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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신드롬과 군중세뇌
게시물ID : sisa_1728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emponym
추천 : 18/11
조회수 : 548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05/11/01 21:41:17
많은 분들이 보셨을 자료입니다. 박정희의 기회주의적인 속성도 더러운 행위도 민족적인 자존심도 경제적인 미화아래 덮어두자는 말들때문에 이런 글을 옮기게 되었으니 조금이라도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박정희 신드롬과 군중세뇌 아직도 많은 국민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 한국경제를 비약적으로 발전시켜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기 때문이라는 것이 주요 이유이다. 이런 현실을 어떻게 봐야 할까? 실제로 박정희정권의 경제업적은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면이 적지 않다. 군사정권이 1961년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무려 30년 이상이나 지속된 데다,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던 언론이 박정희정권의 업적을 끊임없이 찬양하면서 국민들을 세뇌시켰기 때문이다. 여기에, 군사정권 아래에서 오랜 세월 영화를 누렸던 경제관료들의 영웅담이 가세하면서, 군중세뇌로 오도된 신화만 남게 되었다. 심지어 실패한 정책마저 맹목적 찬양에 가려지는 결과를 빚었고, 이것은 정책실패의 반복을 부르기도 했다. 지금쯤은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정당한 평가가 이뤄질 때가 되었다. 박정희정권 경제업적의 첫번째 신화는 뭐니뭐니 해도 경제발전의 토대를 닦았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성장은 이미 1950년대 후반부터 시동을 걸었다. 성장률이 57년에 7.6%, 58년 5.5%, 59년 3.9% 등을 기록하여 본격적인 성장가도에 들어섰던 것이다. 매년 50% 안팎으로 오르던 물가도 57년부터는 한 자리수로 안정되었다. 이승만정권이 붕괴되던 60년에는 성장률이 1.2%에 그쳤지만, 4ㆍ19혁명으로 사회혼란이 극에 달했다고 군사정권이 선전했던 61년에는 다시 5.9%로 뛰어올랐다. 또한 물가 역시 안정세를 유지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완벽하게 은폐되고 말았다. 두번째 신화는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이 한국경제를 일으켜 세웠다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의 역사는 57년 4월의 '전원개발 5개년계획'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탄전종합개발 10개년계획'과 '재정금융안정계획'이 그 뒤를 잇는다. 중장기 경제개발계획도 이미 58년에 수립에 들어갔고, 2년 뒤에는 '경제개발 3개년계획'을 성안하였다. 민주당정권은 이것을 토대로 61년에 '5개년개발계획(62∼66년)'을 수립하여 공표했다. 불균형성장전략이 도입된 것도 바로 이 때였다. 사실 박정희 정권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민주당정권의 것을 모사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왜 57년부터 갑자기 이런 일들이 벌어진 것일까? 당시에는 부족한 식량과 재정 등을 미국원조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는데, 미국 정부가 원조중단을 통보하였고, 우리 정부로서는 자력갱생의 길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56년에는 수출장려보조금 제도를 도입하는 등 수출에도 본격적으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각종 산업정책 및 경제정책에도 눈을 돌렸다. 원조에만 의존하다가 자력갱생에 나서자, 우리 경제가 본격적으로 소생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점은 길이 새겨둬야 할 교훈이다. 세번째 신화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에는 오류가 없었던 것처럼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와 사뭇 다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가발산업 육성을 언명하면 몇 년 안에 가발산업이 사라질 위기에 처했고, 합판산업 육성이나 섬유산업 육성을 외치면 그 산업들이 온통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60년대 후반, 차관산업 육성에 나섰을 때에는 차관도입으로 설립한 기업들이 대부분 3년 안에 망했고, 결국 국민경제 전체가 심각하게 흔들려야 했다. 70년대 후반에는 중화학공업 육성을 힘차게 부르짖었는데, 이것은 박정희 정권의 온간 시혜를 입었던 고위관료 출신조차 부정적으로 평가했을 정도이다. 실제로 중화학공업의 부실을 해소하기 위해, 엄청난 국민경제적 자원이 '산업합리화조치'라는 미명 하에 여러 차례 쏟아 부어져야 했다. 그렇다고 박정희정권의 경제정책이 모두 실패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한 것은 사실이다. 다만, 그 업적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전유물은 결코 아니며, 정책실패도 있었다는 점을 강조해두고자 할 따름이다. 또한 이런 눈부신 경제업적 뒤에는 물가폭등이라는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고, 금융기관 활동 정지, 증권파동, 화폐개혁 등 작은 정책실패는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았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말이 훌륭하면 기수의 실력이 좀 뒤떨어져도 잘 달릴 수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박정희의 뛰어난 능력이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가져온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잠재력이 그만큼 뛰어났을 뿐이다. 그래서 박정희 정권의 잦은 정책실패에도 불구하고, 우리 경제가 비약적인 성장을 할 수 있었다. -최용식
박정희 평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워싱턴 포스트) "북한이 감옥이라면 남한(박정희정권)은 지옥이다" (조명훈-재독학자: 남한과 북한 모두 기피한 인물) -위의 내용은 강준만교수의《한국현대사산책(1970년)》에 나옵니다. "유교국가에서 연산군같은 폭군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민주국가에서는) 절대로 박정희를 대한민국 대통령으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 (최상천-대구의 역사학자 :《알몸 박정희》의 저자) "대한민국에는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 셋이 있는데, 첫째는 오카모토 미노루, 둘째는 다카키 마사오, 셋째는 박정희이다" (장준하-광복군장교이자 김구선생의 비서) * 오카모토 미노루와 다카키 마사오와 박정희는 같은 인물입니다. -독재를 오래 하면 신화가 생긴다. 끊임없는 조작을 통해 독재자의 장점만 백성들에게 세뇌를 시키기 때문이다. 정보를 통제한 상태에서... 히틀러가 그러하고, 스탈린이 그러했고, 김일성이 그러했다. 박정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박정희의 숭배, 그것은 가짜이다. 소련에서는 백성들이 스탈린이 곰보라는 사실은 전혀 몰랐다. 언론에 나오는 사진에서 곰보의 모습을 다 지웠기 때문이었다. 박정희가 대한민국에서 경제의 기적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이필상교수는 전두환경제가 차라리 낫다고 하고, 경제학자 최용식은 박정희 때문에 경제가 발전한 것이 아니고, 박정희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발전했다라고 해야 정확하다고 했습니다. 싱가폴, 대만, 홍콩은 박정희가 없어도 우리보다 잘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까지는 북한이 우리보다 더 잘 살았다고 합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박정희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전쟁에 패한 나라를 세계를 제패할 정도의 수준으로 올렸습니다. 소련의 히틀러는 완전 3류 국가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존경의 대상이 아닙니다. *일본은 과거의 역사를 왜곡하지만 조선일보는 현재의 역사를 왜곡하는 신문이다. 이는 훨씬 더 심각한 문제이다. -민주화를 위한 전국교수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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