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세기경 신라인들은 비행기를 만들었다??
글쓴이: 천지화랑
지금으로부터 삼국시대인 1300여년 전 한반도에서 중국의 장안 까지 도달하는 시일이 한달여 정도였다고 하면 가히 믿을 수 있을까?
(참고 : 당나라 장은은 지금의 상서성 서안으로 지도에서는 빨간색 바탕에 "싼시"라 써 있는 곳)
삼국시대의 후대인 조선시대에는 조선에서 중국까지 사신을 파견하노라면 으례 1여년이란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 선대인 삼국때보다 조선의 교통여건이 더 좋을 텐데도 조선의 사신들은 중국으로 가는데 1여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조선사신수행원들은 조선에서 중국으로 가는 도중에 가끔씩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고위급의 관리들은 모두 말을 타거나 가마를 타겠지만 하위급관리등 일반 수행원들은 보행으로 사행길에 오르니 정말 멀고도 먼 고된 여정이었다.
그만큼 힘들었던 것이 중국으로 가는 사행길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삼국시대때에 한반도의 신라에서 중국까지 사신을 파견하는 기록을 찬찬히 살펴보노라면 소요시일이 한달여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모든 것이 한 달여안에 끝나는 것이다.
당나라의 제후국을 자처했던 신라는 나라에 사건이 발생하면 바로 바로 당나라에 보고하고 그에 대한 해결방안책을 얻었는데, 기록을 보면 그 모든 것들은 한 달이라는 단기간에 마무리된다.
대저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되겠는가?
당시 삼국 시대 때에 과연 무슨 비행기라도 있었을까?
아니면 당시의 사신들은 모두 초능력자이란 말인가?
한반도에서 저 멀고먼 장안성[지금의 중국 섬서성 서안지방]까지 사신들이 어떻게 한달여 만에 왕복을 했던 것이었을까?
더욱이 신라에서 당나라로 가자면 몇천리를 걸어가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바다건너에 있으니 배를 타고 몇천리를 가야 할 것인데 신기하게도 신라사신들은 빠른 시일내에 당나라에 도착하였다.
참으로 신비로운 과거의 역사가 아닐 수 없다.
한반도의 신라조정이 당나라조정에 사신을 파견하는데 소요되는 시일이 한달여만이라는 기록은 삼국사기 등에 자세히 실려져 있다.
기록1: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 7월에 백제의 의자천황이 신라의 서쪽지방을 공격하여 40여성을 탈취하고 8월에는 고구려와 같이 당항성<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추정>을 함락시켜 당나라로 가는 길을 막으려 도모하므로 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황제에게 급한 사정을 보고하였다. 이 달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대야성<지금의 경남 합천으로 추정>을 쳐서 도독 품석과 사지죽죽 용석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기록2: [신라 태종무열왕 원년(655년) 정월 고구려가 백제와 말갈군과 연합하여 나라(신라)북쪽을 침략하여 성을 탈취하니 태종무열왕은 당나라에 구원을 청하여 3월<고구려 보장왕조 기록을 보면 2월에 당나라가 쳐들어오는 것으로 되어 있다.>에 정명진과 소정방을 파견하여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기록3: [진평왕47년(625년) 11월 사신을 당나라에 보내 조공을 하고 고구려가 길을 막아 당나라 조정에 출입을 할 수 없게 하고 자주 침범한다고 하소연하였다.]
이 기록들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아주 상당한 착각과 호기심을 마구 일으켜야 한다.
기록 1
기록1을 보자면
신라는 642년 8월에 당항성을 탈취당한 후
바로 당나라조정에 사신을 파견을 하는 상황이다.
그 8월의 한달 동안 당항성도 빼앗기고
당나라조정에 보고도 완료되고
대야성도 함락되어 대야성 성주까지 전사했다.
이 기록1을 음미해보자면
당항성의 위치까지도 잘 맞지 않는다.
당항성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으로 추정되는데
과연 당항성이 정녕 지금의 경기도에 있었다라면
분명 삼국 당시 때에는 신라의 영토가 아닌
백제나 고구려의 영토였을 것이다.
더욱이 고구려가
신라의 당나라 사신일행을 가로막아 신라의 조공길을 방해했다니...
당항성의 위치는 전혀 맞지 않는다.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한반도신라의 도읍지 경상북도 경주 땅에서
멀고먼 당나라의 도읍 장안성까지 사신을 보낼 수 있단 말인가?
한반도 최남단의 동쪽귀퉁이에 위치한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의 방해를 받는다는 것은 명약관화일찌언대,
대저 어떻게 당나라 장안성까지 신라의 사신들이 들어갈 수 있다라는 것인가?
하물며 당나라로선 어디 있을지도 모르는
변방의 오랑캐족속인 신라가 아니겠는가?
당나라의 입장에서는
한반도 최남단의 동쪽 구석에 박힌 신라가 중요하지도 않고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막혀 있는 이상,
서로의 교류도 필요없을 것이다.
그것이 정확한 논리이다.
하지만 신라는 당나라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고
당나라와 자주 교류를 시도했다.
하지만 한반도의 최남단인 경주땅에서
당나라의 장안성까지 사신을 보내는 것은 매우 무리한 일이다.
사신파견이란 나라와 나라사이의 외교적인 중대사이어서
반드시 사신행렬은 규모있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지리상으로도
고구려와 백제에 막혀 사신을 제대로 파견하지 못하는 나라가 신라일진대
이상하게도 신라는 당나라에 사신을 잘도 보낸다.
기록 2
기록2를 보더라도 매우 이상스러운 당시의 상황이다.
655년 1월에 고구려와 백제,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였는데
신라의 조정은 단 한 달만에 당나라조정에 사신을 급파하여 이 사실을 보고하고
2,3월에 당나라가 바로 고구려를 공략 하였다라는 것이 기록2의 내용이다.
과연 이것을 어떻게 무엇으로 설명해야 옳다고 할 수 있겠는가?
기록을 보자면 정확한 날짜는 나오지 않고 달만 나오는데
어쩌면 1월 말경에 신라가 사신을 파견하여
2~3월 초에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략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과연 이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될 수 있는 일일까?
기록 3
기록3은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이것을 고구려가 방해하여 당나라 조정에 들어 가지 못한다라는 내용인바,
언제는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는데 방해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단연,
한반도 남단의 동쪽에 위치한 신라가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자면
고구려와 백제가 이를 막는 것이 상식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새삼스럽게도 기록3의 상황이 일어났던 625년에
신라의 사신은 그제서야 당나라 조정에게 고구려가 사신일행을 가로막은 일을 하소연한다.
너무나도 이상하지 않은가?
너무나도 의아하지 않은가?
그러니 이 기록들은
모두 신라가 대륙에 존재했었던지,
비행기를 만들었던지 해야만 가능한 것이며
그것이 아니라면 이 기록들은 모두 잘못된 것이라야 한다.
그것도 아니라면 당시 한반도남단의 경상 북도 경주땅에 도읍을 정했었던
신라의 사람들은 필시 놀랄만한 초능력을 지녔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 기록들을 통해 신라는 결코 한반도에
그 본류를 두지 않았다라는 것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도저히 신라를 대륙에 두지 않고서는 납득하지 않을 수 없는 기록인 바,
분명 신라는 장안성의 부근에 위치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중심은 대륙일 수 밖에 없다.
민족의 지평에 서서 밝은 앞날을 지향하며...
붉은 눈시울에 물을 촘촘히 적시고..도경당 서함.
<생각해봐요> 당나라 수도는 북경이 아니고 장안이다.
글쓴이: Marsh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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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수도 장안은 섬서(陝西) 에 있습니다.
(아래 지도 20-21)
진시황 때에서도 여기가 수도였지요.
한반도 까지는 엄청나게 멀고도 먼 거리이지요.
로마와 무역을 했던 실크로드의 첫 시작지니까
중국에서도 서쪽에 해당 합니다.
그럼 왜 당나라는
섬서성 안에 서안(장안)에다가 수도를 두었을까요?
국경에다가 수도를 놓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라의 중앙에다가 수도를 세우죠.
서울이 수도였던 이유는
서울이 조선 당시에 한반도의 중앙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나뉜 뒤에 수도를 대전으로 옮기려고 했던 이유는
대전이 남한의 중앙에 위치 하기 때문이지요.
당나라는 서안(장안)에다가 수도를 두었던 이유는
서안이 나라의 중앙에 위치 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북경과 같은
군사적, 상업적 요충지에다가 수도를 두지 못했던 것은
그 쪽에 당나라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대륙의 동쪽에는
당나라와 비슷한 군대력을 가진
다른 나라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생각해봐요> 신라는 중국 양자강에 있었다.
글쓴이: Marshal
컴퓨터 분석에 의해서 일식이 일어날 시간과 장소를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것은 1996-2035 년까지 일식 관찰 지역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박 창범 교수님은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교수님으로
이 컴퓨터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삼국사기에 나와 있는 일식자료를 이용하여 분석을 하였습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발견 되었는데 그것은
신라가 4세기 때까지만 해도
중국 서남쪽 양자강변에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양자강은
곤륜산의 만년설에서 부터 시작해서
섬서성 아래 사천성 지방을 통과해서
샹하이까지 흘러가는 강입니다.
중국 서남쪽 양자강변이라면
당나라가 있던 지역의 남쪽이 됩니다.
신라가 이쪽 지역에 있었다고 가정을 해 보고
삼국사기에 나오는 문헌 내용을 한번 읽어 보십시요.
느낌이 팍 오실 겁니다.
하지만 사학계에서의 냉소적인 입장과
역사 문헌 자료의 부족으로
이러한 엄청난 발견이 사장이 되어 버렸습니다.
박창범 교수님께
신라가 양자강변에 있었다는 역사 자료를 찾아 드릴 수 있다면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찾고
세계 속에 우리의 역사를
학문적으로 당당히 알 릴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