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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진정한신앙이라는거 말이에요
게시물ID : religion_17296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felix2013
추천 : 2
조회수 : 300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4/12/11 04:5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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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완전순결무구한 삶을 추구하는게 진짜 신앙적인 삶일까요? 아니면 인간적인 삶을 사는게 진짜 신앙적인 삶일까요?

그러니까 기독교를 예로들자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면 그건 인간의 의지대로 자신의 삶을 살라는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신의 명령을 어길수있는 우주에서 유일한 가치라는 것을 인정한다면 말이죠 (선악과)

그렇다면 신이 인간에게 생명을 준것은 죄없는 완전한 삶이 아닌 인간적인 삶을 살아도 괜찮다는 뜻이 되지 않겠어요?

그래서 성경에서도 이상적인 인간성을 지닌 인물들을 나열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다수의 인간적인 인간들을 위한 브레이크로

회개라는 장치를 주셨고 구원자라는 옵션을 주었다고 생각해요

그렇다면 인간적인게 허용이된다면 그기준이 어디까지냐에 대한 답은 십계명과 성경에서의 명령들이 답이될거에요

(신의 권위에 도전하지말라 간음하지말라 등등)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하면 비판적인 생각이 몇가지 안나오지만 '회개'라는 장치를 통해본다면 여러가지 논쟁거리가 나옵니다.

회개라는것은 죄지은자의 관점이지만 그 죄때문에 피해받은 사람의 관점은 '용서와 사랑'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7번이아니라 77번도 용서해주라는 말이 나오지 않았겠습니까?

즉 회개=용서 사랑 은 문맥상 같이 나올수밖에없는 식입니다. (뜻이 같다는게 아니라)

그런데 과연 인간이 정말 용서와 사랑을 해줄수있을까요? 인간적인 삶에서 용서와 사랑은 다시말하면 타인의 죄에 조금은 관대해져야 한다는 입장이고

이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나옵니다.

"죄인을 비난하지말라 너희 법관의 머릿속을 들여본다면 저 더러운놈을 죽여라라고 할것이다. " 뭐이런 내용의 글이 있거든요

다시말하면 예수님이 너희중 여기 이여인에게 돌을 던질수있는 사람이 누구냐 라고 말한거랑 같다는거죠

음 다시보니까 관대해져라 라기 보다 이해하라는 말같네요

그런데 그 이해라는게 .. 과연 그저 하나님을 믿는다고 이해할수 있을까요?

제주변에도 그렇고 많은 신앙인들을 보면 딜레마에 빠질떄가있어요 제3자의 죄에 대해선 관대하지만 자신이 얽혀있는 사건이라든지 구설수에는

그러지 못한다거나 혹은 겉으로는 이해해도 속으로는 굉장히 고심한다는거죠 . (증오라는 감정을 부정하려고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적인 삶을 살라 주신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증오와 분노의 감정또한 받아들이는게 맞지 않겠어요? 누군가를 충분히 미워해보지도 않은사람이 어떻게 누군가를 충분히 사랑할수있죠?

사랑이란 감정이 +100인 수치로 생각하는데 사랑이란 감정은 행복과 증오 둘다 들어있습니다.

얼핏 이해안가시고 반발하시는 분들도 계시겠지만..

진정한 사랑에는 증오라는 감정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말이죠... 진정한 사랑이라는거 그러니까 형제애, 인류애라는 입장에서 진정한 사랑이란 이 증오의 감정을 넘어서는 사랑을 일컫는거니까요

즉 증오의 감정을 넘어선다는건 증오를 무시하는게아니라 받아들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는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이 중요 포인트란거죠 



과연 회개하는 사람을 증오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용서와 사랑의 단계로 나아갈수있을까요?

단순히 교회나 성당에서 말하는 껍데기 적인 신앙을 가지고?

물론 수많은 종교인들이 신앙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저마다 존중받을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간적인 감정들을 무시한채 과연 신앙이라는 가치만을 가지고 용서가 되고 사랑이 될까요?

진정한 신앙이라는게 목사와 신부의 이야기를 듣고 실천하는게 전부일까요?:

저는 여기에 회의가 있습니다.

니체의 말처럼 네가 밟고 있는 대지를 사랑하라 라는 말이 저는 오히려 더 신을 사랑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이 가치를 빛내는건 보이지않는 하늘나라를 동경하는 순간이 아니라 신께서 만든 이땅을 신성하게 여기고 인간적인 부분을 가치있게 여기는 태도가 아닐까요

그렇다면 인간적인 감정의 부정적인 측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위선 오만 기만 자만 등등

이것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부정하는 현 태도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서양에서 가장 큰 죄라고 여겨지는 것이 기만입니다.

유다가 예수를 팔아넘겼기때문이죠 그 성경구절에 의해 기만이 가장 큰 죄로 중세시대때도 여겨졌고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오고있습니다.

(단테의 신곡을 참조하세요)

그렇기때문에 수세기동안 어쩌면 지금까지도 기만을 무조건 배척하려고합니다. 거짓말은 나쁘다 라는 태도를 가지구요

물론 거짓말은 좋은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항상 나쁜걸까요?

과연 유다의 기만이 없었더라면 구약성서의 예언은 어떻게 이루어졌을까요..

이 논리가 마치 내가 쓰레기를 버리는 이유는 환경미화원에게 할일을 주기위함이야 라는 멍청한 논리와 비슷해보일겁니다.

하지만 기만이라는 감정또한 인간의 감정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기만을 깨달았다지만 인간의 자유의지가 있기때문에 기만적인 태도를 선택하는겁니다.

누군가를 기만한다는게 무조건 나쁘다고 볼수없는것은 그 자유의지가 어떤 방향으로 사용되었느냐에 대해 논쟁이 될수있겠죠

(아 여기서 자유의지의 존재에 대해 논쟁이 있을수 있지만

뭐 인간의 의지이든 자유의지이든 무언가를 선택하는 의지를 총칭한다고 해둡시다)

그래서 서양에는 중용이란 말이 좌우 극단의 정중앙의 단계를 일컫는 말로써 이 부분을 해결하려고했고

동양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에도 중용이라는 덕목이 존재했습니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이 중용이라는 개념의 공통점은 바로 양 극단의 존재를 인정하는 태도입니다.

인정한다 함은 정신적인 인정이 아닌 경험적인 인정을 말하는겁니다.

즉 내가 저산꼭대기에 올라가본것도 아니고 산 아래 내려온것도 아닌 산속에 있다면 여기가 산 중앙인지 어딘지 어떻게 알겠는가 라는겁니다.

둘다 가봐야 그 극단을 가봐야 중도를 찾을수있다는 틀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렇게[ 비추어본다면 진정한 신앙의 삶은 누군가를 증오해보고 어떤사실에 분노해보고 누군가를 기만했지만

스스로 그 죄 (타인에게 가한고통)을 깨닫고 회개한다면 다음 이 회개한자가 해야할일은 사랑과 용서 라는 사실을 알수있습니다.

왜냐면 산 아래에 내려와봤기 때문에 이제 산정상에 올라가야하지 않습니까?

사랑과 용서라는 정상에 올랐다고해서

거기에만 머문다는것도 문제가됩니다. 과연 이 세상모든 죄악을 사랑과용서로 다 순화시킬수있을까요?

항상 +100인 상태를 추구하는게 많은 기독교인들의 착각인데요.

벼가 항상 맑은날에 자란다면 말라죽는다는 이야기와 같습니다.

그 양극단에 서본자만이 진정한 사랑과 회개를 할수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사랑하고 그것이 진정한 신앙의 목표라면

회개가 죄인의 최우선인 덕목이고 사랑이 신앙인의 최우선의 덕목이라면

회개한자가 죄인이 해야할일은 후회와 반성이아닌 사랑이고

사랑하는 신앙인이 해야할일은 용서와 이해가 아닌 회개입니다.

인간적인 삶을 살기때문에 한계가 있을수 밖에없습니다.

교황도 그누구도 죄에서 자유로울수없습니다. 그건 도스토프예스키의 생각처럼

죄인에 대한 책임은 우리모두에게 있다는 그의 생각이 이해된다면

사랑하는 사람 용서하는 사람도 회개해야하고

회개한자는 누군가를 용서해줄수있고 사랑해줄수있습니다.

 그의 덕목이 그의 죄를 덮어줄수없고 그의 죄가 그의 덕목의 가치를 지울수없습니다.

이 부분을 이해할수있다면 진정한 신앙인이 되는게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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