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구조를 분석하는 사람이다. 이 글도 구조의 관점에서 쓴다. 구조가 전부는 아니지만 핵심이다. 독자 여러분도 구조의 관점에서 읽어주기를 바란다.
구조로 본다는 것은.. 영화를 보되 그냥 재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TV나 소설과의 차이점에 주목해서 본다는 것이다. ‘문과’ 보다는 ‘이과’의 눈으로 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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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가 관객의 호응을 받는 바람에 평론가들 꼴이 우습게 되었다. 한국의 그 많은 영화평론가들 중에 영화와 TV의 본질적인 차이를 아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이렇게 밝혀진 거다. 코미디다. 코미디.
관객의 반응이 극과 극으로 팽팽하게 엇갈린다고 보도한 오마이뉴스도 조중동식 거짓보도를 한 셈이다.(개봉 첫날에 보러 간 사람이라면 심형래 팬이 많을 텐데.. 기립박수를 친 것은 오마이뉴스식 색안경 보도에 대한 항의?)
디워를 함부로 혹평하는 사람은 영화의 본질을 모르는 사람이다. 영화와 TV와 소설을 구분할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 ‘현대성’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다. 19세기 마인드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묻노니 당신은 현대인인가?
1865년 살롱전에서 마네의 올랭피아를 보고 격분하여 우산대로 찌르려고 한 사람들이 있다. 평론가 수준이 딱 그 수준이다.(인상주의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소동 - 평론가들이 혹평함은 물론 관객들이 스틱으로 그림을 훼손하려 해서 스틱이 닿지 않는 천장 밑으로 옮겨 걸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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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들은 죠스의 한 장면을 표절(?)하고 있다. 상어가 입을 벌리고 확 달려드는 장면 말이다. 이거 하나 가지고 먹고 사는 거다. 쥬라기 공원이 대표적이다. 상어에서 공룡으로 바뀌었을 뿐 본질이 같다.
그는 72년에 ‘대결(Duel)’이라는 영화를 연출했는데 스필버그의 모든 것은 사실 이 영화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사나이가 길에서 우연히 마주친 대형트럭에 계속 쫓기는 내용이다. 그게 전부다. 그냥 쫓긴다.
잘 살펴보면 이 영화의 요소요소에 죠스가 숨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디애나 존스 시리즈를 비롯하여 스필버그의 모든 영화들에 죠스가 아가리를 벌리는가 하면 뒤에서 대형트럭이 뒤에서 쫓아오고 있다.(터번을 쓴 아랍인 수십 명이 신월도를 휘두르며 쫓아오지만 잘 살펴보면 그게 72년의 트럭이다.)
죠스 혹은 트럭, 혹은 공룡.. 모퉁이를 도는 순간 시커먼 것이 확 달려든다. 문제는 그게 전부라는 거다. 내용이 없다. 어쨌든 그것이 블록버스터라는 개념을 만들었고 70년대 컬러TV의 공습으로 부터 영화시장을 지켜냈고 오늘날 헐리우드의 존립을 가능케 했다.
(컬러TV가 등장하자 영화시장이 붕괴될 판.. 헐리우드는 부활, 십계, 벤허, 클레오파트라 등 거액의 제작비를 들인 대작으로 돌파하려 했으나 대략 실패.. 스필버그라는 구원투수 등장.. 이건 전에 여러 번 한 이야기.)
스필버그가 없었다면 헐리우드는 컬러TV의 무자비한 공습에 속절없이 무너졌을 것이다. 헐리우드=스필버그이다. 스필버그=죠스다. 죠스는 걍 확 덮치는 거다. 그게 전부다. 그게 영화다. TV로는 결코 보여줄 수 없는 것.
늘 하는 이야기지만.. 80년대 한국영화가 부진했던 이유는 한국에 스필버그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포는 모퉁이 뒤에 숨어 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다.
먹물 평론가들이 열심히 떠드는 것들.. 그거 영화가 아니라 TV나 소설로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거다. 영화를 논하려면 소설로는 절대로 전달할 수 없는 것, 컬러TV로는 죽었다 깨나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을 논해야 한다.
조폭마누라가 평론가의 혹평과 상관없이 리메이크 판권은 제일 먼저 팔린 데서 보듯이.. 영화는 다른 거다. 영화를 보는 눈으로 영화를 평가해야 한다. 스필버그로 부터 시작되는 그것.. 어떤 알맹이가 있다.
한국의 평론가들은 아직도 스필버그 이전시대를 살고 있다. 회화로 말하면 인상주의의 등장 이전 아카데미즘이 지배하던 시대를 살고 있다.
혹자는 스필버그가 블록버스터를 만든다 해서 비판하지만 죠스도 알고 보면 저예산 영화다. 대결(Duel)은 그냥 트럭 한 대로 시작해서 트럭 한 대로 끝난다. 암것도 없다. 그런데도 영화가 된다. 그 본질을 포착했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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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가 흥행할 조짐이다. 또 평론가들 바보 되게 생겼다. ‘나홀로집에 2편’을 연상시킨다. 평론가의 혹평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다. 그런데 왜 관객들은 나홀로집에 2편을 좋아하지?
그걸 이해못했다면 영화를 논할 자격이 없다. 왜 고흐의 그림값이 그렇게 비싸지? 그걸 모르고는 회화를 논할 자격이 없는 것과 같다.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나홀로집에 속편의 주목할 점은.. 이 인간들이 프로라는데 있다. 존 휴즈와 크리스 콜럼버스.. 이 인간들은 영화의 본질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베테랑인 것이다.
이들은 흥행공식을 완벽하게 터득한 사람처럼.. 속편은 전편보다 못하다는 속설을 깨고 허접한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관객들의 기대치를 충족시켰다는 것이다.
좋은 시나리오로 좋은 영화 누가 못 만드나? 허접한 시나리오로도 그럭저럭 관객이 드는 영화를 만들 수 있어야 진짜다.
영화의 어떤 본질은 잡아채고 자질구레한 껍데기를 놓치느냐 아니면 껍데기는 그럴듯한데 알맹이가 빠졌느냐다. 그 알맹이를 아는 사람이 없다. 대부분 사회성을 반영하는 작가의 주제의식이 그 알맹이라고 믿고 있는데 그건 소설이나 TV에서 먹히는 이야기고 영화는 다른 거다.
한국의 경우.. 대박영화를 만든 감독들도 다음 영화는 죽을 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의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이다. 곽경택은 ‘친구’를 성공시켰지만 아직도 친구의 성공요인을 모른다.
강우석이 ‘마이 뉴 파트너’를 베껴 투캅스를 만들 때는 적어도 뭔가를 알고 베낀 것이다. 그러나 투캅스의 허접한 총격전은 당시 맹위를 떨치던 홍콩영화를 그렇게 많이 보고도 거기서 아무런 교훈도 받지 못했다는 증거다.
투캅스 속편에서는 총격전 장면에 제법 공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보기에는 여전히 허접했는데 강우석은 아직도 홍콩영화의 진짜 의미를 모를 거다.
홍콩영화에 숨어 있는 서부극의 어떤 느낌(홍콩영화는 서부극을 베꼈고 서부극의 일부는 또 일본 사무라이 영화를 베꼈다.)이 강우석의 총격씬에는 없다. 그렇게 보고도 베끼지도 못하냐? 마이뉴파트너는 잘 베끼면서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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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CG 들어간 판타지를 좋아하지 않는다. 반지의 제왕을 보는 건 고역이었다. 30분 쯤 보다가 잤는데 시끄러워서 자다가 서른 번도 더 깼다. 그래도 영화가 끝나지 않고 있는 거다. 체감 시간 10시간 이상.. 일행이 있어서 중간에 나올 수도 없고 좁은 극장의자에 앉아서.. 죽는 줄 알았다.
그래도 그런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존중해야 한다. 내 취향은 아니지만 말이다. 괴수영화는 괴수영화 마니아의 관점에서 비평해야 한다. 이건 상식이다. 그러나 디워를 논하는 평론가 중에서 그 원칙을 지키는 이는 없더라.
심형래에 대해서는 사실이지 관심 없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뱀이다. 어쨌든 심형래가 뱀(?)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심형래가 그래도 펭귄흉내나 땡칠이 흉내를 비롯하여 동물의 동작을 잘 관찰하는 재능이 있는데 그 장기가 발휘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예컨대 고질라.. 귀여운 뚱뚱곰이 아닌가. 세상에 누가 고질라 따위를 무서워하겠는가? 그러나 뱀은 본능적으로 무서워하게 되어 있다. 이건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유전인자에 각인되어 있는 거다.
언젠가 지방도시의 작은 실내 동물원에서 타조를 본 일이 있는데 저쪽에 있던 타조의 머리가 순식간에 확 날아와 꽂히는 거다. 타조는 목이 기니까. 타조의 긴 목이 인간에게 공포를 줄 수도 있다.
스필버그.. 그에게는 공포를 포착하는 본능이 있다. 인간이 어떤 상황에서 소름이 확 돋고 비명을 꽥 지르는지 안다. 플롯은 불필요. 시각효과만으로 충분히 관객을 긴장시킬 수 있다. 히치코크 다음으로.
괴수영화에서 공포를 유발하는 주체들은 대략 감정이 없다. 대결의 트럭, 죠스, 공룡, 에이리언, 고질라.. 감정이 없다. (예컨대.. 인간은 대상의 ‘눈’이 보이지 않으면 무서워한다. 심형래가 디워의 눈을 크게 만들었다면 재롱둥이 용가리처럼 귀여워 지고 만다. 눈을 통해서 상대의 감정을 읽으면 무서움이 사라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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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심형래가 디워의 성공요인을 알고 있느냐다. 스필버그는 자신의 성공요인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두고두고 써먹었다. 그의 모든 영화에 Duel과 죠스가 숨어 있다. 그런데 심형래는 이제 코미디를 만들겠다고 한다.
코미디는 국적이 잘 드러나는 영화다. 미국 코미디가 한국에서 안 먹힌다. 찰리 채플린처럼 철저하게 슬랩스틱으로 간다면 몰라도.. 개그로 미국인을 웃기려면 거의 불능이지 싶다.
또 디워에서 주목할 부분 중 하나는 ‘빠르다’는 거다. 뒤뚱뒤뚱 걷는 용가리나 고질라는 빠르기가 불능이다. 속도감을 나타낼 수 없다. 뱀은? 뱀은 빌딩숲 사이를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뱀은 생긴 것 자체에서 속도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이무기에서 용으로의 변신.. 이 점도 중요하다. 트랜스포머의 변신에서 보듯이 인간은 변신에 감격한다. 이 또한 본능이다.
예컨대.. 슈렉의 피오나공주는 끝내 백설공주로 변신하지 않았다. 어떤 다섯 살 소녀는 슈렉의 엔딩장면에서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기대하던 변신이 나오지 않았으니까. 이런 식이면 작품의 완성도라면 몰라도 관객에 대한 서비스는 꽝이다.
헐리우드의 해피엔딩 관습은 완성도를 희생시키면서 서비스를 하는 거다. 그 서비스는 ‘변신’이어야 한다. 해피엔딩은 변신의 한 가지 기법에 불과하다. 인간은 언제라도 변신을 욕망한다. 예컨대.. 미녀는 괴로워도 변신이 주제다. 성형이 아니라.
모든 소녀의 꿈은 결혼식이다.(비유다. 오해하지 말기) 결혼 그 자체가 아니라 실은 변신을 원하는 거다. 디워의 마지막 장면은 그러한 관객의 기대를 충족시켰다는 점에서 영화의 어떤 본질을 꿰뚫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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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회화는 인상주의로부터 시작된다. 그 이전의 아카데미즘은 성경의 메시지나 그리이스 신화에서 빌어온 고전적 이상주의를 앞세웠다. 그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했느냐가 가치판단의 기준이다.
인상주의는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를 위주로 한 ‘내적 정합성에의 도달에 성공했는가가 기준이다. 공포영화라면 충분히 무서웠느냐가 기준이다. 다른 건 무시된다. 그래서 마네의 ‘피리 부는 소년’은 동양화처럼 여백이 있다. 집중을 방해하는 불필요한 배경을 치워버린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미학이다. 정통서부극에는 그것이 있다. 서부극의 규칙이 있는 거다. 마카로니웨스턴에도 그것이 있다. 정통 서부극과는 다르지만 나름대로의 규칙이 있다. 홍콩영화에도 그것이 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마니아가 생겨난다.
마니아란 무엇인가? 자기류의 규칙에 심취한 그룹이다. 괴수영화라면 괴수영화는 이래야 한다는 규칙을 정해놓는다. 그것이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다. 그 질서가 내적 정합성에 도달했는가를 완성도로 치는 거다. 그 한 가지 기준을 두고 일관되게 밀어붙였느냐는 거다.
나는 지금껏 한국의 평론가 중에서 이러한 본질을 지적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 작가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가 아니라.. 이와 동떨어진 고전적 아카데미즘의 규칙을 따르고 있더라. 예컨대 누드를 그릴 때는 반드시 여신을 그려야 하고 전신스타킹(?) 입은 것처럼 피부의 윤곽을 희미하게 해야 하고.. 등등의 쓸데없는 규칙. 모네와 마네가 단숨에 깨뜨려버린 규칙. 세익스피어가 무시한 규칙.
문제는 심형래가 과연 심형래 자신이 주장하는 조형적 질서가 무엇인지 알고나 있느냐는 거다. 히치코크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그의 영화에는 뛰어난 천재적 직관과 모순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한다.
사이코.. 목욕탕이라는 밀실이 주는 공포.. 숨이 막히도록 관객을 조이다가 갑자기 카메라가 휑하게 넓은 공간을 비춰서 우습게 되어버리는.. 그는 천재의 본능을 따라갈 뿐 자신의 성공요인을 자신이 모른다.
스필버그는 그것을 알았지만 히치코크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한 작품 안에 걸작의 요소와 태작의 요소가 섞여 있다. 디워의 성공요인이 심형래의 직관적인 판단에 따른 일회성의 성공이라면 문제가 있는 거다.
블록버스터의 의미는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영화를 만듦으로써 이를 토대로 자본을 유치하고 시장의 파이를 키우는데 있다. 그런데 운으로 성공한다면?
충무로는 아직도 블록버스터 공식을 완성하지 못했다. 실미도나 태극기 휘날리며는 속편이 나올 수 없는 영화다. 시나리오가 부실해도 성공할 수 있어야 진짜다. 속편이 무더기로 성공하고 아류작이 덩달아 성공해야 진짜다. 속편과 아류작은 시나리오가 부실할 수밖에 없으니까.
모네와 마네가 포착한 그리고 고흐와 고갱이 포착한 그리고 스필버그와 히치코크가 포착한 영화의 어떤 본질을 포착함으로써 성공하게 된다면 속편과 아류작이 무수히 성공하므로 시장이 전체적으로 확대되지만.. 좋은 시나리오만으로 승부하면 어차피 좋은 시나리오는 일본만화(올드보이, 미녀는 괴로워, 복면달호 등)에서나 빌어올 수밖에 없으므로 한계가 있다. 인구 5천만 안에서 좋은 시나리오의 수는 어차피 제한되어 있다. 이건 답이 없는 거다.
남의 것도 제 것으로 만드는 헐리우드의 왕성한 식욕은 영화의 어떤 본질을 포착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본질을 포착하지 못했다면 삶의 양식에서 현대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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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우물 안에 개구리들이 와글대고 있는데.. 밖에서 한 마리 엉머구리가 안으로 풍덩 뛰어들며 파문을 일으킨다. 그리고 대갈일성.. ‘너희들은 왜 비좁은 우물 안에서 그러고 있니? 저 바깥에 넓은 세계가 있다구!’.. 그런데 과연 바깥에 신세계가 있었느냐 아니면 그게 구라였느냐다.
심형래는 충무로 바깥의 신세계를 주장한 거다. 300억을 들여 메이플라워호를 띄운 거다. 이것이 본질이다. 이러한 본질에 주목해야 한다. 문과 마인드 버리고 이과 마인드로 보면 보인다.
디워를 보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이건 본격 영화평이 아니다. 영화를 빌어 실은 구조를 말하는 거다. 영화의 관점에서는 디워를 보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구조의 관점에서는 그래도 봐두어야 할 영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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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평론가들이 마네의 올랭피아를 비난했지만 오직 '에밀 졸라'가 올랭피아의 진가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한국의 평론가들 중에는 한 명의 '에밀 졸라'가 없다.
"마네는 그림의 수용에서 표피적인 관객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림의 테마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네에게 테마는 단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마네는 살아있는 색채들의 대립과 신선한 금빛을 추구했다, 다소 우연이긴 하지만 '풀밭 위의 식사'에 나체의 여자가 등장하는 것은 마네가 살색을 그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밀 졸라. 1867)"
"심형래는 '표피적인 평론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주제의식 따위에 신경 쓰지 않는다. 심형래에게 플롯은 단지 이무기를 소개하기 위한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 심형래는 시각효과의 긴장감을 살릴 수 있는 역동적인 액션을 추구했다."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