국 이 칙령으로 6명의 선교사들이 극형에 처해졌고 수많은 베트남인 신도들이 처형당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의 카톨릭 신도들은 꾸준히 증가했고 19세기 중반에 이르러서는 무려 45만명에 달하게 됩니다. 베트남에서 자국 신부들이 처형당한 것에 대해 프랑스도 분명 이 사실을 알았을테고 바로 보복에 나섰을 것 같아보이지만 프랑스가 본격적으로 베트남을 족치러 오는 시기는 명명제, 소치제(紹治帝)에 이은 4대 황제 사덕제(嗣德帝) 때입니다.

 

 Vua_Tu_Duc.jpg

 
익종(翼宗) 사덕제(嗣德帝) 완복시(阮福時)
 
외국인 선교사 25명, 베트남 성직자 수백명, 신도 2만을 죽이는 광역 도발을 시전, 명실공히 서구열강(특히 프랑스)들의 어그로를 끌게 만든 장본인. 여담으로 사덕제는 '덕(德)' 이란 글자를 원체 좋아했는지 자신의 능을 조성할때 세운 전각들마다 꼭 '덕' 자가 들어가게 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사덕제 황릉에 가보면 전각들의 각 편액마다 중간에 꼭 '덕' 자가 들어가 있다는.. 그래서 자기 시호도 사덕제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출장오기라도 했나 싶을정도로 외국에 대해서는 상당히 보수적이다 못해 공격적인 태도를 보이며 유교덕후로서 베트남을 중국 모방하기에 여념이 없던 명명제도 1841년에 사망하고 그 뒤를 이어 아들 헌조(憲祖) 소치제(紹治帝)가 즉위합니다. 소치제의 치세는 불과 6년 남짓이었지만 선대보다는 비교적 카톨릭을 비롯한 외국세력에 대한 완화된 입장을 보이며 죽이려고 잡아둔 선교사들도 석방하는 등 악화일로로 치닫고 있는 프랑스와의 관계도 조금이나마 개선할 겸 불필요한 충돌은 피하려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그 정도로 프랑스가 침략야욕을 버렸겠냐만..
 
 
그러나 이도 잠시 1847년, 포교의 자유와 박해받는 선교사들을 석방할 것을 요구하며 나타난 프랑스 함대가 타낭(沱灢 : 베트남어로는 다낭)항에 정박 중이던 베트남 함대에 포격, 이에 대응하기 위해 나온 베트남 함대가 전투에 패해 격파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격분한 소치제는 돌연 태도를 바꾸어 선대 명명제처럼 국내의 외국인들을 싸그리 잡아들여 처형시켜버립니다. 이때를 계기로 다시 외국인 선교사들과 카톨릭 교도들에 대한 탄압이 이루어져 이후 사덕제의 대에까지 지속되며 위에서 말씀드렸다시피 도합 외국인 선교사 25명, 성직자 수백명, 신도 수만을 처형하는 대규모 탄압이 벌어졌던 것이고요.
 
 
그리고 프랑스가 이를 구실삼는건 안봐도 훤한 일이었겠죠. 그동안 참은게 용하다 싶을 정도로 드디어 큰 건덕지 하나 건졌다 싶었을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는 베트남에서의 자국민들 보호와 학대에 대한 보복을 명분으로 1858년 중국에 정박 중이던 함대 15척과 약 1500명 가량의 병력을 베트남으로 보냅니다. 이것이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화의 첫걸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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