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당시 탄금대 전투에서 전사한 김여물의 손자이자 인조반정의 주역인 김류의 아들로, 부친과 함께 반정에 참가해서 2등 정사공신에 올랐다. 그리고 부친의 배경을 바탕으로 계속 출세 가도를 달려 공조 참판에 오늘날 서울시장에 해당되는 한성부판윤까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권세를 믿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여 평소부터 여러 사람들의 지탄을 받았다. 한 번은 어느 무관이 자신에게 인사를 안 하고 지나갔다고 마구 곤장을 때려 죽게 했을 정도.
병자호란이 시작되자 강화도 수비를 맡은 강도검찰사가 되었지만,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띵가띵가 놀았다. 김포와 통진에 보관되어 있던 곡식을 피난민들을 구제한다는 이유로 배로 실어 왔으나, 정작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 말고는 아무에게도 나눠주지 않아 모든 사람들에게 원성을 샀다. 심지어 강화도로 건널 때 세자빈조차 배에 태우지 않았다. 세자빈이 원망에 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자 마지못해 세자빈만 태웠다. 때문에 강화도로 건너가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청군에게 희생되었다.
심지어 강화도의 해안선인 갑곶과 연미정 이북 사이에 보초 하나 세워두지 않고, 청군의 동태를 감시하는 일도 하지 않았다. "바다가 있는데, 청군이 어떻게 건너오겠느냐?"하는 식으로...
보다 못한 대신 김상용이 "네 나이가 몇인데 어찌 이리도 철없이 구느냐? 네 아비인 김류도 임금을 따라 남한산성에 가 있는데, 걱정이 되지도 않느냐?"라고 꾸짖자 화가 잔뜩나서 군사 업무를 처리하는 도장을 땅에 내팽개치고는 "내가 알게 뭐냐! 어떻게 되건 난 모른다!"라고 씩씩거렸다고 한다.
그러던 와중에 민가를 헐어 만든 뗏목을 타고 청군이 기습해와 강화도가 함락되자, 병사들을 동원해 막을 생각은 안고 겁에 질려 자기 혼자 살겠다고 배를 타고 충청도로 튀었다. 유수 장신과 함께 강화도 함락의 가장 큰 원인.
얼마나 한심했는지, 청군이 쳐들어오자 자신의 어머니와 아내마저 내팽개치고 혼자만 살겠다고 도망갔다. 그의 아들인 김진표는 더욱 가관인데, 자신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가 되는 여인들에게 자살하라고 협박했다. 오랑캐인 청군에게 사로잡혀 치욕을 당하느니 죽는게 낫다고.
그의 어처구니없는 무능과 태만으로 인해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을 비롯한 왕실과 대신들의 가족들이 모두 청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남한산성에서 농성하고 있던 인조와 조정의 대표 인사들은 항전할 의사를 잃었고, 결국 청군에 항복하고 만다.
사실 최소한의 저항을 하고 왕실 가족만이라도 대피시켰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건데...실지로 소현세자의 아들들은 간신히 대피해서 충청도로 피난갔고 충청도의 병력과 영, 호남의 근왕군이 올라오고 있던터라 어느 정도 승산은 있었던 것을 이 사람들이 말아먹은 것이다.
임진왜란에서 칠천량의 대패를 자초하여 조선 수군을 말아먹은 원균에 필적, 혹은 그 이상가는 찌질이라 하겠다.
반정공신의 아들이라 웬만해서는 용서해 주고 싶었던 인조였지만, 김경징이 보여준 추태를 기억하던 수많은 사람들의 탄핵을 받아 1637년 9월 21일 사약을 받고 죽었다. 함께 강화도 방위를 맡았으며 김경징과 장신 등 고위 지휘관들이 모두 달아난 상황에서 열세인 병력으로 끝까지 항전했던 충청수사 강진흔이 참수형을 당한것에 비하면 굉장히 큰 특혜를 입은 셈이다.
조선왕조실록 인조 35권, 15년(1637 정축 / 명 숭정(崇禎) 10년) 9월 21일(병술) 2번째기사를 찾아보면 어떻게 김경징을 처벌했는지 볼 수 있다.http://sillok.history.go.kr/inspection/inspection.jsp?mTree=0&tabid=k&id=k
조선왕조실록의 인조실록을 기록한 사관은 그가 죽던 날에 작성한 기록에서 "김경징은 주변 사람들에게 무지하고 미친 아이(狂童)라고 손가락질 받았다."라고 썼다. 당시에도 김경징이 얼마나 욕을 먹었는지, 알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