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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압][BGM]중국에서 조선족친구가 알려준 독립투사들
게시물ID : history_17564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크타야
추천 : 30
조회수 : 2474회
댓글수 : 19개
등록시간 : 2014/08/05 06:21:58


얼마 전 조선족 친구와 잠시 술자리를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전에는 서로 예민한 화두를 피해왔지만, 그날에는 정말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려고 일부러 민감한 문제를 끄집어냈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조선족들의 만행(특히 대림동 쪽)때문에 한국인들의 시선이 좋을 리가 없다고 했고 그는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면 한국인들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거라며 오히려 원망 하더라고요.
 
그래서 니들 조선족들이 스스로 중국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왜 우리가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해줘야 하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는 국적과 민족은 엄연히 다른 것이라며 반박하며 한국인들이 역사를 바로 알고 있다면 조선족들을 이렇게 대할 수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역사냐 그러니 조선족은 일제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독립투사의 후예들인데 너희들은 오히려 일본군에 가담해 지네를 학살했다는 식으로 나오더군요.
 
그래서 저도 순간 욱해서 까놓고 말해서 조선족들은 나라 버리고 만주로 제 살길을 찾아 떠난 피난민들이 대부분이지 독립투사가 몇 명이냐 되냐고 반박했습니다.

그러더니 엄청 화내더니 정말 친구라고 생각해서 오늘 한 말은 못들은 걸로 하겠다며 자리를 뜨더라고요.
저도 기분이 확 상해서 그냥 집으로 와버렸습니다.
그리고 한참 뒤 그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니가 꼭 한번 봐야 할 게 있어서 메일로 보냈다 그러고 전화를 끊더라고요.

그래서 뭔데 그러지 짜증 내며 메일을 보는데 점점 자신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바로 그 친구에게 사과하고 서로 화해했습니다.

그도 자신이 한 말에 대해서 자신이 격했다며 사과하더라고요.
그와 나눴던 대화를 잠깐 적으면:

<한국에 가는 조선족은 대부분 조선족 사회의 패배자들이다. 대부분 이곳에서 온정 된 수입을 얻을 수 없는 건달들이거나 백수가 많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이라고 안 새겠냐, 그리고 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게 피해의식이 있다. 90년대에 한국인들의 사기범죄가 기승을 부린 것 때문이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들을 꾀어가서 성매매시켰고 노인들을 상대로 한국 가서 살게 해준다며 돈을 뜯기도 했다. 장기밀매 같은 것도 있었을 거라 추측하는데 90년대에는 수많은 연변청년들이 한국 갔다가 실종됐다고 한다, 괴담일지도 모르지만...

자꾸 당황하셨어요 하면서 놀리지 말아달라, 보이스피싱도 한국인들에게 배운 것이다. 90년대 때는 연변의 은행이 한국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보이스피싱을 할 수 있는 지식 자체가 없었다. 한국인들이 먼저 이쪽에 와서 보이스피싱을 하고 그 기술을 조선족에게 전수해 준거다.
조선족은 우리가 개그로 비웃을 만큼 보이스 피싱에 어설프다. 특히 조선족 사투리는 절대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함북과 경상도 사투리가 섞여서 서울 말투랑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일본군 발언은 내가 좀 격했다 그 시대에 지가 원해서 군대 가는 놈이 어딨겠냐, 학도병이나 총알받이로 끌려갔겠지.

물론 한국인들도 조선족이 반가울 리가 없다는 건 잘 알고 있다. 6.25가 있으니까.
근데 윗어른들 얘기 들어보면 그들은 한국군과 싸우러 간 게 아니라 미군과 싸우러 갔다고 믿고 있다. "남조선 인민을 미군의 군홧발 아래서 해방시키자!"가 그들의 신조였단다. 말하자면 선동에 놀아난 것이다.
당신들이나 우리나 강대국 사이에서 놀아나는 불쌍하고 약한 민족일 뿐이다.
약한 민족일수록 뭉쳐야지 맨날 싸워야 쓰겠냐?

물론 미운 짓 하는 조선족을 감싸는 건 아니다. 한국에서 미운 짓 하는 조선족은 중국에서도 똑같이 미움받는다.
한국에 있는 진상 조선족들 확실하게 처벌하고 대신 "조선족이니까 저렇다"는 식으로 몰아가지는 말았으면 한다. 조선족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부터 못돼먹은 놈이라서 그런 거다.>

그 외에도 많은 얘기를 나누었지만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래에 메일 내용을 대충 정리해서 올립니다.
중국어로 된 것이었는데 급하게 번역해 오역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일제시기 전쟁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열사"또는 "선열"이라고 부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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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제일 먼저 일제에 저항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한족이 아닌 조선족(그때는 조선족이 아니라 한인이라 함이 더 타당할지 모르지만)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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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항일전쟁사를 다룬 기사의 일부, 9.18사변 이후 일제의 침략에 제일 먼저 반항한 것은 조선족이며 상당수의 "항일유격대"(중공계열의 반일무장)는 조선족이 집거하는 지구에서 발원했다고 쓰여있다.)

조선족(재중한인)의 독립투사들

안순복(1915一1938):

중국에서도 유명한 "팔녀투강" 열사 중 한명이다.13살때부터 아버지와 오빠를 따라 독립운동을 했으며 반역자의 밀고로 아버지와 오빠를 비롯한 7명의 독립운동가가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자 도망쳐 중공군의 항일연합군 4군에 합류하였다.

이봉선(? -1938)
역시 "팔녀투강"열사 중 한 명이다. 당시 스무 살 정도였고 한인이라는 사실 외에는 그의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가 없다.

1938년 10월의 어느 새벽, 안순복과 이봉선이 소속된 항일연합군 제4군과 제5군이 목단강지류인 우스훈하 하류의 어느 산골짜기에서 일본군에 포위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제일 먼저 일본군을 발견한 렁윈,안순복,이봉선 등 여전사들은 주력부대를 보존하기 위해 8명의 부녀자라는 보잘것없는 전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게 대항하며 대부대의 퇴각을 엄호했다.
상대가 여자라는 것을 알아차린 일본군이 생포하려고 포위망을 좁혀오자 안순복을 비롯한 8명의 열사는 "일제를 타도하자"를 외치며 마지막 수류탄을 적군에게 던지고 적군이 수류탄을 피해 엎드린 틈을 타 총기들을 훼파한 뒤 서로 팔을 겯고 나란히 우스훈하에 몸을 던졌다.
이에 중국은 그들이 희생된 자리에 기념비를 세워 그들의 의거를 기렸고 영화로도 제작되며 많은 이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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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팔녀투강>기념비




이홍광(1910—1935):

본명은 홍해·홍규로 의산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하였다. 경기도 용인 출신이다.

남만항일유격대의 창시 인이다.
1931년 이홍광은 다른 7명의 한인 청년들과 함께 일명 "개잡이"라는 유격대를 조직하며 게릴라전으로 일제에 대항했다.
1932년 5월, 이홍광의 지휘하에 "개잡이"부대는 후란진에서 친일위군을 습격해 소총 20여 정을 빼앗고 위군두목인 리얼을 사살했다.
이후 "개잡이"부대는 "반석공농의용군"으로 발전했으며 중공군에 편입돼 남만항일유격대로 개편된다.
1934년4월, 동북항일연합군이 결성되면서 이홍광이 총참모장을 맡았으며 제1사단 사단장과 정치위원을 겸직하였다.
이홍광은 현지 지리에 익숙하고 전술에 능해 전투에 패한 적이 없어 "필승장군"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하였다.

1935년2월 13일에는 200여 명의 한인 대원들을 이끌고 기병대를 조직해 압록강을 건너 국내의 평안북도 후창군 동흥읍(후주고읍)에 주둔한 일본군을 습격하여 국내외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동흥읍습격 작전은 항일무장투쟁세력에 의한 1930년대 최초의 대규모 국내 대일작전이었다.
동흥 점령전투에서 10여 명의 일본군을 살상하고 일제가 구축한 시설을 일부 파괴하였으며 많은 군자금과 보급품을 노획하였다. 그리고 일본인 및 친일부호로 지목된 10여 명을 응징하는 등 큰 전과를 올렸다.

1935년 5월 남만주 환인현과 흥경현의 접경지인 노령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인 끝에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비보를 접한 중공군은 동북항일연합군 군가 가사에 이홍광의 이름을 넣어 그를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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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홍광 열사


허성숙(1915-1939):

1915년 연길에서 출생하였으며 1930년부터 독립활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에 중공군의 공청단에 가입하였으며 친일매국노였던 아버지와 부녀의 연을 끊고 연길유격대에 합류하였다.
1934년 7월, 유격대가 허성숙 열사의 친부가 거느리는 친일자위대와 조우하자 크게 분노하며 "양심이 있다면 총부리를 진짜 적에게 돌리라! 합심해서 일제에 대항하자!"고 외쳤고 전투가 벌어지자 주저 없이 아버지의 자위대에 사격을 가하였다. 이러한 그의 모습은 당시 대원들의 많은 존경을 받았다.
1935년부터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단 1분대의 기관총수로 활약하면서 분대장 박광규와 결혼하였다.
1937년 남편인 박광규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939년4월 안도 서북갓길전투에서 수십 명의 적군을 사살하고 기관총 한정을 노획하였다.
1939년8월 샤오사허 전투에서 부대를 엄호하기 위해 혈혈단신으로 기관총을 들고 적군을 저격하던 중 다리에 부상을 당해 포로되었다.
포로된 후 안도현으로 압송돼 온갖 고문을 당하였고 친부가 나서서 회유하기도 하였으나 끝까지 절개를 지켜서 결국 군도로 난도질당해 옥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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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성숙 열사



이계순(1914-1938)

길림성 연길에서 출생하였다.
1928년 14살의 나이로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주로 정찰과 통신연락 임무를 맡았다. 그 후 중공군에 합류하였다.
만주사변 후 이계순은 일제의 삼엄한 경비에도 몰래 부근 마을에서 야학을 조직하고 반일사상을 선전하며 독립운동을 멈추지 않았다.
1932년 일제의 "토벌"을 피해 중공의 어랑촌 항일근거지로 합류하여 보급을 맡았다.
1935년11월, 인민혁명군을 따라 장백산으로 원정하여 일본군과 싸우기도 했으며 1936년11월에는 장백현 일면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7년 봄, 임신하면서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자 장백현의 한 동굴 속에서 임신한 몸으로 부상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삼엄한 경비때문에 식량을 확보할 수 없자 혼자서 권총 한 자루에 의지해 일본군이 득실대는 산속을 누비며 풀뿌리와 나물을 캤으며 그마저도 어려울 때면 나무껍질을 벗겨 먹기도 했다. 겨울이 되자 허리춤까지 오는 눈길을 수십 리씩 헤치며 식량을 확보하기도 했다.
결국 눈길에 남은 발자국 때문에 일본군에 발각되어 동굴 속에 포위되자 부상자들의 철퇴를 엄호하다가 포로되었다.
그 과정에서 부상자인 이덕수만 포위를 뚫고 나가고 군수부 박 부장은 전사했으며 이계순, 최두 등 3명이 포로되었다.

포로 후 일본 헌병대에 의해 갖은 고문에 학대를 당했으며 젖먹이 아이를 나무에 매달아 태워죽이겠다고 위협도 하면서 회유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의 아이는 당시 감옥 안에서 백룡길이라는 청소공의 도움으로 감옥 소장에게 금가락10개와 500원의 만주 화페를 뇌물로 주며 극적으로 구출되었다.간수소장은 경찰서장에게 아이가 굶어 죽어서 군견에게 던져줬다고 거짓 보고를 하여 이계순의 자식은 살아남게 된다.

아이가 구출된 이튿날 헌병대장이 직접 와서 회유하자 이계순은 사람들이 많은 데서 공개적으로 "회개"를 하겠다고 거짓으로 승낙하는척 했다.
이에 1937년12월26일 일본 헌병대는 장터가 열리는 틈을 타 채찍과 총검을 들이대며 장터로 나온 백성들을 강제로 장백진 녹강촌의 한인소학교에 몰아넣고 이계순 열사를 끌고 와서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회개서"에 지장을 찍으라고 협박했다.
하지만 이계순은 사람들이 모여든 앞에서 "회개서"를 갈가리 찢어버리며 "망국노로 살지 말자! 일제는 반드시 패망한다! 단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자!"고 외쳤으며 당장에서 헌병대 대장이 쏜 총에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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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화가가 그린 이계순 열사가 일본헌병에게 고문 당하는 모습


김순희:(1910-1932)
(1930년 이전에도 독립운동을 한 것으로 추측되나 행보의 기록이 없음)
1931년부터 화룡 시 약수동에서 게릴라전을 조직해 일본군에 대항하였으며 일본군의 시설을 파괴하고 정찰, 통신 등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1932년 11월 30일 일제의 "토벌"이 시작되자 임신한 몸 때문에 미처 피신하지 못하고 숨어있다가 반역자의 밀고로 포로 되었다.
포로된 후 헌병대는 마을 주민들이 보는 데서 구타와 채찍질로 고문을 시작했으며 김순희 열사가 극심한 학대에 실신하면 물을 끼얹어 깨우면서 고문했다.
"회개"하라는 헌병대의 협박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혀를 깨물어 끊고 피범벅이 된 혀를 일본 장교 얼굴에 그대로 뱉어 일본군을 경악하게 했으며 붓과 종이를 던져주며 "회개서"를 작성하기만 하면 살려주겠다고 회유하자 자신의 오른손 식지를 깨물어서 위골시켜 글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악에 받친 헌병에 의해 화형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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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희 열사


허형식:(1906-1942)

중국공산당 북만성위원회 위원, 동북항일연군 제3로군 군장 겸 참모장을 역임. 본명은 허극. 일명 이희산·이삼룡. 경북 선산군 구미면 임은리에서 의병 허필의 아들로 태어나 1915년 부모를 따라 만주 요녕성 통화 현으로 이주했다.

[네이버 지식백과] 허형식 [許亨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만주사변 후 빈현,탕원,주하 등지에서 유격대를 조직해 게릴라전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1938년 동북항일연합군 제3군 3사단 사단장을 맡았으며 게릴라전을 계속하였다.
1940년 일제의 "대토벌"에 거의 전멸하다시피 하지만 소규모의 분대를 이끌고 전투를 견지하였다.
1942년8월3일 흑룡강 경성 청봉령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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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형식 열사

이학복(1901-1938)

(1931년전에도 독립운동을 했을 거라고 추측되나 행보의 기록이 없음.)
본명은 이학만이며 연길사람이다.
1931년부터 중공군에 가입하여 게릴라전으로 일제에 대항했으며 밀고자에 의해 체포되어 사형당할 뻔하였으나 도망쳐서 요하반일유격대에 합류하며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시작했다.
얼마후 구국군제1려단을 설복해 요하반일유격대와 합병하여 구국군독립대대를 결성했다.
1933년12월27일 호림현 전투에서 30여 명의 희생자로 적군 100여 명을 섬멸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1934년 일본군의 공세에 구국군 독립대대가 흩어지면서 이학복은 다시 반일유격대를 조직해 대장직을 맡았다.
1935년 1월29일 이학복은 대원을 거느리고 "토벌"하러 온 일본군과 친일위군을 저격해 일본군 100여 명과 위군 10여 명을 사살하고 위군40여 명을 포로 했으며 50여 정의 소총을 노획하였다. 5월에는 마안산 친일위군초소를 급습해 위군 23명을 포로하고 소총18정을 노획하였다.
9월에는 소남하와 소서산의 일본자위단을 섬멸하고 소총40여정을 노획하였으며 일본군 사령관 다카기노를 포함한 30여 명의 일본군관들과 위군 20여명을 사살하였다.
1936년 동북항일연합군 제4군 제2사단의 부사단장과 제1사단의 사단장직을 맡으며 활동하다가 오랜 전투로 인한 후유증으로 1938년 8월8일 병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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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복 열사


이민환(1913-1936.7):
한민환 또는 김민환이라고도 불리며 함북 출신이다.
어린 시절 연길로 이주하였으며 1929년부터 독립활동을 하였다.
1932년 류하 삼원포에서 일제에 대항해 무장저항을 하였으며 1933년 "농민자위대"를 조직하였다.
1934년 동북항일연합군 제1군 제1사단 참모장직을 맡았으며 부대를 거느리고 류하,청원, 항인,봉성,신빈,목계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7월 마천령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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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환 열사



이복림(1907-1937):
본명은 공도진이며 최동범이라는 이름으로도 활동하였다.
함북 온성군 출신이며 동북항일연합군 제3군 제3사단의 창시자이자 지휘관이다.
1932년부터 본격적인 무장독립활동을 했으며 1933년 동북반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정치위원을 맡았다.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3군 집법처장을 맡으며 송화강 중하류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지휘하여 일본군 백여 명을 섬멸하였다.
1937년 3월 300여 명의 병력으로 600여 명의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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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복림 열사

이제순(?-1945)

함북 길주군 출신이다.1934년 길림 장백현으로 이주하였으며 마을 인근의 한인들을 모아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다.
1937년 봄부터 동북항일연합군에 합류하여 식량 조달과 후근, 정찰 등 임무를 맡았다.
같은 해 10월10일 신흥 촌에서 매복한 헌병대에 포로되었으며 한국으로 압송되었다.
전후로 혜산,함흥과 서울수감소에 수감되었다.
갖은 고문에도 절개를 지키다가 1945년 서울에서 친일파에 의해 살해되었다.



김정국(1916-1938)

중국 요녕성에서 출생하였다.
1922년부터 삐라를 살포하고 구국강의를 하는 등 독립활동을 하다가 1930년 중공군에 합류하였다.
1933년말, 탕원반일유격대를 조직하고 지도원을 맡았다.
1936년 100여 명의 대원을 거느리고 화천현 친일위군대대를 급습하여 20여 명을 사살하고 170여 명을 포로 하였으며 소총과 기타 무기 200여 정을 노획하였다.
1937년 가을, 화천 현에서 10여 명의 적군을 사살했으며 4대의 황금운송차량을 빼앗아 소총 백여 정과 많은 황금을 노획하였다.
얼마후 화천현 맹가강에서 일본군 기병부대 700여 명을 유인해 300여 명을 섬멸하고 소총200여 정,기관총10정을 노획하였다.
같은 해에 부대를 10월 항일연합군 제 11군으로 개편하였으며 제1대대주임 겸 제1여단 주임을 맡았다.
그의 부대는 1500여 명에까지 발전하였으며 화천,부금,동강일대에서 활동하였다.
1938년 봄 "포위토벌"을 감행하는 일본군에 저항해 싸우면서 적군 500여 명을 섬멸하였으나 군장 장치국을 비롯한 80여 명의 지휘관과 많은 간부가 전사하였다.
김정국은 십여 명의 부대원들을 거느리고 간신히 포위를 뚫고 나왔지만 1938년 화천 현에서 활동할 때 반역자에게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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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국 열사가 지휘했던 동북항일연합군 11군의 기병부대


김근(1903-1937)

본명은 김광진이며 함북 경흥군 출신이다.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전후하여 화룡현 북장동과 대산동 소학교(초등학교)교장을 맡으면서 한인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설파하는 등 독립운동을 하였다.
1930년 중공군에 합류하여 왕청현에서 40여 명의 청년을 모아 유격대를 조직하여 게릴라전을 시작했다.
1932년 6월 23인으로 구성된 북만공농의용대를 조직하여 대장을 맡았다.
1934년 밀산유격대를 건립했으며 양수림에서 150여 명의 친일위군과 조우하여 격전 끝에 위군 지휘관을 비롯한 10여 명을 사살하여 격퇴하였다.
1937년 12월3일 김근의 경위대에 반역자가 생겨 김근의 처소에 난입해 총으로 협박하여 일본군에 투항하게 하려 했으나 김근은 굴하지 않고 끝까지 절개를 지켰으나 결국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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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 열사

한호(1905-1935)

본명은 김한걸이며
만주사변후에 반석공농의용군에 가담하였다.
1932년 중공군 제32군 남만유격대 제2대대 대대장을 맡았으며 1933년 9월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단 제3분대 분대장을 맡았다.
유격대를 지휘하여 게릴라 전투를 했으며 민중을 조직해 반일회, 농민자위대 및 청년 의용군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1934년 11월 동북인민혁명군 1군 1사단의 부사단장을 맡았으며 제1군 제1사단 사단장인 이홍광이 희생된 후 사단장직을 맡았다.
1935년 8월 일본군 수비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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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호 열사


한진(1900-1936)
서울 출신이며 3.1운동에 가담하였다.
3.1운동 후 일제의 박해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하였으며 1928년 길림성 반석 현으로 이주하였다.
1930년 중공군에 합류하였으며 1932년 남만유격대에 가담하였다.
1933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독립사단 정치위원과 제1사단 군수부장 등 직을 역임하였다.
로투딩산부근에서 게릴라전활동을 했으며 1936년 3월 2일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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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 열사

박한종(1911-1935)
경상도 출신이며 1919년 숙부를 따라 중국 요녕성 청원현으로 이주했다.
1927년부터 독립활동을 하였으며 1928년 반석현으로 이주한 후에도 계속하여 독립활동을 하였다.
만주사변 후 중공군에 합류하였으며 1933년 남만유격대 제1대대 대대장을 맡아 전후하여 일본군의 4차례 포위공세를 물리쳤다.
그 뒤로 1934년까지 게릴라활동을 계속하다가 1935년 1월 친일위군 기병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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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종 열사

박선봉(?-1938)
한인이며 본명이 김선봉이라는 것 외에는 신상자료가 없다.
행보 자료도 극히 적어 동북항일연합군 제1로군 경위단 제3여단장이며 1938년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기록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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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봉 열사가 소속했던동북항일연합군 참모진

유만희(1917-1940)
경상도 안동군 출신이며 1925년 중국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했다.
만주사변 후 본격적인 독립활동을 했으며 비밀첩보임무를 맡기도 했다.
1933년 중공군에 합류했으며 동북항일혁명군 제1군 통신병으로 편입되었다.
유만희가 독립활동을 한다는 것이 알려지자 헌병대는 그의 어머니와 두 동생을 잔인하게 생매장하였다.
1935년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 제1사단 청년과장으로 임명되어 류하와 오도구,남산성부근에서 게릴라전활동을 하였다.
1940년 임강 일대의 수림 속에서 적군과 조우하여 팔에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저항을 견지하였다.
나중에 부대가 거의 전멸되다시피 하자 반역자에 의해 살해되었다.

조오선(?-1938)
한인 여성이라는 것 외에 알려진바가 없다.
1938년 4월 8일 동북항일연합군이 쟈자이수이촌에 있는 일본군 요새를 공략할 때 길을 안내했으며 적군에게 발각되어 몸에 여러 발의 총탄을 맞았는데도 끝까지 이를 악물고 도끼로 적군 요새의 대문 빗장을 부러뜨려 열고는 그대로 쓰러져 전사하였다.
그 덕분에 항일연합군은 쉽게 일본군의 요새를 점령할 수 있었다.


그외의 열사들:

1936년 11월 7일 소탕하 전투에서 연길현 항일유격대가 일본군에 포위되자 정치위원이었던 김산호는 홀로 여러 정의 기관총으로 일본군을 저격하다 전사하였으며 분대장이였던 원금산은 돌격 중에 전사하였다.  군장인 왕덕태 역시 직접 기관총을 들고 싸우다가 머리에 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그 외에 전투에서 1사단 참모장인 이민환, 2사단 군수부장 박상활, 조직부장 이동광 등이 전사하였다.

중국 측의 통계에 의하면 동북에만 해도 62,942명의 한인이 항일전쟁에 뛰어들었으며 연변지역에만도 13,450명의 한인 열사가 있다고 한다.
또한 이 수치에는 중공군 계열의 독립투사들만 통계 되었을 뿐이고 장제스 계열과 기타 소규모 독립단체들을 합하면 두 배를 훨씬 넘을 것이다.
당시 재중한인의 인구가 67만 명이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거의 집마다 한 명씩은 독립투사였던 셈이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조선족들에 대해 "산마다 진달래요, 마을마다 열사들의 묘지네(山山金达莱,村村烈士墓)"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부록:
일제가 조선족에게 저지른 만행:

해란강 대학살:
 1931년부터 1932년에 걸친 일제의 장기적 대학살사건이다.
 일제에 저항하며 마을을 지키던 조선족 유격대가 반역자의 밀고로 일제 정예부대의 공격에 전멸하면서 인근 마을까지 모조리 화를 입은 사건
총 희생자는 4000여 명이며 그중 조선족은 1700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기록에 의하면 화련리는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합류하는 곳이며 용정과 화룡으로 통하는 길목이라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이에 화련리의 한인들이 중공의 후원하에 200여 명의 유격대를 조직해 일제와 맞서 싸웠는데 일제가 화련리를 장악하는 데 심각한 위협을 주었다.
악에 받친 일본군은 용정에 주둔해있던 일본영사관의 군경들과 보안대, 그리고 친일자위단까지 긁어모아 무려 94차례의 "토벌"을 감행했다.

조선족 유격대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결국 반역자인 백창헌의 밀고로 거의 전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유격대원 김학선의 7살 된 아들 김석송은 일제의 총검에 무참히 살해됐으며 그의 임신한 아내와 3남매는 묶인 채 산채로 화형당했다.
또 다른 유격대원 박원석은 잔인하게 사지를 절단당한 채 물이 펄펄 끓는 가마 속에 던져졌다. 유격대원 김규식은 눈알을 뽑힌 채 일제의 몽둥이질에 처참히 희생됐다.
유격대원 우일남은 총알이 떨어지자 맨주먹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총검에 희생됐으며 그의 아내는 헌병대에 붙잡혀 옷을 벗기우고 온갖 매질과 수모를 당하다가 산골짜기에 버려져 숨을 거두었다.

그 외에도 김명호,김용주,이상근,장상순,김정규등  백여 명의 유격대원들이 살해되거나 전사했으며 장시우를 비롯한 30여 명의 유격대원만이 일부 노약자들을 데리고 포위를 뚫고 나와 살아남았다. (자료출처:일본군 폭행록:지린편)
그리고 수천 명에 달하는 일반 백성들은 일제가 총알도 아깝다고 손발이 묶인 채 구덩이에 던져져 그대로 생매장을 당했다.

로투구 만인갱

동서로1000미터,남북길이 700미터가 안되는 갱도 속에 만여 구에 달하는 조선족 노동자의 시체가 묻혀있다. 상당수의 아동으로 보이는 시체도 있으며 목에는 철사가 묶여있고 뼈 여러 군데가 골절되여있는 시체가 많았다. 시체 수는 100900구가 넘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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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투구 만인갱 발굴현장

아래는 그 친구가 자료 맨 밑에 적은 글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공산당에 가입한 사람들을 독립투사로 안칩니다.
공산당에 든 사람은 조선족이며 한국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또 조선족은 중국인이기 때문에 중국을 위해 싸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요, 그시절에는 조선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신분은1952년에야 생겼습니다.
그전에는 그냥 중국인이 아닌 조선사람이였습니다.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 "한인"이란 말입니다."
그들이 일본놈들과 싸울때 중국을 위해 싸우겠습니까 아니면 한국을 위해 싸우겠습니까?

전쟁이 끝난후에 한국과 북조선은 다 중국에 남겨진 조선족을 외면했습니다.
북조선은 교포증이라도 발급했지 한국은 아예 건너갈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에 남은 겁니다.
소수민족이라고 멸시를 받으면서 말입니다.
우리들 대부분은 이 땅에서 피흘리면서 싸운 열사들의 후예들입니다.
중국은 친일청산 하나는 철저하게 잘해서 매국노들은 대부분 처형됐고 심지어 일본인과 가깝게 지내던 사람들도 다 투쟁을 맞았습니다.
남은건 다 알짜로 일본놈들과 싸웠던 사람의 가족들입니다.
우리가 무슨 독립투사로 대우해 달라는게 아닙니다.
적어도 같은 민족으로써 대우를 해줄수는 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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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읽고서 어쩌면 우리가 조선족에 대해서 생각보다 훨씬 더 잘못 알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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