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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ID : gomin_175966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YWloY
추천 : 3
조회수 : 289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8/10/11 22:5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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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년의 연애가 끝났다. 

X년 전 당신은 어렸고 나는 아저씨가 되고 있었다. 

우연한 인연이 얽혀 우린 처음 만났다. 

그날 난 전날의 과음으로 두 눈이 충혈되고 수염이 거뭇하며 피곤으로 몸과 정신이 피폐했다. 

당신은 풀메이크업에 딱 떨어지는 정장 차림. 보도블럭을 걷기엔 너무나 위험한 하이힐이었다. 

그럼에도 

어쩐지 속웃음이 나는 앳된 나이었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립스틱으로 부리만 빨간 병아리 같이. 

처음부터 어째서인지 당신은 나를 좋아해 줬다. 

당신에게 그렇게 관심이 없어보이는 남자가 처음이라고 했다.

알고보면 그렇게 큰 나이 차이는 아니었지만 또래라고 볼 수는 없는 터울이었다. 아직 연애 경험도 적고 사람과 관계를 맺으며 중심을 잡는 법도 배우기 시작할 때인 당신이 나는 조심스러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로망. 학창시절에나 꿈 꿀 법한 더벅머리의 털털하고 살집도 좀 있는- '아저씨'같은 남자. 

어쩐지 '어른'으로서의 남성에 대한 로망이 있는 당신이 보내오는 호감 표시는 더욱더 나를 조심하게 만들었다. 

심지어 첫 만남은 그랬지만 난 깔끔한 걸 좋아하는 데다 군살이 붙는 것을 싫어하는 운동파란 말이지.  
   
그것도 잠시. 당신의 연이은 공세에 난처하게 웃으며 흘리기만을 석달, 결국엔 함락당했다. 

걱정이 되었다. 

나는 여유있고 안정된 성인 남성이라기엔 여물지 못했고 감당하기 어려운 목표를 말 그대로 감당치 못하면서도. 차마 놓지 못하고 있는 고집쟁이일 뿐이었으니까. 

연애 초반엔 그래서- 나름 무리를 했다. 

당신이 가진 동경 비슷한 것을 깨고 싶지 않아서. 

 실제론 비루하기 그지없는 내 삶을 '가난하고 손가락질 받아도 끝까지 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 으로 포장했다. 
 
솔직히 말해서. 능력도 없는 사람이 꿈을 좇을 때의 모습은 어딘가의 뮤지컬이나 영화 등등에서 다뤄지는 것과는 굉장히 다르다. 말 그대로.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아무리 보고 듣고 읽어도. 극적인 고통이나 노력 같은 거랑은 멀다. 그런 처절한 순간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미지근하게. 비루하고 비루하며 그와중에도 비루할 뿐이다. 뭐, 적어도 나는 그랬다.  
   
어쩌면 이루고 싶은 꿈에 대한 내 태도도 그렇고 이건 몹쓸 버릇인것 같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인간이 일단 몸을 던져넣고 간판이라도 짊어지고 나면 무언가가 되는 날이 올거라는 식의. 

주변에 폐를 끼치는 버릇. 

그러나 X년이다. 

나는 한결같이 당신을 사랑했다. 

당신은 조금씩 벗겨지는 내 허울을 보면서도 나를 여전히 사랑했다.

당신은 어엿한 성인 여성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그랬다. 

그래도 X년을 너무나 잘 만났다. 우리는 서로를 존중했고. 이해하려고 노력했고. 애정어리게 서로를 보았다. 

그리고 얼마전 당신은 내게 화를 냈다. 

사소한 일이었다. 

충분히 설명할 수 있는 일이었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그게 헤어짐으로 이어질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기분을 잘 다독여야겠다, 요즘 좀 힘들었나보다, 아니면 뭔가 특수하게 마음 상할 이유가 있었나보다, 그간 어느정도 서로 감정의 역린이 되는 부분들은 파악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조심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 분노 끝에 헤어지자는 말이 나왔다. 

심지어 문자로.  

세상에나.
   
머리가 마비되고- 같은 문장을 몇 번 씩이나 읽으면서, 현실을 부정하는 말도 안되는 가정들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해결할 수 있어. 별 문제가 아니었잖아. 도의적으로도 실리적으로도 딱히 문제가 없는 일이었잖아. 상황에 대한 이해가 되고, 감정이 잦아들면, 돼, 되는 일이야. 그럴리가 없어. 

그리고 한편으론 어쩔 수 없는 배신감도 고개를 조금 들어왔다. 

그러나 내가 미처 대응할 문장을 만들기도 전에- 이어진 당신의 장문의 문자에 나는 그만 아득해 졌다. 

이미 당신은- 그동안.. 내가 간판 밖에 없는- 그저 껍데기같은 인간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내게 실망했던 점, 한심했던 점, 애둘러 주의를 줬는데도 멍청하게 못 알아들은 것들. 

역시나. 사소한 일은 방아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녀와 만나던 중 문득 내 비루한 삶 때문에 당신에게 마음만큼 잘해주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몰래 흘리던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와 다투다가 나로 인해 상처받았다고 말했을 때 느꼈던 가슴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딱 한 번 사귀면서 헤어질 뻔 했을 때 집으로 혼자 걸어가던 중에 다리에 힘이 풀려 벤치에 앉아 쉴 수 밖에 없었던 증상도 오지 않았다. 

그 모든 감정들 조차 사치라고 느껴질 정도로 미안했다. 

분명 첫만남부터 생각했을 터였다. 어리고 예쁜. 이제 막 피어나는. 그런 사람이니까. 다치게 하지 말아야지. 절대로 나쁘게 하지 말아야지. 

그랬는데. 당신이 보여준 믿음에 나는 

어떤 방법도 보상이 될 수 없었다.

인생을 낭비시켰다. 

업보라고 불러도 좋을 죄다. 

그래서 그저. 미안했다고. 너무 미안하다고. 말 할 수 밖에 없었다. 최악이다. 사랑했던 사람이 믿었던 남자가 마지막으로 남기는 말이 미안하다라니. 그 말을 남기는 것 자체로도 미안한 짓인데.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 조차 미안한 사람 인생 연애 남자라니. 

 내가 싫다.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혹여 내게 동정하는 사람은 없기를 바란다.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저. 대나무숲에 외치는 그냥 그런 거다. 위로는 됐습니다. 

무엇보다. 이 미안함이라던가 업보라던가 못남이

재능도 없으면서 꿈을 좇은 멍청함에서 비롯되었을텐데

나는 이런 일을 죄를 짓고도 

계속 할 작정이다. 

그렇게 미안하다고 해놓고 정신 못차리다니 저건 진짜 미안한게 아냐! 진심이 아니네. 라고 욕해도 좋습니다. 아니 욕이 아니지. 사실을 말한 거지..  그게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라면. 내가 그런 나쁜놈이겠지. 죄를 짓고도 미안해요 하고 주둥이나 놀리는. 천하의 잡놈.  
 
.. 그래도 대신 부모님께는 더이상 죄를 늘릴 수 없으니 돈이 될 일도 겸해야겠다. 

계속 한다는 내 꿈. 내 일이. 잘 될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냥 하다가 죽으면 그 뿐이다. 

진짜 민폐다. 

단지

이제 연애는. 정말 

못할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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