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기술된 후하게 장례를 치르는 고려장이 어떻게 생매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는지 문헌 근거나 연결고리도 밝히지 못하고, 일제 침략과 함께 찾아온 이방인의 이야기를 거꾸로 끼워맞추는 역사해석은 억지다.
지난 13일치 <왜냐면>에서 ‘고려장’이라는 말은 일본인들이 만들어 퍼뜨린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이순우씨가 제시한 근거의 하나인 그리피스의 <은자의 나라 한국>은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선왕조는 한국인의 미신 속에 뿌리박고 있는 적어도 두 가지의 잔인한 악습을 철폐했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중략) 고리장(高麗葬)이라고 하는 것은, 그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알려지지는 않고 있지만, 노인을 산 채로 묻어 버리는 풍습이었다.”(집문당 발행, 130쪽)
그런데 1875년에 일제가 조선침략의 발판을 마련한 운요호 사건이 터진 이후 일본 군함의 무력시위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1888년에 일본통 미국인 그리피스가 쓴 이 책 초판이 나온다. 일제 강점기로 접어들기 이전에 고려장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는 이씨의 주장이 오류라는 것이 확인된다.
<충주문화방송>이 1999년에 현지답사와 전문가의 인터뷰 형식으로 제작한 ‘고려장은 있었는가’라는 비디오테이프에는 관련학자들의 다음과 같은 증언이 나온다.
심의린의 <조선동화대집>에 거두절미된 생매장 고려장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밝힌 분은 인하대 국어국문학과 최인학 교수다. 우리의 고문헌들을 두루 살펴도 고려장은 없었다는 것을 밝힌 분은 서울대 국사학과 송기호 교수다. 개성에서 후손들이 보는 앞에서 일경이 총칼을 들이대고 조상의 묘를 파헤쳤다는 것을 밝힌 분은 한국교원대 정영호 교수다. 무덤 속에서 귀한 문화재가 발굴되자 본격적으로 파헤치기 시작한 것은 일제로 이들의 ‘만행이 지하 백골에까지 미쳤다’고 통탄하던 안중근 의사의 말을 전한 분은 충청대 장준식 교수다. 이순우씨는 ‘일제 때 도굴이 자행되었다’고 지적한 내용을 검증도 확인도 않고 부정하고 있다.
그리피스는, 자세한 내용은 충분히 알지도 못하면서 우리나라에 패륜의 잔인한 악습이 있었다고 적어놓았다. 하멜은 <하멜표류기>에 악어를 우리나라 강에서 보았다고 썼고,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 416쪽에서 치핑구(일본)를 진주와 황금의 나라로 적어 놓았지만, 그리피스는 이들과는 다른 의도에서 엉터리 고려장을 기록하지 않았나 하는 의심이 든다. 특히 숱한 일본인들의 도움으로 책을 썼다고 하며, 한국의 우상숭배에 기독교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제대로 된 본래의 고려장은 ‘후하게 장례를 치른다. 사람이 죽으면 금은보화를 넣은 다음 돌로 쌓아 봉토하고 묘지 주변에는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었다’는 것이다.(<한국문화사> 고대편 404쪽)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기술된 내용이 어떻게 생매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는지 문헌 근거나 최소한의 연결고리도 밝히지 못하고, 20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에 일제 침략과 함께 찾아온 이방인의 이야기를 거꾸로 끼워맞추는 역사해석은 누가 보아도 억지다.
내가 지적한 내용을 갈무리하자면, 첫째 역사학자 이병도의 <국사대관>의 고려장은 첫 학술적 문헌 용례다. 아울러 조선총독부의 <조선보물고적 조사자료>에 나오는 고려총, 고려산, 고려곡 등 전국에 산재하는 이름은 고구려 때의 장례풍습인 고려장 관련 이름이거나 왕건이 세운 고려 관련 이름이 뒤섞여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일제 때 소행’ 또는 ‘일제의 소행’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와 일제 침략기를 포함하는 뜻으로 한 것이다. 셋째, 심의린이나 그리피스의 책에 나오는 고려장은 확실하게 고증을 하지 않은 허구다. 넷째, ‘고려장’이라는 말이나 관념 자체가 없었다는 것도, 중국의 <효자전>, 인도의 <잡보장경>, 두보의 시 <곡강>, 서울대 송기호 교수의 <한국고대생활사 자료집>, 규장각 자료 검색 등을 통해서 넉넉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