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7.15~1669.10.4) 의 야경에 대하여 알아보자 17세기 네덜란드는 렘브란트의 시대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유럽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미술사에서 가장 극적인 빛과 그림자의 극명한 대비를 통해 신비감 넘치는 화면을 넘치는 그의 화풍은 정말이지 감탄사가 나올 수 밖에 없는 일이다. 빛과 그림자의 마법사 렘브란트는 그 별명과 같은 삶을 살았는...데 이 야경은 그 인생에 대표적인 작품이자 그를 몰락의 길로 떨어뜨리는 작품 이기도 하다.
1632년 암스테르담 의사조합으로부터 위촉받은 (툴레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의 호평을 계기로 암스테르담에 정착 하였다. 그는 암스테르담에서 첫째 가는 초상화가로서 명성을 얻어 28세에 지방 도시의 시장이자 판사의 딸인 사스키아 판 오이렌부르흐 와 결혼하고 넒은 아틀리에와 대저택을 구입해 여러 미술품 그리고 골동품을 사서 장식 할 정도로 호화스러운 삶을 누렸다. 그야 말로 빛과 같은 삶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얼마 뒤 연이어 태어난 아이들 중 4째를 제외한 전부가 죽고 만다. 36세에는 부인과 사별하게 된다. 이런 불상사가 계속해서 일어 날 때쯤 단체 초상화 하나를 주문 받는데 이 작품이 바로 [야경] (프란스 반닝 코크 대장의 민방위대, The Militia Company of Captain Frans Banning)이다.
이 당시 단체 초상화는 많은 사람을 똑 같은 크기로 빽빽하고 경직되게 그리는 것이 일반 이였으나 렘브란트는 이런 고전적인 형식을 깨고 파격적인 작품을 그렸다. 정교한 묘사보다는 대담한 붓놀림과 어두운 배경에 나타나는 그림자를 명확히 표현 하고자 했다. 돈을 지불하고 그린 단체 초상화 에서 자신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만 (그림에서 보이듯 중심인물을 제외하곤 잘 알아보기 힘들다.) 그렇지 않은 이 작품에 사람들은 혹평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초상화가로써의 렘브란트의 생명은 끊기고 말았다. 물론 렘브란트의 작품은 이 이후에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줬지만 야경으로 잃은 그의 명예는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1669년 암스테르담 에서 영원한 그림자가 되어 버린다.
그림의 속의 음모 때문일까? 아니면 렘브란트 그 자신의 그림에 대한 저주일까?이 작품은 3번의 테러를 당하게 된다. 1715년 시청사의 그림을 전시하기 위해 옮기던 중 그림이 너무 크다며 좌우 그리고 대장의 발 밑을 잘라내는 일이 있었는가 하면 1975년 정신 병자에 의해 조각칼로 12조각이나 나는 일을 겪기도 했다. 1990년에는 무직의 범인이 그림에 황산을 끼얹기도 하였다.
가장 본인에게 큰 고통을 준 그림이었지만 훗 날 그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작품인 [야경] 그의 별명과 이렇게 똑 같은 작품이 또 있을까? 필자는 생각하게 된다. 지금은 암스테르담 국립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편 한편 연재해 볼까 합니다. 글제주가 없고 오타 맞춤법이 많이 틀리더라도 이쁘게 봐주세요.(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