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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바쁘던 20대초에 여자친구를 처음 만났다. 걸음걸이와 소소하게 웃는게 이쁜 친구였고
남을 아낄줄 아는 따듯한 마음도 있었다. 단점이라고 하면 남들에게 민감한 만큼 거절을 쉽게 하지 못했지만
그러한건 내게 큰 단점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름 줏대와 고집도 있고 사리분간도 할 줄 알았으니까. 아니 그렇게 믿었으니까.
게다가 명문대생인 만큼 큰일이 생겨봐야 뭐가 그렇게 큰일일까 싶었다.
다단계 같은거라도 들어간다면, 내가 빚을 내서라도.
아버님과 같이 다단계 칠판에 빠루를 박아넣는 한이 있더라도 빼올 수 있다 믿었다.
그만큼 사랑했고. 또 그 무렵, 멍청한 나는 사랑을 믿었다.
또 20대가 가질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자신감도 함께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일이 한참 바쁘던 여름날, 3~4시간 자는 잠을 아껴가며
서로 통화를 이어갈때, 여자친구는 보고싶다는 말과함께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그럴때마다 우린 할 수 있다고 서로 다독이며 드라마속 주인공같은 대사를 주고받곤 했다.
그래도, 드라마 조명이 우리를 빚추는것처럼 내입에서 나오는 부끄러운 대사와 진심들이 마냥 신기했다.
여자친구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의 장녀였지만 현재는 무교인 상태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가
내게 하고싶은 일이 생겼다고 내게 고백했다. 학교 앞을 지나다가 심리상담을 받게 됬는데 그게
공부를 하면서 진행한다는 이야기였다.
예전에 그녀가 심적으로 힘들때 상담을 받고 안정을 취했었단 말을 들은적있기에, 또 어찌보면
자존감이 부족하고 의존적으로 보이는 그녀에게, 나는 흔쾌히 해보라고 했다.
다만 거슬리는건 상담이 종교색을 띄며 국내에서 처음으로
시도되는 상담이기에, 가족이나 주변에게 알리면 안됀다고 했다는것.
그런대도 그녀는 내게 이야기해주며 그날 겪은 하루를 함께했다.
그 단체가 신천지라는 사실은 그날부터 얼마지나지 않아서다.
나는 그날. 그때에. 세상에 대해 관심이 좀더 많았어야 했다.
내 자신감을 조금 집어넣고, 겸손하고, 궁금했어야 했다.
시간이 너무 지났고. 그녀가 몸 담고 있는 곳이 신천지라는걸 그녀가 깨달았을때
나는 아차 싶었지만. 그럼에도 내게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그녀를 신뢰했다.
그날부터 신천지에 대한 정보를 미친듯이 긁어 모았다.
포교수법, 센터수료, 신학교과정, 20대초 사회 초년생 주, 12지파, 14만 4천명.
세상에 이런게 있었나 싶었다. 알면 알 수록 뿌리깊게 내려있는
그 치밀함과 정교함에 솔직한 마음으론 잠시 상황을 잊고 감탄까지했다.
이 정도면 대기업이 필요없겠다 싶었다. 내가 20대에 처음 본 사회에
깔려있는 가장 더러운 종류의 거짓말이였다.
나는 그때. 짧은 공부를 마치고나서, 설득을 포기했다.
신천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면 알 수록 내가 자신있어 하던 정보나 언변의 문제가 아니였다.
신뢰의 문제고 신앙의 문제였다. 나는 그녀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우리가 사귀면서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 서로를 맹목적으로 믿어줘야 할 때가 있을꺼라고.
그 일이 일찍 찾아온거 같다고. 사귄지 200일 남짓. 보고 있어도 보고싶던 때였다.
당연히 그녀가 나를 선택할 거란 자신감도 있었기에, 바들바들 떨리는 불안감 사이에서 나는 입을땠다.
그녀는 시간을 달라고 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가 선택을 망설인다는 그것 자체로.
하지만 그녀가 내가 좋다고 이야기 했을때.
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눈물이 마구 흘러나왔다. 원래 울음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지만,
안도감이였을까 고마움이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우리 관계의 견고함이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많은 장애물중 하나를 쉽게 걷어냈다는 착각에 감사했었다.
그리고는 믿었다. 지나가는 말로, 더 나오라는 이야기 없어? 응 없어.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여자친구를 추궁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지금와서 돌이켜보면 난 그녀를 몰랐던거같다.
그녀의 두려움. 불안감. 그리고 나도 나를 몰랐었다. 바보같은 자신감. 병신같은 새끼
그녀가 그랬다고 하면 나는 그런걸로 받아들였다.
나는 바보처럼 맑게 비치는 시냇물같은 사랑을 믿었다.
내가 그 마음을 확인해 보자고 손을 집어넣으면 그 시냇물은 물먼지가 피어오를꺼라 믿었다.
믿음은 의심하지 않아야 가장 투명한거라고.
그때 신천지는 내게 답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20만명을 모았다고.
투명한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 사람을. 착하지만 악한 사람을.
그 이후로 8개월을 병신처럼 보냈을때 그녀가 내게 고백했다.
지금은 헤어지지만 그날이 오면 꼭 당신을 설득하겠다고. 당신을 살리겠다고.
안쪽부터 무언가 조용히 무너져내리는 듯한 느낌이였다.
망치로 맞은듯한게 아니라. 그녀에 입에서 나오는 모든 언어들이 비현실적이게 느껴졌다.
그 날을 기억해보면 그녀에 입에서 나오는 언어보다, 그녀 등뒤로 찌르르 울리던 풀벌래 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가족보다 소중하다. 관계. 그럼에도. 너에게 감사. 이별. 열매. 미안해. 힘들었지만. 이젠 안다.
확인되고 검증된. 주변엔 알리지 말아달라. 보았다 CBS. 거짓말 투성이.
신천지 신천지 신천지... 조용히 이야기해줘..남들한테 들리잖아.
그렇게 우린 헤어졌다. 나는 그녀를 말릴 명분이 없었다. 자석같이 가까웠지만. 인생을 다 주기로 마음먹었었지만.
그녀는 그곳에서 옳았다. 불신은 죄악이며, 나는 이미 모든것을 알아버린 그녀에겐 가여운 존재였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다. 폭력을 쓰고 싶었다. 주변에게 모든 사람에게 알리고, 끝의 끝으로 가고 싶은 악의가 차올랐다.
이런 불의를 민주주의란 이름아래에 남겨놓는 사회가 미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미웠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런 힘도 쓸수 없었다. 이제는 무었이 옳은지도 모를것같았다.
내가 옳다고 그녀를 강제한다면 그 또한 나도 무엇인가 절대적인걸 믿고 폭력을 휘두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가 나는 이제 고통이라고 남이 되어달라고 강요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선택지는 우리가 다른 길을 걷는것 뿐.
먼지가 되어버릴것 같은 무력감만이 남았다.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