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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서 열도 방문 기록의 秦왕국과 신찬성씨록의 秦 하다 씨
게시물ID : history_170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풍림화산2
추천 : 6/25
조회수 : 1648회
댓글수 : 6개
등록시간 : 2014/07/13 20:37:15
 
↓  이전의 관련 글들을 읽고 이 글을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16650&s_no=16650&kind=search&search_table_name=history&page=1&keyfield=name&keyword=%ED%92%8D%EB%A6%BC%ED%99%94%EC%82%B02
 
 
2개의 가설 송서 왜 5왕의 진한은 한반도 남부의 국가를 지칭한 것이라는 김태식씨의 주장을 이야기 하였고 ---
 가설  A
그것에 대해서 대립되는 가설 송서 왜 5왕의 육국 제군사는 반도의 국가가 아니라 열도안의 반도계열 국가들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주장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 가설  B
 
김태식씨가 어째서 근거없이 가설 B를 부정하였는지 그 근거는 미스테리입니다만 그것은 그 냥반 개인적인 사정이므로 그냥 미스테리로 남겨두고 우리는 공부를 하도록 합니다 (이유를 알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
 
게시판에서 강단 사학의 자료로 공부를 해야 하네.. 하고 강하게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보아왔듯이 별 영양가 없고.. 그냥 역사에 정말 관심이 있다면 공부는 스스로 하는 것 아닐까 합니다. 최근에 불쌍한 일제시대 위안부 할머니들을 일본군의 동반자적 관계?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한 사람도 어쨋든 강단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 사람이 일문학 권위자니까 아 네.. 하면서 고개 숙여야 하는걸까요.. 아닐겁니다. 공부는 어차피 혼자 하는 겁니다.
 
위의 제 글을 요약하면 송서 왜 5왕이 가라 신라 임나 진한 모한 왜 육국 제군사를 요청했을 때에
한반도에서 4세기 정도에 소멸한 것으로 알려진 진한이 7세기 초 중국 정사에 실제 열도를 방문한 중국 사신에
의해서 진왕국이라는 이름으로 열도에 있었던 것을 추측했는데요. 이것에 대한 검증방법으로..
 
풍림화산은 한번 정도 신찬성씨록을 찾아보자고 이야기 드렸는데요 .. 혹시 찾아보신 분들 있다면 감사합니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신찬성씨록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은 아래와 같습니다.
 
 일본 조정은 이후 10년 만에 성씨록을 새로 편찬해 질서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815년에 작성된『신찬성씨록』은 일본 지배층의 성씨 1,182개를 담고 있는데 황별 335개ㆍ신별 404개ㆍ제번 326개ㆍ미정잡성 117개 성씨가 실려 있다. 황별은 천황가의 후손, 신별은 진무천황 이전의 신들의 후손, 제번은 한반도와 중국 출신의 도래계, 그리고 미정잡성은 뿌리를 알 수 없는 기타 성씨다. 그런데『신찬성씨록』의 서문에는 3별은 “원래 삼체(三體)로서,” “3별의 차이는 앞뒤의 순서가 다를 뿐... 본래의 뿌리는 동일한 3체”3라고 기록돼있다. 즉 미정잡성을 제외한 황별ㆍ신별ㆍ제번은 모두 한 뿌리라는 것이다.
3별의 대부분이 본래 한반도 출신이었지만 정치적인 상황에 따라 성씨를 유리하게 바꿨다. 6세기 중엽 가야가 신라에 멸망하자 많은 가야계 도래인이 백제 계통으로 갈아탔다. 7세기 중엽 이후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을 때는 가야ㆍ백제ㆍ고구려계 도래인이 중국 계통으로 갈아타거나 일본계 성씨를 차용했다.『신찬성씨록』에 중국계 도래인이라고 돼있는 177개 성씨 가운데 당 출신 13개 성씨를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은 본래 한반도계 성씨였다. 대표적으로 하타씨가 진나라 출신으로 돼있지만,『일본서기』ㆍ『고유습어』(807년 편찬)ㆍ『신찬성씨록』에는 하타씨의 조상인 궁월군이 백제계로 나온다. 백제계였지만 후에 진나라계로 바꾼 것이다. 김은택은『신찬성씨록』에 수록된 1,182개 성씨 가운데 1,012개4가 한반도계라고 한다. 이는 전체의 86%를 차지하는데, 현재 긴키지방에 살고 있는 일본인의 90%가 북방계라는 유전학적 통계와 맞아 떨어진다.

일단 신찬성씨록에 대한 일반적인 설명을 저런 것입니다. 풍림화산이 신찬성씨록에 대해서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일본서기 고사기와 같은 책을 이야기 할 때에 흔히 이야기 하는 부분... 어째서 이 책은 정사 正史 인에도 불구하고 열전이 따로 지어져 있지 않은가..
일본서기 고사기는 역사를 기록할 목적이 아니라 열도의 실제 역사를 잘 알고 있는 집단이 실제 역사를 왜곡할 목적으로 만든 책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왜곡해서 열도 전체에 뿌리는 것은 가능했으나 각 지역별로 전승으로 내려오는 일본 민중의 자신들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왜곡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료상의 진실성 여부는 일본서기 고사기 보다는 높지만 여전히 왜곡의 부분을 신경써야 하는 사료인 것입니다. 위에서 송서 왜 5왕이 지칭했던 진한이 반도의 진한이 아니라 열도의 秦王國이라고 한다면
그 흔적이 신찬성씨록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한국에는 김씨 이씨 박씨가 흔하듯 일본에는 하타 秦가 흔한 성씨인데 그 유래를
아래와 같이 신찬성씨록에 남겨두고 있습니다.
太秦公 宿禰 秦始皇帝三世孫孝武王之後也 男功滿王,足仲彥天皇【謚仲哀】八年來朝男融通王,【一云弓月王】譽田天皇【謚應神】十四年來朝,率廿七縣百姓歸化,獻金銀玉帛等物大鷦鷯天皇【謚仁德】御世,以百廿七縣秦氏,分置諸郡,即使養蠶織絹貢之天皇詔曰:「秦王所獻絲綿絹帛,朕服用柔軟,溫煖如肌膚」仍賜姓波多次登呂志公、秦酒公,大泊瀨幼武天皇【謚雄略】御世,絲綿絹帛委積如岳,天皇嘉之,賜號曰禹都萬佐>
 
 산성국(山城國)의 제번(諸蕃) 중 한(漢)출신 진(秦)의 씨(氏)는 기촌(忌寸)의 성(姓)을 가졌다. 태직공숙녜(太秦公宿禰)와 같은 조상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의 후예다. 공지왕(功智王), 궁월왕(弓月王)은 예전천황(譽田天皇)【시(謚) 응신(應神)】14년에 내조(來朝)해 상표(上表)하여 고쳐 귀국(歸國)해서 127현(縣)의 백성(伯姓)을 귀화(歸化)시키며 아울러 금은옥백(金銀玉帛)과 종종보물(種種寶物) 등을 바쳐 천황(天皇)이 이를 기뻐하여 대화조진(大和朝津) 사이 액상지(腋上地)를 사(賜)하여 거하게 했다. 남(男) 진덕왕(真德王)과 차(次) 보동왕(普洞王)【고기(古記)에 포동군(浦東君)】은 대초료천황(大鷦鷯天皇)【시(謚) 인덕(仁德)】의 어세(御世)에,파타(波陀:하타)를 사성(賜姓)했는데 지금 진(秦)의 훈(訓-뜻)이다. 차(次) 운사왕(雲師王), 차(次) 무량왕(武良王), 보동왕(普洞王)의 남(男) 진주공(秦酒公)을 사성했다. 대박뢰치무천황(大泊瀨稚武天皇)【시(謚) 웅략(雄略)】의 어세(御世)에,주(奏)하여 칭(稱)하기를 "보동왕(普洞王) 때,진(秦)의 백성이 대개 협박과 침략을 받았고 지금 보니 열에 하나도 보존하지 못하니 청(請)컨데 칙사(敕使)를 보내 검괄초집(撿括招集)하십시오"라 해서 천황(天皇)이 사신(使臣) 소자부뢰(小子部雷)와 대우아다준인(大隅阿多隼人) 등을 보내 찾아모으게 하여 진씨(秦氏) 92 부(部) 18,670명을 술을 사(賜)하여 진(秦) 백성을 양잠직견(養蠶織絹)하게하니 성(盛)히 궁궐에 이르러 진공(進貢)하니 산악(山岳)처럼 조정에 쌓여 천황(天皇)이 이를 기뻐하여 특히 총명(寵命)을 내려 우도만좌(禹都萬佐:우소마사)로 사호하였다. 이 채움의 이익(利益)의 뜻으로 여러 진씨(秦氏)를 팔장대장(八丈大藏)을 궁궐 옆에 차리도록 하는 역(役)을 시켜 공물(貢物)을 납부하게 하여 그런 고로 그 땅을 장곡(長谷) 조창궁(朝倉宮)으로 이름지었다. 이 때 처음 대장관원(大藏官員)을 두어,주(酒)로 장관(長官) 진씨(秦氏) 등의 일조자손(一祖子孫)으로 삼고 혹은 거주(居住)하거나 혹은 행사(行事)를 의지했으며 따로 천평(天平) 20년 경기(京畿)에 있는자로 다 이미길성(伊美吉姓)을 개사(改賜)하였다.  
http://sky_drum.blog.me/80152875897  <-- 에서 인용
신찬성씨록에는 하타 秦 씨의 시조인 궁월군이 진시황제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서기에서는 백제로부터 귀화한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応神天皇十四年(癸卯二八三)◎是歲。弓月君自百濟來歸。因以奏之曰。臣領己國之人夫百廿縣而歸化。然因新羅人之拒。皆留加羅國爰遣葛城襲津彦。而召弓月之人夫於加羅。然經三年而襲津彦不來焉。
이때에 ( 응신 14년 ) 궁월군이 백제로부터 내귀하였다. 그리고 주하기를 “신이 국인 120현민을 거느리고 귀화하려고 하는데 신라가 막아서 모두 가라국에 머물고 있습니다” 했다. 이에 갈성습진언을 보내 가라에 있는 궁월의 인민을 불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록 습진언은 돌아오지 않았다   - 일본서기 -
 
일본의 사료들은 그 위작 체계를 이해하여야 그 의미를 알 수 있지만 수서 배세청의 진왕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하타 秦씨의 경우 도래인 출신이라는 것을 추론 하기에는 충분한 자료들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하타 씨에게  양잠직견(養蠶織絹) 하게 하여 헌상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봅니다. 이것은
실제 역사를 기록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풍림화산이 이전 글에서 이야기 했듯이 비단을 만드는 행위는
고대 반도인과 고대 열도인 공통으로 반도인 특히 신라 지역의 사람들의 열도 이주에 관련한 역사적 사실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상징물 이었다고 하는 것에 주목해 봅니다
 
http://www.todayhumor.co.kr/board/view.php?table=history&no=9369&s_no=9369&kind=search&search_table_name=history&page=3&keyfield=name&keyword=%ED%92%8D%EB%A6%BC%ED%99%94%EC%82%B02
 
아래의 삼국유사 연오랑 세오녀 기록과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恠 王遣使求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今何歸乎 雖然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寶 名其庫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이 때에 ( 延烏郎 細烏女가 열도로 갔을 때에 ) 태양의 빛이 없어졌다. 그래서 日者가 말하기를 태양과 달의 정기가 우리 나라에 있다가 일본으로 건너갔으니 이런 변괴가 생기는 것입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어 연오랑 세오녀에게 돌아오라 말했으나 延烏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로 온 것은 하늘이 시킨 것 어찌 돌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 아내가 짠 가는 명주를 줄 것이니 이것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면 빛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고 그 이야기대로 하늘에 제사 지내니 하늘의 빛이 다시 빛났다
 
일본서기 아라사등 설화..
 
일본서기 垂仁天皇 2년 10월 기록 입니다.
 
仕活目天皇逮于三年 天皇問都怒我阿羅斯等曰 欲歸汝國耶 對諮 甚望也 天皇詔阿羅斯等曰 汝不迷道必速詣之 遇先皇而仕歟 是以改汝本國名 追負御間城天皇御名 便爲汝國名 仍以赤織絹給阿羅斯等 返于本土 故號其國謂彌摩那國 其是之縁也 於是 阿羅斯等以所給赤絹 藏于己國郡府 新羅人聞之 起兵至之 皆奪其赤絹 是二國相怨之始也 
 
http://www004.upp.so-net.ne.jp/dassai1/shoki/frame/06/fr.htm
 
일본 천황이 아라사등에게 그대의 나라로 돌아가고 싶은가 라고 묻자 아라사등이 돌아가고 싶다라고 이야기 하고 아라사등의 본국 명을 御間城 천황의 이름을 따서 나라 이름으로 한다.. 그리고 붉은 천을 아라사등에게 주어 원래 살던 곳으로 보내면서 미마나를 나라 이름으로 했다. ..  ( 중략 ) 신라인이 이것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붉은 천을 빼앗으니 이로부터 2개의 나라가 서로 원수가 되었다.
 
붉은 천, 가는 명주  이것들은 한반도 경상도쪽 사람들의 왕권의 흐름과 관련있는 비유입니다. 풍림화산은 신찬성씨록
궁월군의 하타씨 설화에 나오는 양잠의 기록이 단순히 양잠의 기록이 아니라 반도의 진한 유민들이 열도에서 왜 왕권에 복속하게 된 이야기를 은유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봅니다.
 
고대 경상도 지역의 사람들이 양잠을 해서 비단을 만드는 행위가 고대의 왕권에 대한 은유였다는 이야기가 좀 긴가민가 한 분들은 아래의 회소곡 이야기를 생각해보시면 이해가 가실까요
 
유리왕 9년(AD 32)에 왕이 육부(六部)를 둘로 나누어 왕녀(王女) 두 사람으로 하여금 부내(部內)의 여자를 거느리도록 하여 길쌈 시합을 시켰다. 방법은 7월 16일부터 8월 보름까지 날마다 육부의 마당에 모여 길쌈을 시작하고 오후 10시경에 파하게 하여 한 달 동안의 성적으로 승부를 가리는 것이었다. 시합에서 진 편은 이긴 편에게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대접하며 노래와 춤으로 즐겼다.
이를 ‘가배(嘉俳)’라 하였는데, 이것이 곧 오늘날의 한가위(秋夕)이다. 이 때 진 편의 여자가 일어나 춤추며 “회소(會蘇), 회소”라는 탄식하는 음조(音調)를 내었는데, 그 가락이 슬프고 아름다워 후세의 사람들이 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이것이 「회소곡」이다. 한편 “회소, 회소”는 오늘날 “아서라, 말아라”에 해당하는 말로서, ‘마소, 마소’의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회소곡 [會蘇曲] (외국인을 위한 한국고전문학사, 2010.1.29, 도서출판 하우)
실제 고대에 같은 문화를 공유했던 신라인..연오랑 세오녀로 대표된 세력들 그리고 열도의 진왕국.. 양잠을 통해서 비단을 만드는 행위가
왕권에 대한 비유일수도 있고 실제 생활에서도 그랬을 것임을 시사하는 것을 저 회소곡 이야기에서 알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쓰고나니 복잡하고 재미없는 이야기가 되었네요. 602년 중국 정사에 기록된 진왕국의 의미를 알고 싶다면 일본 사료들을 찾아봐야겠지요
그래서 그와 관련한 秦 씨에 대한 기록들을 일본 사료들을 통해서 분석하면 저렇게 어렵습니다. 일본 사료들 자체가 많은 속임수를 사용하고 있고
실제 사실들을 뒤틀고 비튼 것들이니까요 하지만, 고대인들이 남긴 은유나 비유 설화는 많은 정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공통된 상징물을 가지고 여러 기록에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은 역시 생각해볼만한 부분이 아닌가 합니다.
이전 토론에서 어떤 분이 신화를 가지고 역사를 분석한다는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신 분이 있으셨습니다만..
한일 고대사를 분석함에 있어서 일본쪽 사료들을 분석할 때에 이런 것을 이해하지 않으면 자료들의 진짜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런 비유를 해 볼까요..    현대 한국에서 " 주민 A 가 닭을 뽑은 손가락이 부끄러워 손가락을 잘랐다 " 라고 하는 기록이 설화로 남았고 이것을 1000년 후에 역사가들이 분석을 할 때에.. 
 
동물은 당시에 대통령 후보가 되지 않았다. 사실이 아니다..라고 만족하는 역사가와..
통치자를 닭으로 불러야만 했던 당시 민중들의 정서와 .. 사회상을 같이 생각하는 역사가..
둘 중에 어느 쪽이 옳을까요.. 현대 한국 사회에서 닭이 많은 정보를 포함한 함축적 단어이듯이..
일본서기 고사기에 있는 일본 사가들이 뒤틀어 놓은 가짜 역사의 재료로 사용된 은유적 표현들은 사실..
 
그 의미들을 파악하고 나서.. 고대의 반도와 열도의 상황은 이렇했다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후지와라 사다모토가 충구발에서 한 이야기.. 다시한번 음미해봅니다..
 
'일본기(서기)를 읽으면 처음 이 나라가 마한, 진한이란 두개의 한에 의해 열렸고 , 아울러 변한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읽는다면 이해하기 어렵다.
고래, 韓으로부터 日이 비롯되었다는 것이 숨겨져 있음을 알지 못하고,
일이란 나라만으로 무엇이나 다 될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한어를 왜어로 보고서 가지가지 설을 내세운 나머지 마참내는 본 뜻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결국, 일본 역사는 마한, 진한으로부터 비롯되었고 한편으론 변한과도 영향받은 관계를 알지 못하고 읽었다면 진정 일본기(서기)를 읽었다고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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