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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웅 혹은 폭군, 스탈린(13 -1)
게시물ID : history_171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리볼버오셀롯
추천 : 5
조회수 : 74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1/06/15 21:26:26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건방진 덕국 놈들을 잡아 족치고 베를린을 향해 달려갑시다.

33.독소전의 후반부(1943~44)

43년 말에 이르면 독일군은 쿠르스크 이후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힘겹

게 막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서유럽에서 서방 연합군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신호

가 커지자 여기에도 새로운 병력을 파견해야 했습니다. 물론 연합군의 전략 폭격 또한 독일의 전쟁 수행 능

력을 조금씩 갉아먹고 있었죠. 반면 붉은 군대는 단지 쿠르스크 전투의 상처를 치유하는데서 벗어나 그 규모

가 거대해졌습니다. 이제 동부 전선에서 310만의 독일군이 640만에 이르는 붉은 군대와 싸워야 했습니다. 병

력만 차이가 나는 게 아니었죠. 항공기는 3000 대 13400, 탱크는 2300 대 5800 으로 그 격차가 날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44년이 되자 이 격차는 더욱 벌어졌지요. 44년에 이르자 이제 대공세를 시작하는 쪽

은 소련군 측이 되었습니다. 부총사령관이자 실질적 소련군 사령관인 주코프는 소련군이 방어에 집중하는 것

처럼 기만 작전을 벌이면서 공세를 준비했습니다. 이 공세는 6월에 이루어지는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

과 비슷한 시기에 시작될 것이었는데, 5월 20일 크레믈린에서 열린 최종 회의에서 참석자들은 이 작전의 명

칭을 무엇으로 할 지 서기장 동무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스탈린은 같은 그루지아 출신의 전쟁 영웅의 

이름을 골랐습니다. '바그라티온'(Bagration) 작전은 1812년 나폴레옹 전쟁 당시 수보로프와 쿠투조프의 전

우였던 군인의 이름을 딴 것이었죠. 바그라티온 작전은 본래 예정 보다 다소 늦어진 6월 22일 (공교롭게도 3

년전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된 그날이었습니다!! 노린걸까요?) 시작되었습니다. 만일 투하체프스키 원수가 

살아서 이 작전을 보았다면 자신의 '종심 공격' 이론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을 알고 크게 기뻐했을 그런 

작전이었습니다. 6월 19일 파르티잔이 후방을 교란하고 6월 21일에는 항공기에 의한 대규모 공습이 시작되었

습니다. 이후 대규모 포격이 있은 후 6월 23일 야음을 틈타 거대한 붉은 군대의 해일이 모든 전선에 나타났

죠.(인민웨이브 ㅎㄷㄷ..) 공격의 선두에는 지뢰를 제거하는 장치를 단 탱크들이 앞장을 서고 그 뒤로 보

병, 탱크, 자주포가 따랐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마치 3년전 바로바로사 작전의 재판을 보는 듯 했습니다. 다

만 이제는 독일군과 소련군의 입장이 뒤바뀐 상태였다는 것만이 다르다면 다른 점이겠죠. 44년 6월에서 7월 

사이는 독일군에겐 악몽이었습니다. 동서에서 밀려오는 연합군과 소련군을 그들은 도저히 저지할 수 없었습

니다. 서부 전선에서 독일군은 9월에 이르러서야 본래의 독일 - 프랑스 국경에서야 연합군을 저지할 수 있었

죠. 동부 전선에서는 8월에 이르러서야 바르샤바 인근에서 소련군의 진격을 겨우 저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

기서 한가지 논란이 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44년 8월1일, 부르 - 코모로프스키 장군과 폴란드의 애국자 2

만명이 바르샤바를 침략자의 손에서 해방하고자 군사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근처까지 소련군이 몰려왔으

니 이들의 도움을 얻는다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보였습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소련군의 지원은 없었습니

다. 독일군이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22만 5천명이 죽고, 도시는 폐허가 되었으며, 부

르 - 코모로프스키 장군과 이하 저항군은 모두 죽거나 포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고로 영화 '피아니스

트'의 후반부가 이 전투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고 합니다) 44년 10월 2일 폴란드 저항군이 항복하자 서방은 

소련을 비난했습니다. 처칠을 비롯한 많은 서방측 인사들은 스탈린과 소련이 훗날 골치거리가 될 폴란드 민

족주의자들을 독일군의 손을 빌려 처치하려 했다고 믿었습니다. 사실 폴란드와 러시아는 워낙 앙숙이었고, 

또 과거 스탈린의 행적을 볼 때 이것은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보다 더 복

잡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사실 소련의 도움을 받지 않고 폴란드를 해방하기를 바랬

죠. 소련의 도움을 받는다면 사실상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우려는 7월 21일 스탈린의 승인을 받은 폴란드 민족 해방 위원회가 세워지면서 더 커졌습니다. 그리고 이 위

원회는 다음날 '폴란드 임시 정부'로 간판을 바꿔 달았죠. 이에 마음이 급해진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은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봉기를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독일군은 600km 이상을 진격한 후 한숨 돌리는 소련

군을 상대로 효과적으로 싸우고 있었고, 한때 비수아 강을 넘어서 바르샤바 인근까지 진격한 붉은 군대는 일

시적으로 강 너머로 밀려났습니다. 사실 독일군의 열세는 이제 피할 수 없긴 했지만 일시적으로 긴 거리를 

진격한 붉은 군대는 다소 맥이 빠졌고, 병참선이 길어져 공격력이 무뎌진 상태였습니다. 반면 거의 독일 본

토에 근접하게 밀린 독일군은 마지막 악에 바친 전투를 벌이고 있었죠. 뒤로 밀리면서 보급선이 다소 짧아

진 것도 호재라면 호재였습니다. 이 마지막에 이른 독일군의 투혼을 본 주코프 원수도 9월경에는 비수아 강

과 기타 강을 건너 공격하기는 무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사실 독일군이 폴란드 민족주의자들을 처리해 

주면 스탈린 입장에서야 고마운 일이긴 했지요. 그러나 사실 이는 의도한 결과라기 보다는 독일군의 저항이 

예상외로 완강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소련군이 대거 발칸반도로 쳐들어간 것은 다소 정치적인 이유

가 강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지역에 여러 국가들을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로 만들기 위해, 스탈린은 그리

스를 제외한 전역에 소련군을 진주시키기 희망했지요. 유고슬라비아는 티토가 결국 나가라고 해서 철군하긴 

했지만, 나머지 지역에선 성공적으로 소비에트의 위성국가들이 건설되었습니다. 동유럽에 이런 위성국가가 

등장한 이유는 서기장 동무가 서방이 다시 침공하는 일에 대비해서 이번에는 일종의 완충지대를 두고 싶어했

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들 국가의 국민들이 공산주의를 받아들이겠다고 한 적은 없었지만 어차피 스탈

린 동무에게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포로로 잡힌 덕국 병사들입니다. 이들은 곧 자신이 왜 전사하지 못했는지를 후회하게 될 것입니

다. 자애로운 영도자 스탈린 동무께서는 이 친구들에게만은 그다지 따뜻한 분이 아니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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