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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이 궁전의 문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눈앞의 휘황찬란한 궁전과 여신은 온 데 간 데 없고 엄청난 폭풍이 휘몰아친다. “쏴아~ 쏴아~” ‘속았구나. 내가 경솔하여 충직한 신하들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너무나 후회가 되는구나. 물귀신에 홀려 이제 꼼짝없이 나도 똑같이 물귀신이 되겠구나. 이를 어쩌나.’
대왕이 속으로 한없이 절망하고 있는 동안 산더미 같은 시커먼 물기둥이 하늘 높이 솟구치며 대왕을 무섭게 덮쳐온다. “으아~악!” 강한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몸을 가누지 못한 대왕은 마침내 끝없이 깊은 소용돌이에 빠져버린다. 그러자 어디선가 눈부시게 황홀한 차림새의 여신이 날개 같은 옷을 사뿐히 휘날리며 황급히 날아와 고운 손을 내민다. “대왕, 어서 제 손을 꼭 잡으세요.”
‘어라! 나를 사지에 몰아넣은 저 귀신이 이제는 다시 나를 구해주려 하다니 병 주고 약 주는군. 귀신이 설친다는 축시가 아직도 지나지 않았나.’ 기진맥진한 대왕이 힘없이 겨우 손을 뻗쳐 여신의 손을 움켜쥔 채로 정신을 잃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득하지만 편안한 기운을 느끼며 문득 깨어난 대왕의 머리맡에 아리따운 여인이 그림처럼 가만히 앉아 있다. “여신, 대체 여기가 어디입니까?” “수정궁으로 가는 입구입니다. 대왕, 어서 기운을 차리십시오.”
“벌써 날이 밝았습니까?”
“이곳은 시간의 흐름이 정지해 있어 낮과 밤이 따로 없고 생동하는 봄이 항상 아름답게 피어나는 곳입니다. 언제나 밝은 빛과 꽃들이 만발한 꿈같은 세상이지요.”
대왕이 겨우 여신의 손을 잡고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자 무성한 잎과 줄기가 온통 은빛과 금빛인 신비한 나무들이 어서 오라는 듯이 그들을 바라보며 팔을 벌리고 있는 것 같다.
“지상에서 보지 못한 웬 이상한 나무들이 우리를 활짝 반기는 것 같소.”
“저것은 죽지 않는 영원한 지혜의 나무들입니다. 누구든 이곳에선 저 신령스런 나무들과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습니다.”
여신과 함께 대왕이 어딘지 모르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가고 있는데 주변에서 조그만 속삭임이 들려온다.
“동방의 영웅 무령왕께서 이곳 금강의 별천지에 오셨구나.”
“그래. 모시던 신하들은 모두 강가로 돌아갔는데 대왕께선 잠시 여기서 계시겠군.”
“계시면서 무엇을 보시게 될까.”
“대왕의 미래, 아니 백제국의 먼 앞날을.”
그런데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전혀 보이지 않고 파랑새 두 마리만 나뭇가지 위에서 대왕을 쳐다보며 낭랑하게 지저귀고 있는 것이다.
멍하니 넋을 잃고 바라보는 대왕을 보고 여신이 입가에 고운 미소를 지으며 말해준다. “대왕, 놀라지 마십시오. 이곳은 모든 생명이 서로 소통하고 같이 즐겁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곳입니다. 물과 돌에게도 다정히 말을 건넬 수 있죠.”
“여신, 이곳은 어쩐 일로 모든 만물이 도통한 도사들처럼 살아가고 있소? 무슨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나요?”
“이곳의 아래에는 거대한 수정이 받쳐주고 있어 그 수정에서 뿜어 나오는 신령한 기운이 이곳의 생명들에게 자연스럽게 참된 지혜를 안겨주는 것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며 대왕이 조금 걸어가니 눈앞이 더욱 환해진다. 온갖 색상의 꽃들이 활짝 피어 싱그러운 웃음을 피어내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코끝을 유혹하는 여인의 향긋한 육향이 온갖 계절에 피어나는 꽃들의 향기에 섞여 산들바람에 솔솔 실려와 거친 폭풍우와 신기한 마법의 현실에 지친 대왕의 몽롱한 머리를 더욱 어지럽힌다.
문득 대왕의 머리엔 지울 수 없는 의심과 자신의 중대한 책무가 다시 떠올랐다. ‘지금 귀신에 단단히 홀린 것일까. 임금으로서 신하들과 백성들이 궁금하니 당장 궁궐에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잠시 생각만 그럴 뿐 도저히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곳의 모든 아름다움과 신비함은 대왕이 도저히 거부할 수 없이 푹신 빠져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그냥 이대로 저 꽃 같은 여신의 품에 포근히 안겨 영원히 잠들고 싶기만 하다.
그런데 어쩐지 정말 요상하다. 대왕이 무작정 여신을 따라 길을 걸어가니 간간이 푸른 초원이 눈에 보일 뿐 좌우로 오색찬란한 꽃밭만 끝없이 전개되는 것이다.
“여신이여, 혹시 내가 죽어서 극락에 온 것입니까. 멀리 서방에 있는 토번국의 신비한 ‘死者의 書’에 나오는 죽음의 길에 찬란한 빛과 함께 아름다운 꽃들이 가득 보인다고 했거늘.”
그 말에 여신이 살짝 웃으며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대답한다. “조금 전 강물 위에 계시던 대왕께서 저를 믿지 않으시고 되돌아가셨다면 그대로 강물에 수장되셨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쯤 대왕께서 말씀하신 진짜 황천길이 보이시겠죠.”
눈부신 꽃밭을 가로질러 흐르는 맑은 시냇물과 시원한 풀밭을 지나 한참을 더 길을 가니 하늘에서 들려오는 아름다운 울림을 풍기는 밝고 투명한 산이 눈앞에 우뚝 솟아 있다.
딱히 어떤 색이라고 할 수도 없이 모든 색들이 녹아있는 기묘한 색상의 수정 산이 다양한 광채를 보석처럼 뿜어낸다. 그러면서 그것은 모든 감미로운 음악이 조화롭게 섞인 것 같은 다채로운 울림과 함께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다.
대왕이 너무나 신기하여 여신에게 물었다. “이 산은 대체 무엇입니까? 마치 온 세상의 수정이 한데 모아 이루어진 마법의 산 같습니다.”
“이 수정 산이야말로 이 수정 세상의 중심이 되는 가장 성스런 곳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의 세상을 동시에 보여주는 신비한 장소이죠. 이곳에서는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모든 곳의 모든 일들이 한자리에 놓여 있는 셈입니다.”
오색찬란하게 빛나는 무지개빛 수정의 산기슭에 도착하자 여신이 어여쁜 손을 그곳에 살짝 갖다 댄다. 그러자 순간 산 전체가 분노하여 당장이라도 무너질 듯 크게 요동친다. 당황한 대왕이 여신의 손을 잡아끈다. “어서 여기를 비켜나는 것이 좋겠소. 그대로 있다간 산이 무너져 내려 그만 무거운 수정더미에 깔려 죽을 것 같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대왕.”하면서 여신은 차분하고 고운 목소리로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운 다음 수정 산을 향해 조용히 외친다. “수정의 신이여, 저희가 시간과 생사를 초월하는 운명의 인연으로 여기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거대한 수정 산의 우렁찬 진동이 고요히 가라앉고 굳게 닫힌 수정의 문이 나타난다.
둘이 문 앞에 다가서자 문은 알았다는 듯이 저절로 부드럽게 열린다. 안에 들어가니 그 안에는 역시 온통 오색영롱한 수정으로 이루어진 거울이 가득 찬 찬란한 방이 나타난다. 한없이 눈부신 거울의 세계, 벽과 천장, 바닥이 모두 수정거울로 둘러싸인 드넓은 거울 방이다.
거울 속의 또 다른 거울을 매달아 놓은 경대 앞에서 역시 또 다른 자신에 빨려들 듯이 바라보는 사내가 있다. 맑은 수정은 대왕의 모습을 서로 비추고 반사하여 천장이나 벽이나 바닥에도 수십 수백의 대왕이 당당히 서 있는 것이다.
대왕이 한쪽 편을 바라보니, 거울의 금으로 된 테두리의 매화꽃문양에 빛나는 한줄기 햇빛이 조용히 날아와 포근히 잠자고 있다. 그 바람에 그림 같은 방안에 있는 오색의 거울들이 햇살의 물결에 떠서 조용히 흐르는 것 같다. 국화와 원앙을 아름답게 수놓은 화문석 위로는 나전칠기로 화려하게 장식된 장롱이 희미한 빛을 흘리며 조용하게 꿈속을 헤매고 있다.
그 옆에선 백옥 같이 하얀 피부에 날아갈 듯 가는 검은 눈썹의 아름다운 여인이, 잘 익은 복숭아를 닮은 볼과 불타오르는 입술에서 피어오르는 그녀의 야릇한 관능과 함께 대왕의 눈과 가슴에 밤하늘의 영롱한 별처럼 그대로 박혀온다. 그러나 옥에 티랄까. 전생의 그녀는 이승인 연미 산에서 사내와 열렬한 사랑을 나누고 아이까지 두었던 여신인지라 안타깝게도 출가한 여인들이 하는 조짐머리를 틀고 있다.
하지만 이미 사랑에 눈이 먼 대왕에겐 여신의 윤기 나는 눈부신 머리모습이 오히려 가슴을 더욱 설레게 한다. 여신은 그 머리 아래로 요요하게 이어진 가녀린 허리를 수정거울에 가만히 기댄 채 꿈꾸듯, 곱게 단장한 자신의 몸이 빨려들 것 같이 하염없이 들여다보고 있다.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본래 시작되었을 인간의 몸치장은 물이든 거울이든 자신의 몸이 비치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자신의 소중함과 존재감을 확인하였을 것이리라. 사람은 은은한 햇살 아래 빛나는 거울을 쳐다보며, 자신의 육체적인 매력이 마음껏 발산하는 자기만족을 찾고, 치장한 의상과 장식을 다시 확인함으로써 사회적 지위를 널리 과시하고자 하는 원초적 본능을 보여준다.
거울에 도취해 있던 여신이 대왕을 지그시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연다. “세상의 모든 사물은 거울 속의 거울처럼 결국 하나로 귀결됩니다. 하나가 전체요, 전체가 하나입니다. 대왕께서는 이것이 무슨 말인지 아시겠습니까?”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은 임금이요, 전체는 나라의 모든 백성을 말함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백성들의 운명은 임금에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임금의 숙명은 백성들에게 널리 빛을 비추게 됩니다. 결국 임금과 백성이 서로 긴밀한 관계로 끊임없는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임금이 백성을 잘 돌보아야 하는 것이죠.”
“아! 알겠습니다. 나도 거울에 보이는 내 모양을 백성들의 모습으로 보아나갈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백성들도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대왕처럼 보여야겠죠.”
“그러면 나는 결국 임금을 못 하게 되는 것 아닙니까?”
“잘 파악하셨습니다. 대왕. 거울이 영원히 환상을 비출 수는 없는 법, 어느 순간에는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기도 하여야 합니다.” 이렇듯 서로의 뜻 깊은 공감에 한동안 방안이 훈훈하기만 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대왕이 방 안을 아무리 둘러봐도 아리따운 여신의 모습은 하나도 수정의 거울에 비치지 않는 것이다.
‘음, 역시 귀신은 그림자가 없어 거울에 비치지 않는군. 그러면 신하들 말대로 내가 요사한 귀신에 홀린 것일까. 그래서 오지 말아야 할 죽음의 장소에 온 것인가. 아니 그럴 순 없어. 저렇게 우아하고 향기로운 여인이 흉악한 귀신이라니.’
대왕이 속으로 이렇게 번민하는 사이에 상긋한 목련향기와 함께 잠들 듯 조용한 음률이 흘러나와 맑고 투명한 하얀 수정의 거울에 대왕의 어린 시절이 낱낱이 드러나 알알이 맺힌다.
온 산에 벚꽃이 만발한 왜국에 살던 때의 아련한 추억, 인생의 고난을 모르고 철없이 즐거웠던 나날들, 그리고 국내에 들어와 백성들에게 널리 알려져 존경받고 환영받은 보람찬 일들이 오늘처럼 생생히 되살아난다.
조금 있으려니 영원히 묻어버리고 싶은 고통스러운 일도 수수꽃다리(라일락)의 진한 향기를 실은 경쾌한 울림이 묻어나오는 노란 수정거울에 환히 비치고 있다.
일 년 전쯤의 일이다. 무너져가는 백제를 되살리는 업적을 많이 세웠지만 결국 환락에 빠져 나라와 백성을 괴롭힌 동성왕이 갑자기 자객들에게 살해되었다. 그러고 보니 나라 안팎이 온통 불안과 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자객을 보내 임금을 죽인 역적 백가의 무리를 토벌하자.”하고 소리 높이 외치며 대왕은 군사들을 독려해 백가가 있는 가림성으로 진군하였다. 거기서 대왕은 이상하게도 자신에게 전혀 저항하지도 않는 백가를 손쉽게 붙잡았다. 그 다음 날 군사들은 대왕을 모시고 오랏줄에 묶인 백가를 끌고 곰나루에 당도하게 된다.
대왕은 곰나루에 임시로 마련한 용상에 앉아 호통을 쳤다. “이놈, 백가야! 네 죄를 네 스스로 잘 알렸다. 이제 죽음을 달게 받으라.”
“대왕마마, 정말 억울하옵니다. 이 한 몸 다 바쳐 폭군을 응징한 것뿐인데 상을 받지 못할지언정 극형을 받게 되다니요? 하늘은 결코 무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놈이 이제는 신성한 하늘을 들먹이면서 나를 저주하느냐! 여봐라 이놈을 당장 목을 베어라.”
그러자 백가는 고개를 꼿꼿이 쳐들고 도리어 대왕에게 호통을 친다. “대왕, 당신도 저승에 가게 되면 크게 후회할 것이오. 내가 이렇게 원통하게 죽어가니 죽어서도 반드시 처절한 복수를 할 것이다. 머지않아 나는 신라의 장수로 태어나 백제국의 군사들을 몰살시키고 당신의 아들을 비참하게 죽게 만들 것이야. 으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군사들이 미친 듯이 섬뜩한 저주의 웃음을 토해내는 백가의 목을 치니 붉은 핏줄기가 하늘높이 솟구친다. 그래도 여전히 저주의 여운이 강물에 배어있는 듯 사람들에겐 물결소리마저 원망의 발악으로 들려온다. 백가의 음산한 저주에 분노하여 몸을 떨던 대왕이 크게 호령한다. “저 역적의 영혼마저 극심한 고통을 주고 저자의 혼령이 다시는 악귀로 부활하지 못하도록 몸과 따로 금강에 던져버려라.”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일은 대왕에겐 작지 않은 상처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 와서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아무리 자신의 지나친 처사가 후회되기도 하고 백가의 처절한 저주가 두렵기도 하여도, 군사들을 시켜 깊은 금강의 바닥을 샅샅이 뒤져 떠내려가 버리고 썩어버린 백가의 목과 몸을 찾아내어 함께 장사지내 줄 수도 없다.
대왕이 매우 불편한 마음을 안고 여신을 따라 묵묵히 조금 더 걸어가니 부드럽고 편안한 울림과 함께 연두색 수정이 나타난다. 거기에 훤칠하고 매력적인 현재 대왕의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저편의 곱고 아름다운 연분홍 수정에 무언지 모르는 장면들이 매혹적인 울림을 뿜으며 흘러나온다.
그 소리에 기분이 다소 나아진 대왕이 희망찬 목소리로 묻는다. “저것은 무엇입니까? 무언가 희망이 가득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요?”
그러자 아까부터 대왕의 침통한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보던 여신이 경쾌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바로 머지않은 대왕의 자랑스러운 미래입니다.”
조금 있으려니 붉은 장미의 매혹적인 향이 그윽하게 어린 피 끓는 울림이 방 안 가득 퍼져 나오며 화려한 붉은 수정에 큰 전쟁에서 용감하게 싸워 승리의 깃발을 높이 흔드는 대왕의 모습이 나타난다. 그것을 보자 백가의 일로 찌푸렸던 대왕의 얼굴이 아주 밝게 펴진다. 옆에서 같이 지켜보던 여신도 뿌듯한 목소리로 말한다. “머지않아 대왕께선 숙적 고구려를 물리치고 나라의 위세를 온 세상에 널리 보이실 것입니다.”
잠시 후 포근한 국화향이 어우러진 통쾌한 환락의 울림이 들려오자 더욱 큰 기쁨에 저절로 대왕의 입이 크게 벌어진다. 자줏빛 수정 거울에 큰물과 가뭄이 들어 굶주리는 백성들이 보이고 이것을 불쌍히 여긴 대왕이 사람들을 시켜 나라의 창고를 열게 하여 양식을 나눠주고 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 나라의 곳간이 비어도 백성들은 살려야 한다. 신하들은 떠도는 백성들을 모아 땅을 나눠주고 정착시켜 편안히 살게 해주어라.”
이어서 대왕은 흐뭇한 표정을 지은 채 수많은 신하들을 거느리고 아까 보았던 유서 깊은 곰나루에 다시 우뚝 섰다. “이곳을 중심으로 주변 여러 나라에 우리 백제국의 수많은 물자를 배로 실어 보내고 외국의 진귀한 물품을 들여오는 무역을 활발히 하도록 하시오.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여 동방의 중심 대백제국을 더욱 융성하게 합시다.” 그 말에 환호하는 신하들의 함성이 강물을 따라 크게 울려 퍼지고, 태평성대를 감사하는 백성들의 웃음소리가 흥겨운 노래처럼 경쾌하게 들리는 가운데 대왕은 편안히 숨을 거둔다.
그러나 우수에 젖은 연보라 수정거울이 맹렬한 눈보라에 휘말리는 듯 커다란 슬픔에 흐느끼는 듯 으스스 떨려온다. 잠시 후 미래의 상황이 갑자기 급변하며 끔찍한 지옥의 아비규환이 자욱한 피비린내와 함께 들려온다.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간신히 고개를 든 대왕의 눈에 백제 군사들의 시체가 산을 이루고 그 주변이 시뻘건 피로 강을 이룬 참혹한 풍경이 보인다.
대왕은 깜작 놀라 자기도 모르게 크게 소리쳤다. “아! 관산성이다.” 그 장면 뒤로 신라의 웅장한 서라벌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곳의 궁궐안쪽에 신라왕이 활짝 웃으며 거만하게 높이 앉아있고, 갑옷을 입은 장수 하나가 의기양양하게 피 묻은 머리 하나를 바치며 거울 밖의 대왕을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이것을 본 대왕이 갑자기 불길한 예감이 들어 여신에게 겨우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저 모, 목의 주인은 도대체 누, 누구요?”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다. 더욱 궁금해진 대왕이 다시 물으려다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한다. “혹시 우리 백제국의...... ”
“네. 대왕의 아들입니다.”
“아~ 그, 그러면 저 목을 들고 나를 노려보는 자는 누, 누구입니까? 어, 어디서 많이 본 눈매의 사내인데.”
“차디찬 금강에서 원통히 울면서 백제국과 대왕을 영원히 저주하다가 신라에 태어날 백가입니다.”
“내, 내 아들이...... 신라에 환생한 백가에게 무참히 당하다니. 으~으~흑.”
쓰러질 듯 휘청거리다가 거울의 경대를 잡고 간신히 몸을 가눈 대왕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힘없이 묻는다.
“여신, 이게 어찌된 일이요?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백제 국이 적국 고구려에 서울을 함락당해 임금의 목을 빼앗긴 후 다시 이런 비극이 일어날 것이라니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대왕, 이게 다 세상의 정해진 운명인데 어찌 누가 감히 하늘의 뜻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여신, 내 시절에 융성하게 될 백제 국이 신라에 참패를 당하다니요. 더구나 신라는 현재 우리 백제와 동맹국이 아닙니까?”
“세상의 모든 관계는 영원한 것이 없습니다. 지금의 적인 고구려만 의식하다간 이렇게 예측을 못할 불행한 미래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여신, 제발 여신의 그 신통한 힘으로 미래의 운명을 바꾸어 내 아들만이라도 구할 수 없겠소?”
“그건 안 됩니다. 수만의 백제병사들이 무참히 죽어갈 것인데 그들을 책임져야 할 임금만 살아남다니요. 더구나 한낱 물에 사는 귀신인 제가 지존한 천기를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혹시 그대로 이 나라가 신라에 멸망당하지는 않겠습니까? 너무나 걱정이 됩니다. 으흐흐흑!”
침통한 얼굴로 대왕을 지켜보던 여신이 무겁게 입을 연다. “그러면 대왕께서 저에게 한 가지 약속을 지켜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게 무엇이오.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어떤 것이든 가리지 않겠소.”
“앞으로도 저를 잊지 않고 변함없이 사랑해 주시겠습니까?”
‘이 무슨 괴상한 일이란 말인가. 한 나라의 임금이 귀신을 사랑하다니, 그것도 정체를 모를 곰의 귀신을. 절대로 안 될 일이다.’
그런 대왕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여신은 슬픈 표정이 가득한 얼굴로 울먹인다. “대왕께서 가상한 용기를 내시어 이곳까지 오셨는데 이제 와서 저를 버리려 하십니까. 제가 귀신이 되어서까지 사내들에게 버림을 받으니 더 이상 인간 세상에 집착을 하지 못하겠습니다. 차라리 제 영혼이 산산이 부서져 영원한 암흑의 세계에 묻히고 싶습니다.”
그러더니 여신은 몸부림치면서 통곡하다가 슬픔이 복받쳐 심연과도 같이 울렁이는 검은 수정거울 속으로 몸을 던지려고 한다.
“여신, 안 되오!” 대왕은 급히 달려가서 소용돌이치는 칠흑의 거울 심연으로 뛰어드는 여신의 몸을 가까스로 붙잡았다.
“내가 잘못 생각했소. 그대를 항상 내 곁에 두겠소. 내가 숨을 거둔 후에 무덤 속에서도 그대를 바라보며 지내겠소.”
“정말입니까? 대왕.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항상 대왕 곁에서 보이지 않게 대왕을 도와드릴 것입니다. 그 증표로 여기 칠흑의 수정 반지를 대왕께 바치겠습니다.”
“반지는 예쁘게 생겼으나 색깔이 검으니 왠지 불길해보이고 마음도 어두워지는 것 같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검은 색은 어둠과 물을 상징합니다. 훗날 대왕께서 어려우실 때마다 이 검은 색의 조화로 반드시 큰일을 이루실 것입니다. 어려운 일에 부딪혔을 때 이 반지를 쥐고 저를 생각해주십시오.”
‘백성들을 너무 생각하다보니 꼼짝없이 엮여 버리고 말았구나. 그래도 나라를 살리기 위해선 할 수 없지 않은가.’
속으로 고뇌하는 대왕을 향해 여신이 결연한 어조로 말을 잇는다. “이 몸이 비록 연약해도 백제 국의 땅에 깃들고 있는 신령으로서 대왕의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백제의 멸망만은 반드시 막아내겠습니다.”
“그게 정말이오. 나는 오직 여신만 믿겠습니다. 고맙소. 여신!”
“대왕!”
이윽고 둘은 살며시 어우러지며 색색이 빛나는 수정의 방에 이승과 저승을 넘어서 신비한 사랑의 열기가 은은히 풍긴다.
“여신! 정말 사랑하오. 여신!”
“대왕마마, 이제 정신이 드시옵니까?”
‘여기가 어딘가. 꿈같은 수정궁이 아니고 또 어디란 말인가.’
둘러보니 어제 본 곰나루의 강가다. 대왕이 누워있는 주변에 많은 신하들이 모여 긴장된 얼굴로 지켜보고 있다.
그래도 대왕은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신하들에게 묻는다. “내가 여기에 왜 이렇게 누워있는 거요?”
“대왕께선 바로 조금 전까지 강 위에 떠 있던 황금빛 수정으로 된 배에서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동안 내가 황금빛 수정배에서 자고 있었단 말이오?”
“네. 마마. 어젯밤에 대왕의 모습이 사라진 후 저희들은 계속 강가에서 기다리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강가와 강물 위를 살펴보면서 대왕을 찾았습니다.”
“혹시 그 배에 다른 사람이 없었소?”
“아름다운 여인 한 사람이 대왕의 머리맡에 서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아마도 축시에 저희들이 보았던 요망한 귀신같아 보였습니다.”
“아! 여신, 아니 그 여인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요?”
“저희가 대왕을 모시러 수정의 배 위에 오르자마자 어디론가 연기같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아! 내 사랑!”
“대왕마마, 그 귀신이 사랑이라니 그 무슨 말씀이옵니까? 피곤하신 것 같으니 더 주무십시오.”
“아, 아니오. 내가 꿈을 꾸었나 보오.”
“내가 죽은 줄 알고 다들 놀랐겠소.”
“네. 다행히 찬란하게 빛나는 수정의 배에 계셔서 이리로 무사히 모시게 되었지만 이상하게도 금빛수정의 배도 대왕을 모시자마자 연기처럼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정말 다행이오. 그대들을 다시 만나게 되어서 기쁘오.”
“그러하옵니다. 마마. 하늘이 대왕을 도우신 것 같사옵니다.”
여신과 수정궁은 감쪽같이 사라졌지만 신기하게도 대왕의 손가락엔 검은 수정반지가 거짓말처럼 끼어 있는 것이다. 여신의 분신과도 같은 사랑스런 그 반지에 그녀의 정다운 숨결이 소록소록 배어있는 것만 같다.
이렇게 신비한 일이 있은 지 몇 해가 지난 후 고구려가 수많은 군사들을 이끌고 백제에 침입한다.
무적의 고구려의 군사들은 막강한 철기 군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어 용감한 백제군도 이내 커다란 위기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대왕은 군사들을 물리고 홀로 앉아 손을 맞잡고 하늘에 기도를 올렸다.
“여신이여, 이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나가게 해 주소서. 나라를 지켜 이 나라를 구하게 하소서.”
마침 대왕이 기도를 하느라고 검은 수정 반지를 한참동안 꼭 쥐게 되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늘이 갑자기 컴컴해지고 주위가 온통 암흑천지로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날이 어두워도 대왕에게는 환한 대낮처럼 모든 것이 잘 보였다.
‘여신께서 나를 도우시는구나. 이제 이 어둠을 틈타 저 강력한 고구려 군을 쳐부술 수 있을 것이다.’
대왕은 군사들에게 명해 고구려군 진지로 몰래 쳐들어갔다.
“앗! 불이다!” 적의 진지 가까운 곳에 설치한 기다란 목책에 거대한 불길이 타오르고 있는 것이다. 때마침 몰아치는 거센 바람은 불길을 더욱 돋우고 있다.
“적들이 불길 너머 어둠에 보인다.”
“와아~ 와아~” 적들이 함성을 크게 울린다. 지략이 뛰어난 고구려군의 장수는 이미 기습에 대한 철저한 대비는 물론 오히려 습격하는 백제군을 함정에 깊이 끌어들인 것이다. 그 불길 너머로 숱한 적들이 창칼을 들고 활시위를 겨냥하면서 어둠에 숨어 백제군을 기다리고 있다.
“방패를 많이 준비했는가?”
“기습을 하려고 대부분 진지에 방패를 놓고 왔습니다.”
“안되겠다. 잠시 후퇴하라.”
“안됩니다. 우리가 등을 돌리면 적의 화살에 모조리 당합니다. 우선 적으나마 방패로 막고 군사들을 겹쳐 놓아 방패로 삼아야 합니다.”
백제군은 우선 충천하는 불길이 앞에 가로막고 있어 오도 가도 못하는 난처한 신세가 되어 버렸다.
잠시 후 소라고둥소리가 어둠을 뚫고 일촉즉발의 들판에 길게 메아리쳤다. “뿌우~우~ 뿌우~우~” “쉭! 쉭! 쉭!” 그와 동시에 고구려 군사들이 빗발처럼 화살을 쏘아 보내니 백제의 군사들은 사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어이없이 쓰러져 갔다. “으아~악. 아~악! 윽!”
‘속았다. 여신만 믿고 기습했다가 낭패로구나. 이러다간 우리는 모두 죽게 되고 결국 고구려에 나라를 잃게 될 것이다.’ 위기감을 느낀 대왕은 장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용맹한 백제의 군사들이여! 나를 따르라.” 그러나 군사들은 맹렬한 불길과 쏟아지는 화살이 두려워 아무도 따르는 자가 없다. 할 수 없이 대왕은 홀로 큰칼을 휘둘러 날아오는 화살을 쳐내며 불길에 접근했다.
대치하고 있는 양군 사이를 길게 가로질러 세워진 목책들은 계속 거세게 타오르고 그 안에 있는 고구려군 진지까지 불이 옮겨 붙어 그 일대가 온통 불바다를 이루고 있다.
‘여신이여, 나를 저버리시나이까. 당신과 맺은 진실한 사랑의 약속은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습니까?’
대왕은 하늘을 우러러 탄식을 하다가 결연히 보검을 적진을 향해 겨누었다. 그때였다. 적진을 향해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 속에 여신의 아름다운 모습이 떠올랐다.
여신은 다정한 눈빛으로 대왕을 향해 어서 이리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하고 있었다. 대왕은 오히려 섬뜩한 생각이 들어 돌격하려던 결심이 크게 흔들렸다.
‘저것은 나를 도우려는 여신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백가의 귀신이 여신의 모습으로 둔갑하고 나를 유혹하여 결국 죽음으로 인도하려는 것 아닌가.’
‘그러나 한 나라의 왕이 된 자로서 어찌 비겁하게 이 자리를 피할 수 있겠는가.’ 대왕은 채찍을 힘차게 내리치며 불길을 향해 말을 몰았다.
“히~이이~잉!” 그러나 평소 대왕이 애지중지하던 애마도 불길이 무서워 말발굽만 들고 주춤하고 있다.
대왕은 너무나 슬퍼 눈물이 났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백제 국을 위하여 이곳에서 죽으리라.’ 대왕은 비장한 결심으로 말에서 내려 목책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불길 가까이 다가갔다.
“대왕! 위험합니다. 앞에 불기둥이 쓰러져 덮칠 것입니다.”
“가지 마십시오. 대왕! 옥체를 보존하십시오.”
부하들의 걱정에 대왕은 고마워 가슴이 뜨거워진다. 한편으로 작지 않은 갈등도 생겼다. ‘치욕스럽지만 여기서 살아남아 훗날을 기약할까. 아니다. 나라가 있어야 임금도 있을 수 있는 법, 내가 앞장서리라.’
“야아~아!” 대왕은 커다란 함성과 함께 큰칼을 휘두르며, 대왕의 용기에 새파랗게 질려 바라보고 있는 불길 너머의 적군을 향해 힘껏 내달렸다.
대왕이 용감히 불길 속으로 뛰어들자 정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비록 어두웠지만 맑았던 하늘에서 갑자기 엄청난 소나기가 쏟아져 내려 맹렬하게 타오르던 불길을 말끔히 꺼버린 것이다.
그 틈에 대왕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허둥대는 적군들 사이로 뚫고 들어가 적장의 목을 손쉽게 베었다.
“적장을 죽였다. 공격하라! 돌격!” “와아아~” 그러자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백제의 군사들이 일제히 진격하고 대장을 잃은 고구려군은 모두 싸움에서 패해 사로잡히거나 간신히 도망쳐버렸다.
고구려 군을 물리친 후 대왕은 그 자신감으로 나라의 세력을 크게 떨쳐 사방으로 영토를 넓히고 백제의 중흥을 굳건히 하였다. 대왕이 검은 반지를 끼고 하늘에 축원을 하면 뱃길을 통해 나라의 무역이 활발히 이루어지고 가뭄이 심해도 단비가 내려주었다. 또한 홍수가 심할 때는 반지를 빼 놓으면 비가 그쳐 날이 개었다.
-계속됩니다.- 다음편 '독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