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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아, 일하면서 너와 함께 지내려니, 이것도 마냥 쉽지가 않구나.
게시물ID : animal_17063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ynousia
추천 : 13
조회수 : 650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6/11/08 22:4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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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야옹이를 혼자 골방에 놓아둔 채 돈 벌러 나간 지 어느덧 두 달이 훌쩍 넘어서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 녀석을 하루 종일 홀로 내버려 둬야만 한다는 사실이 저를 무척이나 힘들고 서글프게 하였습니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저녁에야 돌아오는 집사 때문에 홀로 외로워할 그 녀석을 생각하면, 그저 미안하고 또 미안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적으로 고양이라는 종이 보여주는 시크하고 도도한 특성을 그 녀석도 지녔더라면, 차라리 고마워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속이야 어떻든 간에, 겉으로 보여주는 그 독립적이고도 세련된 자기만의 세계가 녀석에게도 가지런히 구축되어 있었더라면, 최소한 표면적으로만큼은, 집사가 느끼는 알량한 양심의 가책이 좀 덜하게 되진 않았을까, 부질없이 가정해보는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 책에서 언급해 놓기를, 고양이는 혼자서도 잘 놀고 잘 자고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저 비루한 위안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싫었지만, 또 달리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야옹이는 일반적으로 통칭되는 고양이 종은 정녕 아니었습니다.
정말로 개냥이 과에 속하는 일반적인 고양이의 돌연변이종임에 틀림없었습니다.
그 녀석과 함께 산 지도 수개월에 이르는 지금에 와서는 그 유전자가 거의 확실히 개냥이쪽으로 발현되고 있음을 매일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외모만 일반적인 고양이 종이지, 교배시켜서 몇 세대만 번식시켜도 이 녀석은 분명 종을 분기시키는 돌연변이 조상의 지위에까지 이르게 되리라 감히 장담하고 싶은 심정에 다다라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초롬한 새벽같이 떠나서 미안하고, 핏빛 석양놀같이 돌아와서 또 한 번 미안하였습니다.
떠날 땐 떠난다고 난리고, 돌아와서는 돌아왔다고 난리고, 참으로 그 난리가 두 번이나 미안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처음 한 달 동안 했던 목공소 일은 육체적으로 상당히 수고스럽고 곤욕스러웠던 탓에 집에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 누워 자기 바빴습니다.
씻고, 밥 먹고, 잠시 그 녀석과 놀아주고, 길냥이들 밥 주고 하면, 이미 몸과 마음은 혼곤하게 지쳐 그저 꿈나라로 도망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한 달을 지냈습니다.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시나브로 시간이 흘러갈수록 야옹이를 대하는 집사의 마음도 조금씩 무뎌지고, 집사를 대하는 야옹이의 체념도 조금씩 늘어가는 듯했습니다.
비록 반복되는 일상의 시간이 어김없이 헤어지는 우리들의 유대를 다시금 만나서 잇게 하곤 하였습니다만, 매번 끊어졌다 묶이는 과정에서 생긴 그 생채기의 흔적만큼은 혼탁한 부유물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습니다.
하루의 대부분을 따로 보내다가 간신히 이어낸 상봉의 시간은 물리적으로 짧았을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짧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만큼 우리는 그 짧은 시간의 만남 속에서도 각자의 공간에서 부유하던 잔여물을 서로의 앙금으로 받아 지니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여느 날과는 달리, 이 녀석과 놀아주는 데 필요 이상으로 시간이 길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보통은 이삼십분 정도 낚싯대로 놀아주면 그 녀석도 대충은 만족하고 누워버리거나 딴짓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날만큼은 끈덕지게도 계속해서 낚싯대를 물고 놓아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삼십분이 후닥닥 지나가버리고, 좀 쉬려니까, 다시 등이며 다리며 맹렬히 물어뜯으며 자기 의사를 표출해댑니다.
더 놀아달라는 뜻입니다.
안 그래도 일터에서 곤죽이 된 채 돌아와 얼른 쉬고, 또 눕고 싶은데, 이 녀석은 그런 집사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발톱을 벼리며 달려드는 형세가 쉽게 무마하기는 글러 보였습니다.
하릴없이 다시 낚싯대를 들고 그 녀석과 놀아 줄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또 영혼 없는 낚싯대 놀이를 몇 십 분여간 하다가 이제는 더 이상 곤란하다 싶었습니다.
시간도 시간이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쳐서 그 가벼운 낚싯대 흔드는 것도 힘에 버거운 노동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이쯤에서 단호하게 끝을 내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녀석은 이쯤 해서 더욱더 생의 기운이 뻗쳐오르는 것 같았습니다.
거의 한 시간이 다 되도록 뛰어다닌 탓에 몸 여기저기에서 흥건하게 피어오르는 열기와 쌕쌕거리며 지펴 오르는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이 녀석, 더 놀아달라고 말 그대로 지랄발광을 해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그 심정 그대로, 그것은 정말이지 지랄발광이었습니다.
여유와 시간이 있고, 또 그만큼의 기운이 있는 평소 때 같으면, 그 지랄발광이 참으로 역동적이고 힘차 보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녀석의 끓어오르는 기운을 감당할 수 없게 된 지금 상태에선, 그것은 그저 비정상이자, 지랄발광으로 낙인찍혀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집사가 살 수 있었습니다.
불현듯 옛날 옛적의 어떤 도둑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인질을 산 채로 잡아와서는 자신의 침대에 눕혀놓고, 그 길이가 맞지 않으면 침대를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질을 잘라내서 맞춰냈다는, 무척이나 징그러운 이야기였습니다.
하지만, 집사는 이 징그러운 이야기가 실로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어느덧 집사가 징그러운 괴물로 변해가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몰랐습니다.
내심 초조하고 불쾌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런 느낌도 하루살이마냥 단 한순간의 미소한 열정만 불태우고는 이내 사라져버렸습니다.
다시 좀 쉬려니까 이 녀석이 재차 광포하게 들이대고 있었던 것입니다.
슬슬 짜증이 밀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야 이 자식아(야옹이는 암컷입니다만, 종종 집사의 기분 상태에 따라 이렇게 불리기도 합니다.), 나 피곤해 죽겠다고!
하지만 야옹이 귀에 경 읽기입니다.
그동안의 짧지 않은 기간 동안 함께 지내며 얻어먹은 눈칫밥으로 요새는 웬만하면 집사의 감정 변화와 기분 상태를 곧잘 파악해대던 녀석인지라, 이건 분명히 고의성 다분한 반응임에 틀림없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또다시 영혼 나간 낚싯대 놀이가 진행되었습니다.
이젠 지치겠거니, 조금만 더 참으면 이젠 지치겠거니, 했던 게 벌써 한 시간은 훌쩍 넘어가 있었습니다.
신기록 경신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집사의 감정 한계치 또한 연이어 신기록 경신중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내일 또 암담하게 드리울 작업장에서의 노동을 예감하고, 오늘도 하루 종일 고단했던 노동을 돌이켜보며, 울컥 치솟는 울분과 짜증이 이 녀석에게 스리슬쩍 전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설상가상으로, 어제나 저제나, 떠날 때나, 돌아올 때나 그렇게 난리를 피우고 개냥이짓을 하던 그 녀석에 대한 미안함과 괴로움, 서글픔 등이 혼죽이 되어 떠돌아다니다가, 마침내는 이 울분과 짜증의 감정 덩어리에 스리슬쩍 엉겨붙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젠, 정말 간만에 이 녀석이 극도로 보기 싫어졌습니다.
다 때려치우고, 내던져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런 극단의 마음 상태가 다시 몇 분여간 살벌한 얼음장 위를 기어가듯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야옹이는 그런 집사를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오로지 자신의 마지막 생명줄을 불태우듯 그렇게 자신의 앞에 놓인 낚싯줄에만 모든 기운을 다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됐든 결과론적으로는, 그런 집사를 모른 체 신경 쓰지 않았다는 말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닐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도 지금은 후회되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낚싯대로 놀아주는 척하면서 등이며 머리 따위를 이리저리 때려버린 것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 녀석에게 체벌? 을 가하면서, 한편으로는 속이 후련해졌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구타를 감지한 녀석이 꽁무니를 빼고 도망쳐 오슬오슬 저 구석에서 떨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는, 저 또한 곧이어 만신창이가 된 채 후회와 죄책감으로 치떨어야만 했습니다.
체벌이 정당하면 행사될 수 있는가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저는 야옹이에게 정당하지도 않은 구타를 행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저, 자숙해야만 하였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때 그 구타는 전적으로 제 잘못이었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또 달리 참작할 만한 요인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도 높은 노동과 여러모로 빠듯한 시간, 그에 따른 야옹이와의 친밀감 및 대화 결핍 등이 주요한 요인으로 고려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하릴없이 집사는, 한국에서 혼자 일하는 엄마의 지위로서 산다는 것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어쭙잖은 고민을 조금은 공유해보는 계기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생활비를 벌려고 밖으로 나가면 집 안에서의 생활은 신경 쓰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니, 이 양자를 조화시키며 살아내기란 참으로 어렵겠구나, 실제로 체험해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한국에서의 돈벌이, 혹은 회사생활이라는 것이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보니, 집 안팎의 두 가지 일을 동시에, 그러면서도 조화롭게 처리해내는 슈퍼맘들의 노고와 비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럼에도 극단의 양자 가운데에서 떨리는 줄, 그 위태롭고도 불안한 삶을 계속해나갈 수 있는 버팀목은 가족이라는 사실이 참으로 뭉클하고 시큰하게 다가왔습니다.
가족 없는 나라, 가족 없는 사상이며 무슨 무슨 주의, 가족 없는 신 따위가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괜스레 궁금해지기도 하였습니다.
어찌됐든, 야옹이 덕분에 이래저래 많이 고민하고 또 많이 깨닫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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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야, 이번 한번만 그 불경한 짓을 용서해주겠다냥!



<우리 집에 살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는 심술궂고 다루기 힘들다.
    다른 한 마리는 귀엽고 쾌활하며 또 다른 한 마리는 투쟁적이고 권위적이다.
    그런데 우리 집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있다.  - 데이브 에드워드 - >



출처 http://blog.naver.com/ha_eun_love/2208553956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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