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형래를 딱 한번 만났다. 최소한 이 글을 쓰는 지금까지는. 10여 년 전 어느 여름날이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아직은 영화진흥공사이던 시절, 지금의 홍릉으로 이전하기 전 남산빌딩 시절이었다. 나는 모 영화의 연출부로 후반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필름을 잔뜩 들고 복도를 가는데 누군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심형래였다. 나는 순간 속으로 어! 심형래다! 했고, 3초 후에 근데 저 사람이 여긴 왜왔지? 했다. 물론 속으로.
그때 심형래 감독은 그의 영화 <티라노의 발톱>의 후반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선입견이었을까? 그는 그 건물 안에서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존재로 보였다. 어디에서든 빛이 나는 대스타였는데도 유독 거기서는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별다른 관심을 보이는 것 같지 않았고, 그건 그의 영화에 참여하고 있는 다른 스태프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오지 말아야 할 곳에 온 사람을 보는 것처럼. 나 역시도 아마 그런 감정을 가졌을 것이다. 내가 느꼈든, 느끼지 못했든. 아무도 영화인 심형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최소한 30대 이상의 성인들에게 심형래는 엄청난 포스를 지닌 코미디언이다. 개그맨이 아니라 코미디언. 한국말로는 희극연기자. 요즘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의 인기를 등에 업고 만들어진 영화가 <영구와 땡칠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여기저기서 끌어 모은 관객으로 엄청난 스코어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스코어는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았다. 아니 기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개봉관이 아닌 재개봉관에서 개봉되기도 했고, 동시관에서 개봉되기도 했고, 어린이회관에서 상영되기도 했고, 심지어 시골의 마을회관에서도 흥행수익을 올렸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관객을 만났든, 이 영화의 폭발적인 반응은 변방의 북소리가 중심을 뒤흔든 꼴이 되고 말았다.
이후 이런 유의 어린이 관객을 타깃으로 한 영화는 어김없이 금년에도 나오고 있다. 디즈니의 영화가 또 잭키 찬의 영화가 안 불러도 늘 오는 것처럼. 뭐가 다르단 말인가? 가끔씩 의아한 생각이 드는 것은 왜 사람들이 유독 심형래의 영화를 가지고 질이 높네 낮네 말들이 많은가 하는 것이다.
분명 심형래의 영화는 상업영화다. 상업영화는 더 많은 관객에게 소구되기 위해 노력한다.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상업영화들이 있다. 아니 관객들이 만날 수 있는 대부분의 영화가 상업영화다. 거기에는 황당한 코미디 영화도 있고, 선혈이 낭자한 영화도 있고, 끈적끈적한 숨소리가 가득한 영화도 있다. 근데 어쩌란 말인가? 상업영화가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분투하고 있는데. 심형래의 영화도 그 중 하나일 뿐인데. 어쩌면 상업영화를 재단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관객뿐일는지도 모른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를 거쳐 <영구와 땡칠이>로 이어진 그의 영화 이력은 유사한 작품을 여럿 거친 후에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케이블카를 타고 갈 수 있는 봉우리를 부득부득 걸어 오르는 영구 같은 짓이었으리라.
영화감독 심형래, 그것도 SF영화, 한국에서…
그 자체가 너무도 생뚱맞아서, 도대체가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리도 말들이 많았던 것일까? 그러나 그는 차근차근 자신의 목표를 향해갔다. 몇 번의 수련을 거치고, <티라노의 발톱>으로 방점을 찍고, <용가리>로 출사표를 던지고야 말았다. 결과는 참담했다. 어떤 쪽으로 보든.
감독에게 있어서 지난 영화의 평가가 지금의 영화에 얼마나 영향을 줄까? 상당하고도 심상치 않은 영향을 주리라. 그러나 우리는 또, 전작의 실패를 딛고 괄목상대할 성과를 보여준 경우도 번번이 보아오지 않았던가? 작품으로든, 흥행으로든. 누가 감독이든, 그 사람의 전작이 어떻던, 지금의 영화는 지금의 영화로, <디 워>는 <디 워>로만 평가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얼마 전 누군가와 만나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디워>는 심형래 감독의 전작과는 비교가 안 될 성과를 거둘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하긴 전작들이 워낙 안됐으니.” 내가 말했다. “그도 그렇지.” 내가 또 말했다. “한 가지 믿을만한 구석이 있다. 그건 심형래의 영화가 아니라 심형래에 대한 선입견이 상당부분 사라졌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주관객이 더 이상 심형래라는 이름에 영구를 그다지 적극적으로 덧씌우지 않기 때문이다. 30대 이상의 세대들에게는 영구가 영화감독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는 반면, 10대나 20대에게는 과거에 코미디언으로 이름을 날린 영화감독으로 인식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랬다. “그러든지 말든지.”
내가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를 처음 본 건 10여 년 전 어느 가을날이었다. 어떤 선배 감독님이 내가 정말 좋아할 거라면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건네주었다. 나는 혹시? 그럼?? 하는 마음으로 집에서 마음 졸이며 비디오 플레이어에 테이프를 걸었다. 혹시라도 그런 영화는 아니었다. 냉소적 유머와 잔혹한 폭력으로 점철된 갱스터영화였다.
얼마 후 선배감독님이 물었다. “그 영화 어떻디?” 나는 말했다. “잘 만든 B급영화던데요.” 선배감독님이 말했다. “그래? B급영화라고…”
그 이후 지금까지 더 이상 우리는 그 영화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없다. 그 영화가 <소나티네>다. <소나티네>는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몇 편중의 한편으로 남아있다. 왜 나는 선배감독님의 질문에 잘 만든 ‘B급’ 영화더라고 답했을까? 정말 그 영화가 그래서 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그때는 안목이 없어서 이었을까? 아니면… 이름도 모르는 일본감독이 만든 야쿠자영화가 너무나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일까?
지난해 <로보트 태권 V> 복원판 개봉이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영화는 디지털 작업으로 복원되어 영화제에서도 상영이 되었고, 극장 개봉에서도 올드팬들을 끌어 모으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한동안 <로보트태권 V>에 대한 칭송이 자자했다. 만약, 지금에 와서 그 영화의 크레이티브한 측면이나 작품성을 논한다면 그건 과연 온당한 일일까? 아니, 무슨 의미라도 있는 일일까? <로보트 태권 V>는 그 시절에 그런 영화를 만들어냈다는 데 의미가 있는 것이고, 또한 나를 포함한 그 당시의 많은 관객이 그 영화에 열광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복원판의 개봉 또한 거기에 중요한 의미를 두고 있을 것이다. 심형래 감독의 영화도 그와 다르지 않다고 본다. 좋건 나쁘건, 인정을 하건 말건, 한국영화의 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가야할 길을 지금 그가 가고 있는 것이다.
뤼미에르가 꿈꾼 것은 무엇이고, 채플린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말 안장장사를 하던 어떤 미국인은 왜 갑자기 영화산업에 뛰어들었을까? 그들도 영화만큼이나 멋진 인생을 바라고, 또 그것을 관객에게 보여주고자 했을 것이다. 한국영화도, 그 안에 있는 심형래의 영화도 그럴 것이다. 영화의, 더욱이나 상업영화의 가치를 판단하는 것은 만들어진 이후에는 관객의 몫이다. 그것이 상업영화의 운명이다. 결국에는 관객이 판단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내내 머리를 맴도는 대사가 있다. <포세이돈 어드벤처>에서 진 해크먼이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