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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게 보는 조무령왕과 호복기사 이야기
게시물ID : history_17298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Orca
추천 : 6
조회수 : 3667회
댓글수 : 2개
등록시간 : 2014/07/24 23:53:54

훗날 무령왕(武霊王)이라고 불리는 조숙후의 아들 옹(雍)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조나라 역사상 최고의 명군이자 동시에 중원 국가들 중 최초로 호복기사라는 이름으로 기병이라는 군종을 공식적으로 창설한 왕이었습니다.

 

 

무령왕이 왕위에 올랐을 때에는 그의 나이가 어려 박식한 관리 세 사람과 사과(司過 : 군주의 과실을 사찰하는 업무를 맡은 관리) 세 사람이 보좌하였습니다. 그리고 선왕인 조숙후 시절부터 현신으로 이름난 비의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정무를 잘 돌보았습니다.

 

 

무령왕은 허례허식보다는 실속을 중시하는 성격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무령왕 8년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이 때 중원의 여러 강국들은 서로 경쟁하듯 왕호를 칭하였습니다. 이런 다른 나라의 움직임에 무령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실질적인 알맹이도 없으면서 어찌 허황된 명분에 안주하겠는가?

 

 

그러고서는 그는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자신을 ‘군(君)’이라고 칭하라 했습니다. 이후 조나라가 왕호를 칭하게 된 것은 그의 아들인 혜문왕 때 일이었습니다. 이런 실속을 중시하는 무령왕의 성격은 이후 그가 대소신료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호복기사를 도입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무령왕은 조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하여 많은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때 그의 눈에 띈 것은 바로 조나라 북쪽의 유목민 집단들이었습니다. 본래 조나라는 진(晉 : 춘추시대 2대 패공인 진문공의 나라)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였습니다. 진나라는 예로부터 주변의 적족 등 북쪽의 유목민 집단들을 회유하거나 토벌하면서 싫으나 좋으나 그들과 끊임없이 접촉하였고, 이는 진나라에서 갈라져 나온 조나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조나라 군주들 중 이들을 이용하기는 했지만, 이들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에 대해 고찰해본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령왕은 이전의 조나라 군주들과는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무령왕은 그들의 저력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의 저력이 기병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이 주력으로 삼는 기병의 빠른 기동력과 파괴력 그리고 지형에 제한을 받는 병차와 달리 제한을 받지 않는 범용성에 무령왕은 크게 주목하고 본격적으로 기병대를 창설하기로 합니다. 또한 그의 생각은 거기에서 그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기병을 다루는 데에는 전통 복장보다는 그들의 호복이 편하다는 것을 파악하고 그들의 모든 장점을 끌어와 자신의 군대에 심기로 결심합니다.

 

 

19년 정월 봄, 무령왕은 중산국의 영토를 공략하고, 방자 지역에 이르러 대 땅으로 나아가고 그 다음에는 황하 근처의 황화산에 이르는 긴 여정을 행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그는 누완을 불러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 합니다.

 

 

“ (중략) 강력한 병력의 보호가 없어 이러다가는 사직이 망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하였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니, 나는 호복을 입고자 한다.”

 

 

누완은 왕의 말에 찬성하였습니다. 이윽고 자신의 생각을 대소신료들에게도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대소신료들의 반응은 역시나 반대였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바로 오랑캐의 풍속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소신료들의 강력한 반발에 무령왕은 스승인 비의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 (중략) 내가 호복을 입고자 하는 것은 적을 약하게 하여 힘은 적게 들이고 공을 많이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있으니, 백성들을 고달프게 하지 않고서도 순리적으로 간자(조간자)와 양자(조양자) 두 선왕의 업적을 계승할 수 있을 것이오. 무릇 세상에서 뛰어난 업적을 이루려면 세상의 습속을 위배하였다는 책망을 받기 마련이오. 이제 나는 앞으로 백성들에게 호복의 착용과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가르치려고 하는데, 세상에서는 틀림없이 과인에 대하여 의론이 분분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소?”

 

 

무령왕의 말에 비의가 대답하였습니다.

 

 

“신이 듣기에 일을 하려고 할 때 머뭇거리면 성공하지 못하고 행동할 때 주저하면 명예를 얻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왕께서 기왕 세상의 습속을 위배하였다는 비난을 감수하시려고 결심하셨으니 세상 사람들의 의론은 생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무릇 최고의 덕행을 추구하는 자는 세속적인 것에 부화뇌동하지 않으며, 큰 공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는 범부와 모의하지 않는 법입니다. (중략) 어리석은 자는 일이 이미 성사된 뒤에도 그 연유를 모르지만 현명한 자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전에 파악할 수 있는 것이거늘 왕께서는 무엇을 주저하고 계십니까?”

 

 

비의의 강력한 지지에 자신감을 얻은 무령왕이 말했습니다.

 

 

“ (중략) 세상에서 나를 따르는 자가 호복의 효능을 이루 다 짐작할 수가 없을 것이니, 설사 세상 사람들이 이 일로 나를 비웃는다고 할지라도 오랑캐 땅과 중산국은 내가 꼭 차지할 것이오.”

 

 

그러며 무령왕이 자신이 먼저 호복을 입었습니다. 무령왕은 자신의 숙부인 공자 성을 설득시키기로 합니다. 하지만 공자 성은 당시 몸이 좋지 않아 조정에 나갈 수가 없어서 무령왕은 왕설을 보내 그를 설득시키기로 합니다. 공자 성을 만난 왕설은 무령왕의 뜻을 그대로 전합니다. 왕설의 말을 들은 공자 성은 이렇게 말하며 무령왕의 뜻을 재고하기를 청했습니다.

 

 

“ (중략) 신이 듣건데 중국은 총명하고 예지 있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고, 만물과 재화가 모이는 곳이며, 성현이 교화를 행한 곳이고, 인의가 베풀어진 곳이며 시, 서와 예악이 쓰이는 것이고, 특이하고 우수한 기능이 시험되는 곳이며, 먼 곳의 사람들이 관람하러 오는 곳이고, 만이가 모범으로 삼는 곳이라고 합니다. 지금 왕께서는 이를 버리시고 먼 나라의 복장을 입으시니 이것은 고대의 교화를 개변함이요. 고대의 도를 바꿈이며, 민심을 거스르는 것이고, 학자의 가르침을 저버리는 것이며, 중국의 풍속과 동떨어진 것이니, 신은 왕께서 이 일을 신중히 고려하시기를 바랍니다.”

 

 

왕설은 공자 성의 말을 그대로 무령왕에게 전했습니다. 무령왕은 친히 공자 성의 집을 찾아가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 자리에서 무령왕은 그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무릇 의복이란 입기에 편리하기 위한 것이고 예의란 일을 도모하는 데 편리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인은 지방의 풍속을 관찰하여 그에 적합하게 행동하고,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서 예의를 제정하니 이는 백성에게 이익을 가져다주고 국가를 부강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중략) ”

 

 

실속을 중시하는 무령왕의 성격이 그대로 나타나는 말이었습니다. 무령왕의 말에 공자 성은 재배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무령왕의 뜻을 따르기로 하고, 다음날 호복을 입고 조회에 나갔습니다. 비의와 공자 성의 지지를 받은 무령왕은 호복을 입으라는 명령을 공포하였습니다. 대다수 신하들이 이를 따랐지만 조문, 조조, 주소, 조준은 옛날 것이 편하다고 말하며 호복 입는 것을 중지해달라고 간언하였습니다. 이에 무령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선왕들의 풍속이 같지 않은데 어떤 옛 방식을 본받을 것인가? 제왕들이 서로 답습하지 않는데 어떤 예법을 따를 것인가? (중략) 삼왕(三王)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법규를 제정하였으며 실제 상황에 따라 예법을 규정하였소. 법령과 제도가 각각 실제 필요에 부합되었고, 의복과 기계는 각각 그 쓰임에 편리하였소. 그러므로 예법 또한 꼭 한 가지 방식일 필요가 없고 국가의 편의를 추구하는 데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할 필요는 없소. (중략) 옛 속담에 ‘책 속의 지식으로 말을 모는 자는 말의 속성을 다 이해할 수 없고, 옛날 법도로 지금을 다스리는 자는 사리의 변화에 통달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옛날 법도만을 따라가지고는 세속을 초월하기 어렵고, 옛날 학문만을 본받아가지고는 지금을 다스리기 어려운 것이오. (중략)”

 

 

무령왕의 강력한 의지에 조문, 조조, 주소, 조준도 명령을 따르기로 합니다. 마침내 무령왕은 호복을 보급하고 기병들과 사수를 모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일명 ‘호복기사(胡服騎射)’의 탄생이자 중원 역사상 처음으로 기병이 전장의 주력으로 공식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후 무령왕의 행보는 정복 또 정복이었습니다.

 

 

다음 해인 무령왕 20년에 새롭게 일신한 조나라 군대는 중산국과 호 땅을 공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령왕 21년에는 다시 중산국을 공격하였습니다. 조나라의 군대는 중산국의 수많은 성읍을 점령하였고, 이에 놀란 중산국은 성읍 4개를 바치며 조나라와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23년 조나라는 다시 중산국을 공격하고, 26년에 또 다시 중산국을 공격하였습니다. 20년부터 26년에 이르는 정복활동으로 조나라는 북쪽으로는 그 국경에 연나라와 대 땅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운중과 구원에 이를 정도로 성장하였습니다. 북쪽의 조나라가 순식간에 전국시대의 강대국으로 떠오른 것이었습니다.

 

 

※ 무령왕이나 비의의 말은 사기 조세가에서 핵심적인 내용만 옮겨왔습니다. 두서없고 재미없는 짧은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출처 : 사기 조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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