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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약간 있음) 영화 '윤희에게' 기억은 집착인가 소소한 행복인가?
게시물ID : phil_1733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민방위특급전사
추천 : 1
조회수 : 781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21/02/17 12: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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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있어서 기억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철학적인 입장에서 기억이 갖는 의미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이하였습니다. 근대 서양철학까지는 기억이 진리로 다가갈 수 있는 열쇠로 받아들여졌고 인간의 본질에 가깝다고 여겨졌습니다. 플라톤은 사람이 태어나면서 이데아의 세계에 대한 기억을 잊어서 이데아를 현상을 통해 볼 수 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철학이란 잊었던 기억을 되살리면서 이데아를 다시 실현시키는 작업이라고 생각했죠. 상기론(anamnesis)이 기억상실을 뜻하는 amnesis에 부정접두어 an이 합쳐진 말이며 진리를 뜻하는 말 altheia 역시 인간이 태어나면서 지나는 '망각의 강 레테'에 부정접두어 a가 붙은 단어입니다. 레테의 강을 거슬러 올라 기억을 찾는 것이 진리를 구하는 길이라는 것이죠. 기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조는 기억에 의존한 자기동일성을 추구한 피히테에 이르러 정점을 찍게 됩니다. 모든 학문의 기본은 나=나 라는 자기동일성의 전제에서 시작되며 자기동일성은 기억에 의존하는 것이니까요.

 

서양 고대에서 근대철학에 이르기까지 기억이 긍정적이며 진리에 이르는 것으로 여겨졌다면 서양 근대 이후의 철학과 동양철학은 기억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바라보지는 않습니다. 실존주의 철학의 시작을 알린 니체는 망각의 힘에 집중합니다.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수 없다. 이런 저지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있다. …  이런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  약속하는 인간이 그렇게 행동하듯이, 결국 그러한 방식으로 스스로의 미래를 보증할 수 있기 위해서, 인간 자신은 우선 스스로 자기 자신의 관념에 대해서조차도 예측할 수 있고 규칙적이며  필연적인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니체, 도덕의 계보
 
굳이 니체가 아니더라도 존재의 자유를 꿈꾸고, 타자와의 마주침과 어울림을 긍정하는 철학에서는 기억이 하나의 장애물로 보일 수 있겠죠. 나라는 인칭성을 극복하지 않고는 과거의 나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나를 버리지 않고는 타자에게 나를 던질 수 없기 때문이겠죠.
 
뿐만 아니라 불교철학에서는 기억을 고통을 주는 것으로 여깁니다. 기억은 집착을 부르고 집착은 고통을 만드니까요. 나가르주나의 중관불교와 함께 대승불교의 양대 산맥인 바수반두의 유식불교에서는 인간의 의식을 8식이라고 불리는 층위로 구성되어있다고 합니다. 그 중 마지막 8식 알라야식은 인간의 무의식에 해당하는 것으로 우리의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기억입니다. 알라야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들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 마음에 각인된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생선가게에 들렀던 사람 몸에서 비린내가 나듯, 삶속에서 나도 모르게 몸과 마음에 베어있는 의식을 말합니다. 그 알라야식을 극복하는 것이 성불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꼽죠.
 
기억이 집착을 부르고 고통을 준다는 것은 단지 불교에서만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베르그송은 무, 없음은 있다는 것보다 더 많은 의미를 갖는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책상위에 연필이 있는데 연필을 치우고 옆에 있는 사람에게 연필이 있던 자리를 가리키며 여기 뭐가 있냐고 하면 아무것도 없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뒤늦게 들어온 사람에게 마찬가지로 뭐가 있냐고 하면 책상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없어졌다고 느끼는 것은 그 존재가 있었던 기억 때문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우리가 음식점에 휴대폰을 두고 간 상황을 생각해 봅시다. 다시 돌아가서 식사했던 자리에 휴대폰이 있는지 확인해 봤는데 없다면 엄청 좌절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휴대폰이 없다고 해서 다른 손님이 봤을 때는 아무런 느낌이 없습니다. 내가 좌절할 것은 휴대폰이 거기에 있었던 기억과 다시 돌아갔을 때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죠. 과거에 대한 기억과 미래에 대한 기대가 좌절이라는 고통을 만든 것이죠.
 
기억이 근본적으로 고통을 부를 수 있고, 타자와의 마주침에 장애가 된다는 주장은 현대철학과 불교철학에서만의 주장은 아닙니다. 장자도 허, 망의 가치를 긍정해 왔으며 공자 역시 망각의 가치를 긍정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인생이 항상 철학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는 한가지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체가 각각의 다른 상황을 겪기 때문이겠죠. 영화 윤희에게에 나오는 세명의 여자에게 기억은 무슨 가치가 있었을까요? 윤희와 쥰, 쥰의 고모인 마사코 세 여자는 녹록치 않은 삶을 삽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삶은 기쁨과 행복보다는 고통과 슬픔이 더 많습니다. 세명의 고통과 슬픔은 각각 미묘하게 근본적인 원인은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모두 외롭기 때문입니다. 윤희와 쥰은 한국과 일본이라는 보수적인 사회에서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자신을 내보이지 못하는 고통으로 외롭고, 마사코는 늙은 독신여자라서 외롭습니다. 하지만 이 상황은 그 세 여자의 특수성으로 인한 고통은 아닙니다. 세상을 사는 모두가 각자의 특수한 고통을 안고 사는 것이니까요. 그 세명의 여자는 녹록치 않은 삶이지만 그 삶을 지속시켜주고 때로는 삶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 바로 그리움이라는 기억입니다. 쥰과 윤희는 서로에 대한 기억이, 마사코는 젊은 시절 몇개월간 겪었던 사랑의 기억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힘이 되어 줍니다.
 
우리의 기억이 집착이 되어 고통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삶의 원동력이 되는가. 그 둘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은 현재 사는 일상을 긍정하느냐 아니면 도피하려 하느냐의 차이일 것입니다. 윤희, 쥰, 마사코 모두 고통의 삶이지만 그 안에서 소소한 기쁨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며 힘들 때 기억을 되살리며 힘을 얻는 것이지 과거의 기억에 매몰되어 삶에서 도피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죠. 과거에 대한 추억이 절정을 이루고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는 와중에도 반복적으로 나오는 대사가 있습니다. "눈은 언제쯤 그치려나?" 그렇습니다. 한차례 폭풍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에서도 다시금 일상으로 돌아갈 봄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언제쯤 눈이 그치려나?" 라는 대사는 단지 봄을 염원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아닌듯 합니다. "언제쯤 봄이 오려나"가 아닌 "언제쯤 눈이 그치려나"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눈은 지저분하고 고통스러운 세상을 덮어버리는 김수영의 눈이나 아련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열병을 겪고 과거의 기억을 긍정하며 마무리하고 다시 새로운 희망을 염원하는 영화 러브레터에 나온 눈과 같은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눈은 과거의 아름다운 기억을 덮어버리는 현실의 삶의 고통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현실의 고통을 도피할 수는 없습니다. 단지 멈추기를 기다릴 뿐이죠. 드디어 눈이 멈추고 새로운 봄이 오면 다시 다가올 일상에 대한 희망을 꿈꾸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윤희의 딸 이름부터 새봄인 것이죠.
 
새로운 일상과 새로운 희망은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발생하게 될 것입니다. 타자와의 소통을 통해 새로운 일상이 만들어지는 것이지 나 혼자만으로 새로운 일상이 오지는 않으니까요. 타자와의 소통에 대한 의지가 이 영화에서는 특이하게 담배로 표현됩니다. 윤희는 딸에 대한 관심과 소통의 의지를 담배를 통해 내보입니다. 새봄의 남자친구 역시 새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자신은 하지도 못하는 담배를 시도하면서 보여주죠.
 
한차례 폭풍같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지나면서 한층 성숙해진 삶의 주체로 다시 태어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가장 크게 다가온 것은 기억에 대한 현대 철학의 입장과 상반된 그리움이라는 기억의 순작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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