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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끝까지 다 읽는 사람이 10명도 없다는 데에 제 왼쪽을 겁니다!
게시물ID : readers_172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hinejade
추천 : 2
조회수 : 635회
댓글수 : 4개
등록시간 : 2014/11/16 20:31:09
  다시 돌아온 10명과 왼쪽 시리즈입니다.ㅋㅋㅋㅋ
  제가 이번에 철학과 중간고사 시험때 제가 적은 답안지입니다.
  (드럽게 어렵기로 소문난)헤겔의 철학이 좀 그래도 철학서적보다 쉬운, 
  학생의 언어와 눈으로 쉽게 설명된 것 같아 옮겨 적어봅니다. (헤겔의 추상법, 도덕 관련)
  철학 쪽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면 정독하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다만 200년 전 사람의 철학이라 비판받을 점은 많아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10명도 없을 겁니다.ㅎㅎ



  문제 : 법이 왜 추상법의 단계에 머물러 있고, 도덕성이 왜 추상적이고 형식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지 설명하라. 그리고 그 설명이 설득력이 있는지 논하라.



  미국 유명방송채널인 폭스 채널은 26년전 엄청난 사회풍자성인 애니메이션을 만들어 냈다. 바로 <simpsons>, 심슨이다. 그후, 심슨은 엄청난 팬덤과 평단의 호평으로 최고의 애니메이션 반열에 오르게 된다. 특유의 코믹함이 장점이기도 하지만 자사 방송사인 폭스마저도 풍자할 정도로 사회풍자력이 걸출하기 때문이다. 그런 심슨의 시즌 25 9화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나온다. 블록버스터영화를 보러간 호머(아빠)는 폭리임이 분명한 티켓값에 불평한다. 게다가 영화관에서는 영화를 보기전 광고를 너무 오래 틀어주는데다가, 영화는 간접광고로 도배되어 있다. 호머는 그러한 모습에 분노하고 영화관에서 난동을 부리다 쫓겨난다. 호머는 영화를 그래도 보고 싶었고, 바트(아들)는 그런 호머에게 불법다운로드 방법을 알려준다. 호머는 그 방식에 감명을 받아 자기집 뒷마당에 무료 영화관을 차려 이웃들과 함께 불법 다운로드 영화를 본다. 그 뒷마당 영화관의 인기는 날로 높아지다가 결국 저작권 협회에 걸려, 호머는 할리우드에 고소를 당한다. 결국 할리우드의 변호사들에게 이기지 못한 호머는 법정에서 최후변론으로 자기의 인생이야기를 한다. 보잘 것 없는 소시민이자 개인인 자신은 평범하고 그럭저럭 살아왔으며, 그래도 영화사와 할리우드의 횡포에는 견딜 수 없었다는 최후변론은 판사에게 통하지 않는다. 그때 호머를 고소한 할리우드 대표가 판사의 망치를 뺏더니 호머에게 말한다. "당신 그 이야기 좋군. 영화화 합시다! 고소를 취하해 주겠소." 고소는 취하되고 리사(딸)가 옆에 있는 할리우드 프로듀서에서 묻는다. "왜 저 이야기가 좋은 거죠?" 그러자 프로듀서가 말한다. "거대한 대기업같은 공동체에 맞서는 개인의 이야기는 잘 팔리거든!"
  그렇다면 개인과 공동체는 왜 이렇게 현대사회에서 이목을 집중 받고 있을까? 이것은 헤겔의 추상법, 도덕에 관한 주장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고대의 정치철학은 현재의 모습과 여러가지의 모습에서 달랐다. 고대의 정치철학을 대표하는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그는 개체보다 공동체에 더 시선을 집중한 정치철학을 주장했다. 그럼으로써 말하기를 공동체는 개체보다 더 선차적이어야 하며, 인간은 공동체적 존재이기 때문에 홀로 인격을 완성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또한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는 노예와도 다름이 없다고도 하였다. 이러한 공동체를 중시하는 철학을 서구사회에서는 확실하게 물려 받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는 사고방식으로 그것에 대해 알 수 있다. 공적인 것의 어원은 '공동체'를 뜻하고 사적인 것의 어원은 '공동체적 장점 또는 특질을 거부하는, 제외하는'을 뜻하니 얼마나 공동체를 중시하는 모습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에 매몰됨으로써 공공성이 신장되었지만 그 대가는 크다. 개인의 권리가 엄청나게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브루주아의 앙시앙레짐과 봉건제의 쇠퇴, 여러 개혁등으로 개인의 권리가 늘어나게 되었다. 그 증거가 시민사회이다. 사유재산을 통해, 다시 말하자면 욕구와 그것에 기초한 노동의 체계인 시민사회는 개인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여기서 왜 개인과 사유재산이 동일선상에 놓이게 되냐면 헤겔은 인격은 물권이라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장은 가격, 화폐의 일반화로 시민이 탄생한다는 주장과도 맞닿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동체보다 개인이 중시 되는 것이 극단적으로 치닫게 되면 소외, 고독, 공동체 협력의 부재 등 여러가지 문제가 나타난다. 이 문제의 예를 하나 들자면 최근에 일어난 한 사건의 당사자인 부모의 대꾸를 들 수 있다. 학력등을 위조하여 자식의 대학입시를 준비하다가 발각된 학부모의 대꾸이다. "다들 그러는데, 왜 나한테만 그래요?" 이것을 통해 현재한국사회가 프라이버시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극단적 이기주의가 팽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 사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으로 회귀해야 할까? 개인의 평등과 공동체의 관계를 오해한 그 방법으로? 헤겔은 당연히 그렇지 않아도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공동체와 개인의 구도에 대해 모든 것이 추상적이라 비판했다. 그리고 성숙한 개인과 성숙한 공동체가 공존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관계구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추상적이라고 일축했다.
  그렇다면 이 추상은 어떠한 개념인가. 헤겔에 있어서 추상이란 부정적인 개념이다. 더불어서 헤겔은 이념이라는 것은 개념이 현실성을 갖춘것이다라고 말하며 현실적 면모를 강조했다. (심지어 헤겔은 사변철학마저도 현실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서 개인과 공동체의 여러 갈등들이, 앞서 말한 근대시민사회를 기초하고 있는 시민법(사법)의 형태가 추상적이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헤겔은 추상법이라는 개념을 주장했는데, 시민법은 개인과 공동체에 맞춘 현실적 객관이 고려되지 않은 추상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추상법은 어떻게 해결 할 수 있을까. 먼저 법의 근원적 물음인 도덕에 대해서 알아보자.
  헤겔은 도덕이 도덕의 차원에서 머물면 추상적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그보다 앞서서 도덕에 관해 주장한 자들이 있었다. 절대다수 최대행복을 주장하는 공리주의의 결과론적 윤리관을 지지하는 자들과 주관적 양심을 주장하는 칸트의 심정적 윤리관을 지지하는 자들이다. 헤겔이 대안을 제시하기 전까지는 이 둘의 도덕에 관한 논쟁은 계속 되었는데, 헤겔은 이 둘 중 한편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는 그 둘 모두 추상적이라 일축했다. (한명을 죽여버리고 나온 장기들을 통해 다섯명을 살릴 수 있다면 괜찮은 거냐? 등의 공리주의의 약점은 무시하고)헤겔은 칸트의 주장에 집중했다.
  칸트가 도덕에 관하여 주장하는 것의 핵심은 이렇다. 세상에는 선한 것들이 많지만 그 중에서 무조건적으로 선한 것은 선의지밖에 없다. 이 선의지도 모든 것이 제어되어야 하며, 이것은 정언명령을 통해 발현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인간을 수단으로 삼지 말고 목적으로 삼으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헤겔은 인간이 생래적으로 선하지 않고 노동을 통해 선할 수 있다고 보았지만)칸트는 인간은 본래부터 선하므로 도덕을 주관으로 압축시켜 나온 주관적 양심에 따라 행동하라고 주장했다. 헤겔은 칸트의 철학이 어느정도 정점에 도달했다고 인정하나, 양심이라는 말 이후부터 칸트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왜냐하면 양심은 주관으로부터 도달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칸트의 양심에 대해서 듣고 이렇게 되묻는다. "그렇다면 제3자가 끼어들 수 없을 정도로 주관적 양심과 주관적 양심이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가?" 헤겔의 물음은 상당히 날카롭다. 더불어서 헤겔은 칸트의 양심을 "악과 양심은 뿌리가 같다. 둘 다 자기 확신에 가득차 있는 주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까지 말한다. 이것에 관한 적절한 예가 있다. 바로 2008년 촛불이다. 2008년 촛불은 정치운동을 축제의 차원으로 환원시켰다는 점과 시민권과 소비자권을 동일선상에 놓았다는 점에서 칭찬받아야할 사건이었다. 하지만 헤겔이 모든 것에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생각하듯이, 이 사건에도 어두운 면이 있었다. 바로 진정正성의 부재였다. 2008년 촛불에서는 합리적, 사실적으로 공공의 장소에서 검증되어야 하는 것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다. 덕분에 당시 사회에서는 엄청난 충격과 공포가 검증되지 않은채로 흘러넘쳤고, 그것의 생산지는 당시의 사태에 분노한 개인의 주관적 양심이었다. 즉 헤겔은 양심이라는 것은 일면적이고, 그 일면성에 기댄 도덕마저도, 앞서말한 것처럼 도덕 그 자체로는 추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헤겔은 검증 된 양심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타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양심을 무엇으로 검증할까? 헤겔은 인륜성이라 대답한다.
  인륜성을 과격하게 뭉뚱그려서 설명하자면 '객관화 된 양심'이라 할 수 있다. 즉 다시 말해 가족, 사회같은 공동체와 같은 것이라고 보면 된다. 그럼으로써 인륜성과 양심의 합리적인 면을 취하고 불합리적인 면을 버리면 된다고 헤겔은 주장한다.
  이러한 헤겔의 주장에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나는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태제, 안티테제, 진테제를 말하며 변증법적으로 그리고 선형적으로 주장해 나가는 모습은 존경스럽다. 확실히 다른 철학자들의 주장을 간파하고 파쇄하며 그 가운데 얻을 수 있는 것은 (일단 추상적이라 비판 한 뒤) 자기 것으로 만들어 내는 모습도 독단적이지 않아서 좋다. 하지만 한가지 헤겔의 시각에 나는 불만스러운 것이 있다. 바로 '천박한 감정주의'에 관해서다. 헤겔은 망명높은 프리스씨와 바르트부르트사건을 통해 감정에 대해 혐오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비꼼마저도 감정일텐데 말이다. 더불어 그러한 감정을 통해 인륜성을 향한 길도 출발했다.
  사회문제의 시발점은 감정의 폭발이다. 만약 감정의 폭발이 없었을 경우 그 이슈는 절대로 이슈화되지 않는다. 물론 이러한 감정이 장기화 되면 좋지 않은 일은 반드시 나타난다. 그 예로 '너 내가 누군지 알아'사건도 있다. 이것은 감정적인 것이 얼마나 불안한 것인지 확실히 보여준다. 하지만 만약 헤겔이 좋아하는 '미네르바의 올빼미'처럼 느지막히 날아올라 차가운 이성의 눈으로 사건을 분석한다고 보자. 그것은 현대사회에 있어서 가장 치명적인 단점을 내포하고 있다. 정보의 집중성과 전달성의 중요성을 무시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즉 이성적으로 생각하기엔 세상이 그 사건을 쉽게 망각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감정은 앞서 말한 주관성과 연관된다.
  헤겔은 주관성을 가진 양심은 악으로 전화 될 수 잇다고 보았다. 하지만 욕망으로 이루어진 시민사회도 복지행정과 중간집단을 통해 자정작용을 하려 노력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헤겔이 너무 근본주의적 시각에 사로잡힌 것 같다는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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