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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트하게 보는 개항기 조선의 국방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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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NoirCafé
추천 : 4/5
조회수 : 836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07/19 22:05:57
양란 이후 후기조선은 오랜기간동안 중국, 일본과의 통교를 제외하면 대외와의 교류가 존재하지 않았던 폐쇄국가였으며 국가의 방위도 중국과의 동맹에 의존하여 왔는데, 오랜기간동안 이러한 국방정책은 중국이 경쟁상대가 없는 대국으로 존재하는 한 줄곧 유효해 왔으며 실제로 세계적인 기준으로 조망할 때 조선은 무장수준이 빈약하였으나 별다른 안보상의 위협없이 호란 이후 250년 가량 존속해 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제국의 수도 베이징을 점령하고 이를 약탈하는 등 서구열강들이 이러한 중화체제를 위협하자 중화체제에 의존해 왔던 조선은 전례없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이에 1880년대 초반부터 군사력이라는는 화두가 도마에 오르게 되었다.

 먼저 1880년대 초반 조선은 비로소 지역정세가 혼란과 격변의 와중에 빠진 현상을 절감하고 이에 대한 지식을 수집하기 위하여 관료들을 전통적인 교류국인 중국과 일본에 파견하였는데, 국방력 강화가 국가의 지상과제 중 하나가 된만큼 이들국가의 군제(軍制)에 대한 이목또한 집중되었다. 이들 파견관료들은 중국은 친군체제, 즉 모병제를 실시하고 있으며, 일본은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를 실시하고 있다는 정보를 수집하여 오게되며, 이에 조선에서는 양 군제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었고 결국 전자가 채택된다.

 임오군란 이후 조선의 군제는 중국식 친군영(親軍營)체제로 정비되었고 이는 소수정예군 육성을 목표로 하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병력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 갑신정변 이전까지는 중국식 군체제와 일본식 군체제가 짬뽕된 잡색군대나 다름없었는데 친군좌영, 친군우영, 친군전영, 친군후영의 4영으로 이루진 친군영 중 친군좌영과 친군우영은 중국무관으로부터 중국식 훈련을 받았으며, 친군전영과 친군후영은 일본무관으로부터 일본식 훈련을 받아 실질적으로 판이한 군대였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러한 비동질성으로 인하여 전자와 후자간의 충돌이 자주 빚어졌고 험악한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험악한 관계는 결국 갑신정변 때 본격적인 충돌이 빚어지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친군전영과 친군후영이 일본의 후원을 받은 갑신정변에 가담하고 친군좌영과 친군우영은 청군에 합세하여 정변파에 가담한 친군전영과 친군후영 및 일본군을 공격하는 참사가 벌어진 것이다.

 이는 모병군인 고종의 친위대 친군영이 국왕의 통제에서 완전히 이탈하였으며 해이한 기강을 셀프인증한 사건이였으나 갑신정변 이후에도 고종은 중국식 친군체제를 지방에까지 확대해나가게 된다. 조선이 이와 같은 중국식 모병제를 채택한 이유는 당시 청이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국가였다는 점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사료되는데 실제로 당시 조선총리로 파견된 중국의 위안스카이는 조선의 국방정책에 깊숙히 관여하였으며 조선의 청에 대한 종속국화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암약하고 있었다.

 그 이외에도 고종 본인이 '국왕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비정예병들'로 인하여 끔찍한 일들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사실 또한 이와 같은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1882년에 일어난 구식군대의 임오군란으로 인하여 고종과 민비는 화를 입을뻔 하였으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에는 고종을 호위하던 병사들의 무례한 행동을 꾸짖은 내관 유재현이 고종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본인의 눈앞에서 병사들에게 잔혹하게 살해당하는 광경을 목도하는 충격을 겪기도 하였는데 이와 같은 개인적인 경험들이 그가 정예병 선호성향을 갖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고종과 조선이 의도한 결과와는 달리, 이러한 친군영은 정예병과는 거리가 있는, 아니 오히려 오합지졸에 가까운 군대였다. 좌의정 김병시는 친군영을 '교만한 자식', '사나운 종'에 비유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훈련상태가 좋지 못하였으며 병사들의 병영이탈행위는 애교였을 수준이다. 일본의 공무원인 혼마 큐스케의 '조선잡기'에 의하면 조선의 병사들이 한양의 민가를 수시로 약탈하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실 모병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탄탄한 재정이 뒷받침되어야 하였으나 조선 후기의 재정파탄으로 인하여 이러한 모병체제가 올바르게 유지되는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정예병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근대식 사관양성체계의 확립이 선결되어야만 하였다. 조선정부 또한 강병 육성책의 일환으로 사관학교를 건립하고 미국인 교관 4명을 고용하나 불과 1년후 재정문제로 인하여 교관 2명이 해고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근대식 장교육성체계를 통한 지휘관 수급에 한계가 존재한 조선은 전근대식 무과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였는데 이는 조선군 장교가 사관학교 출신자와 무과합격자로 이원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이는 군대의 근대화에 오히려 역행하는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더군다나 신식무기 구입에도 한계가 존재하여 여전히 조총이나 활 등이 군사훈련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모병제 군대에는 충분한 급료가 주어져야 하나, 조선정부는 재정부족으로 용병들에게 급료를 지급하는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충청군영의 경우, 재정이 곤궁해지자 충청군영 소속 병사 600명의 1인당 월 봉급을 40냥에서 30냥으로 줄이는 방안을 검토하였으나 충청병사 이용복은 이전에 40냥일때도 병사들이 급료가 적다고 아침에 모였다가 저녁에 해산하곤 하였는데 10냥을 줄이면 더 큰 기강해이가 일어날 것으로 우려하기도 하였는데, 결국 충청군영은 병사 200명을 해고하게 된다. 한편 지방관들은 봉급으로 책정된 예산을 횡령하기 위하여 비슷한 방식으로 군사정원을 감축해나가게 되는데,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 중앙정부로서는 이들을 막을 방책이 없었고 따라서 전국의 군 병력수는 축소일로를 걷게 된다.

 이러한 절망적인 군 양성의 결과는 조선정부에서 감군론(減軍論)이 득세하게 된 배경이 되었으며 결국 국왕의 친위대인 친군영들조차 군 병력을 축소해 나가게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을 거쳐 조선군은 약체화될대로 약체화되었다. 조선정부는 1893년에 남부지방에서 동학교도들이 대규모 집회를 열자 당혹감을 감출수 없었다. 조선정부는 강화도 및 평안도의 군 병력의 동원까지 검토하게 되는 상황하에 놓이게 된다. 조선정부는 긴급히 전라도에서 군사 400명을 동원하여 친군무남영을 편성하였으나 동학군의 공격으로 와해되고 만다. 조선의 최정예군인 경군(京軍)까지 동학군에게 대패하자 더 이상 조선에 동학군을 막을수 있는 군대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정부는 자구책으로 중국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되는데 중국과 일본 간의 텐진조약으로 인해 일본군 또한 조선에 출병하게 된다. 양국군은 충돌을 일으키고 결국 전쟁상태로 돌입하게 되는데 이가 바로 청일전쟁이다. 동학군이 격퇴된 이후에도 중국과 일본은 전쟁을 지속하였으며 조선은 청일전쟁의 전장 중 하나로 전락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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