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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의 근대화
게시물ID : history_1712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NoirCafé
추천 : 11
조회수 : 972회
댓글수 : 8개
등록시간 : 2014/07/17 12:59:12
Austria-Hungary.png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보헤미아의 국왕이자 헝가리의 국왕인 라요슈 2세가 후사를 남기지 않고 전사함으로 인하여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야기에우워
왕가의 대가 끊겨버리고 이에 야기에우워 왕가와 왕실혼인을 맺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헝가리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여 결국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의 권역에 편입된다.

 헝가리를 장악한 독일계 합스부르크 가의 통치에 대한 저항운동은 전근대, 즉 민족주의시대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다른 전근대 국가들이 그렇듯 이는 민족적인 차원에서 유래한 반란이 아닌, 주로 경제문제에 기인한 반란이었으며, 대다수의 반란참여계층은 농노나 소작농 등 하류계층이었다. 그러나 혁명 프랑스의 자유주의가 미텔오이로파에도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헝가리 내의 反합스부르크 운동은 다른 양상을 띄게된다.

 18세기 말까지 헝가리의 관용어는 라틴어였다. 헝가리의 귀족들은 라틴어 이외에 프랑스어나 독일어를 구사하였으며 헝가리어는 (백년전쟁 이전 잉글랜드가 그랬듯) 헝가리 사회의 하층민들이 사용하는 언어였다. 그러나 1784년 '계몽군주' 요제프 2세가 계몽국가에서는 사어(死語) 대신 생존해 있는 언어로 다스려야한다고 주장하면서 라틴어를 폐기하고 독일어를 관용어의 지위로 격상시킨 사건을 계기로 뿔이 난 헝가리인들은 헝가리어 부흥에 힘쓰게 된다. 헝가리 의회는 1792년부터 헝가리 왕국(위 지도 참조) 내의 크로아티아 지방을 제외한 모든 학교에서 헝가리어 교육을 의무화시켰다. 이러한 헝가리어 부흥 노력에 힘입어 1805년부터 헝가리어가 헝가리 의회에서도 통용되기 시작하였으며, 헝가리어로 작성된 청원서는 반드시 헝가리어로 답을 하여야하였다.

 이러한 사회전반적인 노력에 힘입어 지성인들도 점차적으로 헝가리어를 주로 사용하게 되었으며 세체니와 같은 자신의 사재를 털어 헝가리어 및 헝가리 문화육성을 위한 기관을 설립하는 자들도 등장하게 되었으며 종국적으로 헝가리어는 1836년에는 헝가리 왕국 내에서 공용어로 채택되고 1844년부터 다른 언어들은 공용어에서 배제되었다.

1848-49년 오스트리아의 황제 겸 헝가리 왕인 페르디난트 1세의 폭거적인 반동주의 정책에 맞서 일어난 유명한 헝가리 혁명이 진압된 이후, 한바탕 홍역을 치른 합스부르크 정부는 헝가리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헝가리 내에서 독일어 구사자를 공무원으로 채용하는 정책을 펴게 된다. 하지만 이 정책은 얼마 지나지 않아 파탄상태에 이르게 되는데, 그 이유는 독일어를 구사하는 공무원이 언어의 장벽으로 인하여 헝가리 왕국령 내에서 세금징수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정책의 파탄은 결국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라는 이중정부가 형성되는 직접적 계기가 된다.

 이중정부의 등장과 더불어 헝가리 의회가 위치한 중심도시인 부다페스트는 빠른 속도로 근대화되기 시작하였다. 오랜 분권주의 전통으로 인하여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헝가리에는 이렇다 할 중심지가 없었으나 부다와 페스트가 중심지로 급격히 부상하였고 인접해 있던 양 도시가 확장을 통하여 결국 도시권이 연결되어 부다페스트라는 이름의 통합도시로 거듭났다.
 
 1910년 부다페스트의 인구는 80만에 달하게 되는데, 이는 1870년에 비해 3배 증가한 것이며, 이는 동기간 헝가리의 인구가 40~50% 증가한것과 비교하면 괄목할만한 수치이다. 1870년과 1872년에 건설된 다뉴브 강변의 돌담길과 근대식으로 정비된 방사형 도로는 도심지의 이동성을 증대시키고 공간활용도를 높였으며 현재까지도 유럽에서 수위를 다투는 아름다운 거리로 평가된다. 정원과 연결된 도로와 도로 양옆에 배치된 화려한 다층주택들은 신흥도시인 부다페스트의 번영을 과시하였다.

Underground.png

1889년에는 트램이 건설되었으며 1896년에는 지하철이 도입되었는데, 이 지하철은 유럽에서 2번째로 건설된 지하철이자 유럽대륙에서는 첫번째로 건설된 지하철이다. 비단 건설시기만 앞서는 것이 아니라 질적인 측면에서 우수했는데 이는 당시 미국 뉴욕시가 벤치마킹할 정도의 수준이었다.

 부다페스트의 부흥은 헝가리의 전통적인 곡물무역 덕분이었다. 다뉴브강 중류에 위치한 헝가리는 비옥한 곡창을 많이 보유하고 있었으며 특히 수도인 부다페스트는 당시 미국의 미네아폴리스에 이은 제2의 제분산업 도시였다. 그 이외에도 가죽 가공, 염색, 벽돌 제조, 차량 및 선박 제조업 등이 호황을 이루었으며 연 산업생산 증가율이 6~7%에 이르기도 하였다.

 1896년 부다페스트에서 개최된 전시회에서는 이러한 부다페스트의 헝가리인들의 자만심이 크게 드러난 장이었는데 오스트리아 출신 여행자들은 이 전시회에서 혹시나 헝가리가 오스트리아를 통합하게 되진않을까 우려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인 부흥이라는 빛의 이면에는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1892년 겨울에만 부다페스트에서 500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콜레라로 사망했다. 콜레라의 원인은 오염된 다뉴브강을 주민들이 식수로 사용한데 있었다.
 주거사정 또한 열악했다. 1890년 부다페스트의 주민 70%가 단층건물에, 60%가 단칸방에 살고있었다. 지하실 거주자들이 사망률이 높다는 통계가 발표된 이후 헝가리 의회에 의하여 지하실 거주가 금지되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주민들이 지하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부다페스트, 나아가 헝가리 부흥의 역군이었던 농촌지방의 상황은 그보다 더 비참한 수준이었다.
 헝가리는 전통적으로 귀족의 권한이 막강하였는데 1222년 헝가리 국왕이 귀족들의 광범위한 특권을 인정한 금인칙서는 1848년까지 통용되었으며 1848년에 개정한 법조차 기존의 귀족의 권한을 거의 삭제하지 못하였으며 실질적으로 1944년까지 헝가리 귀족들은 막대한 특권을 누리게 된다.

 1848년 헝가리 왕국 전체인구의 7%가 귀족이었는데 이 비중은 1920년대 20%로 오히려 증가하게 된다. 헝가리는 근대시대에도 귀족사회를 줄곧 유지하는데 예컨대 1940년대 초반까지도 헝가리인들은 상류층이나 중류층들이 가사에 참여하는 행동이 비전통적 행위로 금기시하고 있었다. 장바구니를 들고 시장에 가거나 음식을 요리하거나 청소세탁을 하는 일 등은 모두 하류층 혹은 하인의 몫이었다.
 헝가리에는 비대하고 복잡한 귀족계급들 이외에도 막강한 지주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지주들은 자신들의 농지에 '지역 담당관'이라는 이름의 휘하공무원들을 배치하였었다. 이들 공무원은 토지 소유자들에 의하여 선발되어 그들의 이익에 봉사하였다.

 당시 헝가리의 지역 담당관들에 관한 기록에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모든 민원은 그들의 손을 통해서 전달된다. 모든 권력 행사는 그들에 의해서 전파되고 통제된다. 그들은 강을 통제하고 도로와 다리를 건설한다. 가난한 사람을 대변하고 학교를 감시하며, 어디에서 늑대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그들은 산림 감시관이 된다. 전염병이 돌면 그들은 보건소장이 되고, 형사 사건이 발생하면 판사가 된다. 그들은 치안, 전시상황, 구호문제의 총 책임자이다. 한마디로 그들의 영향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19세기 헝가리의 지주들은 지역담당관의 힘을 빌려 각 지방을 사실상 자신의 왕국처럼 통제할 수 있었다. 헝가리 의회는 1898년에 '노예법'이라고 불리우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에 의하면 지주는 반항하는 노동자들에게 체형을 합법적으로 가할수 있었으며 추수기에도 무장한 사병(私兵)을 동원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은 헝가리가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결국 헝가리의 비옥한 농토에서 대규모의 인구이출이 발생하게 된다. 1890~1910년 20년간 미국으로 건너간 헝가리인 인구수만 150만명에 달하는데, 이는 헝가리 인구에 10%에 육박하는 규모였으며 타 지역으로의 이민을 선택한 인구까지 합산하면 이러한 헝가리의 '근대화'가 얼마나 큰 비용을 치뤘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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