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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 - 존재라는 폭력에 대한 고발서
게시물ID : phil_1708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MiŜatasVin
추천 : 0
조회수 : 127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9/12/17 21:17:44
책을 접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생각 중 하나는, 이 책과 동시대에 살게 되었다는 점이 큰 행운이라는 점이다. 반출생주의를 논증한 전문적인 책으로는 사실상 인류사 최초이니만큼, 좀 더 이른 시대에 살았다면 절대 접할 수 없었을 내용의 책이다. 개인적으로 예전부터 이 생각의 지지자였던 만큼 이 책으로 새로운 무언가를 배우게 되어서 기쁘다는 것보다는, 이러한 주장이 당당하게 제기되는 책을 볼 수 있다는 경험 자체가 커다란 기쁨이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다. 이렇게 정직하게 세상의 고통을 직시하고, 그것을 재생산하는 것을 당당히 고발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데서 위안을 느낀다. 달리 표현하면 이 책 자체만으로도 이 세계에 존재하게 된 것에 대한 작은 위안이 된다고 할 수 있으리라.

개인적으로 이미 그 용어를 알기 오래전부터 반출생주의를 지지해왔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것은 결코 인간이라는 존재를 싫어하는 염인주의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한 불행을 막는 확실하고 유일한 방법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게 하는 것뿐이라는 '인류애주의'에 기인한 것이었다. 누구든 한번 태어나는 이상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어느 정도의 육체와 마음의 고통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기에 처음부터 태어나지 않는 것이 가장 낫다는 생각이 항상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 책은 그러한 생각을 반출생주의라는 엄밀한 철학적 사상으로 승화시켜 놓았다. 이 사상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생명 윤리 전반을 다루고 있기에 내용이 상당히 복잡하고 어려운 부분도 많지만, 그 핵심은 인간에게 주어질 잠재적 고통에 반대하는 소박한 연민에 있다. 책 곳곳에서 세상에 만연한 고통에 대한 저자의 고뇌가 느껴진다. 

물론 그는 삶이 오로지 고통만으로 가득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사실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여기서 저자가 태어나지 않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이유는 삶에서 고통에 비해 행복이 부족하다는 식의 주장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한 비교나 계산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물론 현실의 부조리성을 생각해 볼 때 그 역시 주장을 뒷받침하는 이유로 생각할 수는 있겠으나, 근본적으로는 누구든지 그의 삶에 피할 수 없고 견디기 어려울 만큼의 고통이 가해지는 것을 충분히 기대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그 밖의 기쁨의 가능성이 아무리 많더라도 굳이 태어나서 삶을 감수할 이유가 없게 만들며 그것을 강요하는 것은 악이라는 사실에 핵심이 있다. 

가령 아무리 큰 보상을 주더라도 어떤 사람의 동의없이 그에게 심각한 고통을 주는 실험을 행하는 것이 도덕적일 수는 없다는 점에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것이 심지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가질 정도이고, 보상마저 확실하지 않은 경우라면 더더욱 그렇다. 그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사전에 안다고 해도 택할 사람이 거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현실 속에서 이것은 지금까지 가장 예쁘게 포장되어 온 악의 형태였다. 많은 이들은 끝까지 이런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을 테지만, 결국 그들이 낳는 자손 중에도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같은 결론에 이르는 이들은 계속 나타날 것이고, 이 사상이 소멸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 이 생각이 실현되면 인류의 마지막 세대는 상당히 고통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우주의 본성상 어차피 언젠가는 멸종을 피할 수 없고, 계속 세대를 이어나가면서 추가적인 고통을 양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어느 한 세대가 집중적으로 고통을 감내해서라도 인류를 더 빨리 멸종시키는 것이 고통의 양을 최소화하는 측면에서(또는 타자를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아마 반출생주의자라면 다들 이미 가지고 있었을 만한 생각이다.

더 세부적인 내용과 논리들은 책을 포함하여 다른 곳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으니 굳이 반복해서 언급하지 않겠으나,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 책의 궁극적인 의의는 결국 인간 본성의 근본적인 이기심을 폭로한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가령 많은 이들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 폭군과 독재자들을 보고 사악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세계라는 전쟁터, 불확실과 부조리가 지배하는 전선으로 막연한 희망을 갖고 자식들을 생산하여 내모는 자들도 그 근본의 폭력성에 있어서는 조금도 다르지 않다. 전쟁과 같은 사건은 그러한 인간 내면의 근본적 무책임과 이기심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형태에 불과할 것이다. 다른 모든 범죄와 폭력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인류사에서 그러한 본성은 다른 여러 악습들과 같이 당연시되어 모든 불행의 근본적 뿌리가 되어왔다. 저자는 이를 다양한 각도에서 비판함으로써, 비록 본인의 표현처럼 겉보기에 이상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미래의 가능한 고통을 방지할 수 있는 근원적인 인류애주의를 외치고자 한다. 

진정한 문명의 진보란 이처럼 당연시되는 자기 내면의 본성을 객관화하고 비판하는 능력을 갖추는 데에 핵심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책은 내게 문명의 진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렇다면 21세기에 들어서야 이러한 책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제서야 비로소 인간의 사상이 충분히 성숙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일까? 

어쨌든, 당연시되는 모든 인습에 맞서서, 동시에 제기될 만한 모든 반대에 대항할 용기를 가지고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저자와 번역자에게 감사한다. 그러한 지적인 정직함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그들에게 가장 배우고 싶은 덕목이다

https://m.blog.naver.com/bgident12/221542863085
출처 https://m.blog.naver.com/bgident12/22154286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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