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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인한 김에 또 써봅니다. 에브리바디스 파인이라는 영화를 볼 계획이 있으신 분은 절대 보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글을 잘 쓴다면 스포를 안하고도 쓸 수 있겠지만 능력부족으로 엄청나게 스포가 되어 있습니다.
타인은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타인의 타자성에 주목하며 타인을 지옥이라고 하였습니다. 굳이 사르트르가 아니더라도 타인과의 마주침은 상당한 스트레스를 동반합니다. 타자의 예측 불가능성, 나와는 다른 이질성 때문에 타자와의 마주침은 고통을 수반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죠. 하지만 사르트르를 포함한 거의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타인과 마주치고 소통하라고 합니다. 결국 자아라는 것은 본질적인 자아가 있다기 보다는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므로 궁극의 행복을 위해, 변화를 위해서는 타자와의 마주침은 숙명과도 같을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에브리바디스 파인은 아주 잘 만들어진 철학 영화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타자와의 마주침, 소통과 관련된 영화입니다. 주인공 프랭크는 아내가 사망하고 혼자 살아갑니다. 네 자녀들은 타지에서 자신의 삶을 일궈가죠. 그러다 자녀들이 프랭크에게 오기로 한 날 모두 '우연한?' 이유로 약속을 취소하고 프랭크만 혼자 남습니다. 그래서 프랭크는 전선코팅공장에서 수십년 일하면서 망가진 폐에도 불구하고 기차와 버스를 타고 자녀들을 깜짝 방문하기로 합니다. 가는 길에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기도 하고 자녀들 자랑을 합니다. 첫째는 예술가, 둘째는 광고회사 ceo, 셋째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넷째는 발레리나입니다. 하지만 만남이 순탄치 않습니다. 첫째는 집에 없어서 만나지 못하고 기다리고 전화해도 답이 없어서 편지만 문틈으로 넣고 돌아섭니다. 둘째는 만나지만 뭔가 어색하고 바쁘다는 이유로 빨리 집으로 가시라고 합니다. 광고회사 ceo이긴 하지만 아버지 몰래 남편과 이혼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죠. 셋째는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아니라 타악기 연주자였습니다. 그리고 담배를 피우고 있지도 않은 출장을 핑계대며 바로 가라고 합니다. 막내는 다행히도 성공한 삶을 사는 것 같습니다. 리무진으로 아버지를 픽업하고 엄청 멋진 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집은 친구집을 하루 빌린 것이고 친구가 봐달라고 하는 아이도 딸의 혼외 자식이었습니다. 에브리바디스 파인이라는 제목이 역설적이네요. 첫째도 결국 멕시코에서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나머지 형제들도 첫째의 사망을 수습하느라 아버지를 만날 여유가 없었던 거죠. 폐가 망가져서 비행기를 타면 안되는 프랭크는 막내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비행기를 탑니다. 거의 죽을 뻔하다가 회복되고 나서야 병원에서 세 자녀를 같이 만나고 첫째의 사망 소식을 듣습니다.
이 영화는 거의 모든 장면이 상징과 타자와 마주치라는 메세지를 던져줍니다.
첫번째 장면, 프랭크가 일하던 전선 코팅 공장은 전화선을 만드는 곳입니다. 프랭크는 일생을 사람들이 타인과 소통하게 하는 전화선을 만들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녀들과의 소통에 실패한 역설을 보여 줍니다.
두번째 장면, 모든 자녀를 처음 만나는 장면은 5~7세 정도의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프랭크에게 보입니다. 프랭크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자녀늘 보는 것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프랭크에게는 그 어린시절 이후로 성인이 되어가는 모든 장면을 놓쳤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프랭크는 자녀들의 사진을 기회가 나면 계속 찍어댑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간직하고 싶은 소망이겠죠. 사람은 항상 변합니다. 그런 변화를 알아채기 위해서는 항상 관심을 갖고 눈여겨 봐야 합니다. 하지만 타인을 불변하는 본질로 본다면 그런 변화는 보이지 않고 자기가 가장 좋아했던 모습으로 보게 됩니다.
세번째 장면, 둘째는 아버지에게 이동하면서 시계의 시간을 맞추라고 조언합니다. 미국은 표준시가 달라서 시차가 발생하므로 해당 지역 시간에 맞춰야하는데 프랭크는 바꾸지 않다가 시간을 잘못봐서 차를 놓치게 됩니다. 타자와의 마주침과 소통은 자신이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나를 버리고 나를 타자에게 던져야 하는데 프랭크는 고집스럽게도 시간을 변경하지 않다가 낭패를 보게 됩니다. 타인은 나를 변하게 하고 나는 타인을 변하게 합니다. 나를 고집하고 변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소통이 이루어 질 수 없죠. 예를 들어 결혼이라는 마주침은 혼자 살 때와 엄청 다른 변화를 요구합니다. 그러한 요구를 무시하면 파경을 맞기 쉽겠죠. 취직을 하더라도 다른 직장 동료와 마주치면서 나는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취직을 함으로써 다른 동료들도 약간은 변할 것입니다.
네번째 장면, 차를 놓치고 기차를 타러 가는 프랭크는 길에 누워있는 젊은 노숙자에게 돈을 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프랭크의 돈을 본 노숙자는 프랭크를 공격하고 다행히도 프랭크는 돈을 뺏기지 않았지만 반드시 먹어야 하는 약을 잃게 됩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은 항상 위험을 동반하고 타인은 예측하기 힘듭니다. 아무래도 타자와의 마주침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듯 합니다. 어쨌든 그 노숙자와의 만남도 프랭크가 그냥 지나갔으면 없었겠지만 관심을 갖고 손을 내밀어서 발생하고 그로인해 프랭크의 여행 일정이 촉박해집니다. 하지만 다른 마주침. 막내딸과의 만남을 위해 여행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다섯번째 장면, 프랭크는 첫째 집 아래에 있는 갤러리에서 첫째의 그림을 팔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첫째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첫째의 그림을 갖고 싶어서 그 갤러리로 가서 그림을 구합니다. 그 그림은 전봇대에 걸쳐있는 전선(전화선?) 그림입니다. 평생을 전선을 만들었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고 아버지와의 소통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할 것입니다.
프랭크는 자식을 너무나 사랑했고, 사실 자식들이 잘나가는 성공한 사람이라 사랑했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자식과의 소통에 실패하고, 자식들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모습을 놓침으로써 자식들의 본래면목을 보고 사랑했던 마음이 자식들의 스펙으로 쏠리게 됐습니다. 자식이 이혼을 했건, 마약을 하건, 실패한 무용수이건, 타악기 연주자건 중요한 것은 자식이라는 사실이었고,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식들은 완벽하지 않은 모습을 아버지에게 보일 수 없었고, 아버지는 자식들의 허상만 보고 사랑했던 겁니다.
이 영화는 왜 우리가 어렵고 힘들고 위험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타자와 만나고 소통을 해야하는지에 대하여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