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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논란 종결좀 짓자 일베충들아
게시물ID : sisa_17594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럭셔림
추천 : 2/5
조회수 : 559회
댓글수 : 13개
등록시간 : 2012/03/05 23:24:25
http://www.ilbe.com/index.php?mid=polilbe&search_target=title&search_keyword=친일&document_srl=40001221

여기 일베충이 올린 자료에도 [소극적 친일] 이라고 하잔냐.


박정희에 관해 딱 세가지 팩트가 있다면

1. 만주군 장교. (당시 만주 괴뢰군이 뭐 하는 단체인지는 근대사가 말해준다. 모르면 배우고와)

2. 남로당 빨갱이. (반도의 모스크바라 불리우던 대구에서 남로당에 심취해 있다 동료팔고 살았다.)

3. 경제발전을 시킨 대한민국의 역군.


이 세가지는 아무도 부정 못하는 팩트 아니냐.?


여기서 뭐 소극적 친일이니, 만주군에서 취사장교 였느니, 경제발전은 국민이 했다 라든지

의견은 갈릴 수 있다만

위의 세가지가 사실인건 박정희 할애비가 와도 사실 아니냐.



자꾸 반대먹어서 하나 더 쓰자.



대구폭동이라고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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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하에서 암약(暗躍)하는 공산당의 불법활동을 근절하기 위하여 1946년 9월 7일 박헌영(朴憲永)·이강국(李康國)·이주하(李舟河) 등 조선공산당 간부에 대한 검거령을 내렸다. 이를 눈치챈 박헌영과 이강국은 북으로 넘어갔고, 이주하는 체포되었다. 공산당은 이러한 사태에 대한 반발로 여러 가지 파업과 폭력사건 등을 유발하려고 책동하여 9월 24일 전국적인 규모의 철도파업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출처] 대구폭동사건 [大邱暴動事件 ] | 네이버 백과사전

대구폭동사건은 대구노동평의회측과 경찰의 충돌이 폭력사태로 발전되면서 격화되었다. 10월 1일 오후에 수천 명의 공장 근로자들이 적기가(赤旗歌)를 부르면서 시위를 시작, 금정로(錦町路)에 있는 노동평의회 본부로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경찰은 이 불법시위자들을 해산시키려고 공포를 쏘며 제지하였다. 

이날의 데모는 밤늦게 진압되었지만, 군중은 2일 아침 일찍부터 다시 시위를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은 경찰서를 습격 점령하고 무기를 탈취하였고, 경찰관이나 고급관리 및 사회 주요인사들의 집을 습격하는 등 완전히 폭도화하였다. 폭도의 일부는 이웃 달성(達城)으로 달려가 그곳 경찰서를 습격하고 군청을 불사르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다. 이 난동으로 경찰관 여러 명이 살해되었고, 달성 군수 등 여러 명이 불에 타 죽었다. 

[출처] 대구폭동사건 [大邱暴動事件 ] | 네이버 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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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빨갱이들이 일으킨 폭동이여.

이렇게 전과가 있으니 광주항쟁을 광주폭동이라 하여 빨갱이가 사주했다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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