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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명적인 정상.txt
게시물ID : soju_28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블바
추천 : 6
조회수 : 988회
댓글수 : 1개
등록시간 : 2011/07/02 07:40:11
BGM은 원하시는분만
Elcho - Stop The World
친구녀석한테서 전화가 왔다. 녀석은 신이나서 놀자고 한다. 간만에 차려입고 나와. 옆에 다른 애들이 시끄럽게 구는 것이 들린다. 상황이 대충 짐작된다. 요란한 도시의 밤풍경. 차려입은 남자들. 화장하고 반짝이는 힐 신은 여자들. 술냄새. 누군가 토해놓은 바닥. 더러운 서울의 르네상스. 서로 돋보이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 그 속에 내가 알고 있는 아이들. 나 역시 외로움을 잊기 위해, 쓸쓸함을 피해 그들의 틈에 낀다. 그러나 그것은 더 큰 쓸쓸함이 되어 남아있다. 느낀다. 그러나 멈출 수 없다. 술을 마시고 여자가 자리에 앉길 기다린다. 조금이라도 예쁜 여자들이 앉으면 친구들 반응이 달라진다. 그러나 그런 여자들은 으레 술 한잔 받아먹고 자리를 뜨기에 바쁘다. 나는 뭘 하고 싶어서 이 자리에 있는 걸까. 친구를 잃고 싶지 않아서? 여자를 만나보려고? 술 마시려고? 벌써 몇번째 여자애들이 내 옆자리를 앉았다 일어선다. 여자, 여자들. 이 아이들은 어디서 이렇게 많이도 흘러 온 것일까. 너희도 누군가의 첫사랑이었겠지. 그렇다면 너희도 잔챙이구나. 다 불태우지 못하고 남아버린 존재들. 영혼이나 사랑이나 운명 따위를 믿지 못하게 된 존재들. 이번 여자는 좀 오래 앉아 있는다 싶었더니, 친구들도 각자 맘에 드는 여자와 앉아 있다. 쉬지 않고 떠드는 놈, 술을 계속 먹이는 놈, 시끄러워서 잘 들리지도 않을텐데 분위기에 취해 폭탄웃음을 터트리는 여자, 한 커플은 이미 자리를 떴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꽤 오래 옆에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글쎄. 나도 내가 무슨생각인지 모르겠다. 다만 이 자리가 언제부턴가 불편하다는 생각. "여자친구 있으세요?" "아니요." "제가 맘에 안드세요?" 나는 이 내 옆에 앉은 여자의 눈을 바라본다. 간헐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잠깐 내 눈에 비친다. 무슨 말을 해야할까. 나를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나. 이야기가 길어질텐데. "술 많이 먹었어요? 나도 진도 맞출까?" 그러면서 자기 앞에 있는 아무 잔에다 술을 따른다. 짧은 블랙 원피스를 입고 아무렇게나 꼬고 있는 다리가 보인다. 나는 나도 한잔 달라는 제스쳐로 잔을 뻗는다. 아무렴 어때. 오늘은 이 잔 마시고 너에게 빠져도 좋지 않을까. 내일 아침이면, 아니 불과 몇시간 후면 다시 헤어나올텐데. 아무런 뒷탈없이 다시 내 삶으로 돌아올텐데. 내 잔을 채워준 그녀는 술잔을 들고 나와 건배한다. 내가 마음에 들었나? 어디가? 생긴게? 무뚝뚝한게? 기분 좋은 일이라도 있었던 것일까. 쨍. 난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그 후로 우리는 몇잔의 술을 더 마셨다. 금방 취해버린 나는 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수다를 떨었다. 그리고 여자는. "우리 나갈래요?" 한다. "밖에 추운데." "여기 너무 시끄러워요." "그래요 그럼." 하고 나는 다리에 힘을 준다. 균형을 스스로 잘 못잡는 것을 깨닫지만 오히려 유쾌하다. 쿵쾅대는 지하를 벗어나 조금 더 조용하지만 조금 더 복잡한 거리로 나선다. 밖에서 보이는 우리는 어떤 모습일까. 그녀는 블랙 원피스에 반짝이는 블랙 하이힐, 귀걸이, 날개죽지까지 내려오는 매끄러운 갈색 머리, 날씬한 허리, 자그마한 체구. 그렇다면 나는? 나는 그냥 나. 나? 나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모른다. 나는 여기 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 뒤통수와 목을 볼 수 없는 유일한 인간이다. 이 여자에게 물어볼까. 너는 날 얼마나 아느냐고. 우리는 가까운 모텔로 들어갔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찬바람에 술이 깼던 것이, 다시 따뜻해지며 몽롱해진다. 너는 얼마나 나를 아느냐고. 얼마나 나를 알길래 이렇게도 나를 원하느냐고. 말해줄 수 있어? 말해줘. 내 목을 본 첫 느낌이 어땠는지? 난 한번도 본 적 없는 이 내 목 말이야. 샴푸냄새와 향수냄새가 뒤섞여 더 취해버린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기를 멈춘다. 대신에 네 목을 내놔. 네 목도 너는 직접 본 적 없지? 봐. 너도 나랑 똑같아. 이 잔챙이야. 슬프다. 누군가 이 슬픔의 갈래를 정의내려 주길 바랬다. 진단내려 주길 바랬다. 어디가 어떻게 슬프세요? 네 저는. 몰라요. 그냥 슬퍼요. 그래도 어디가 어떻게 슬픈지 말씀해 주셔야 제가 진단을 내 드리죠. 말씀해 보세요. 글쎄요. 뭔가 잃어버렸는데 그게 뭔지 모르는 것 같아요. 아니 사실은 잃어버렸는지도 확실치 않아요. 아니 잃어버렸다는 느낌도 정확하지 않아요. 그냥 슬퍼요. 혹시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나요? 네. 혹시 가끔 가슴이 철렁 내려 앉을 때가 있나요? 네! 혹시 사람들이 저속해 보이고, 미련해 보이고, 불쌍해 보이지 않나요? 맞아요! 그래요! 그렇다면 당신은 치명적인 정상입니다. 비타민 한알 먹고 진찰료 내고 돌아가세요. 네. 오르가즘에 취해 술에 취해 가장 시끄러운 곳에서 가장 조용한 곳으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내 옆에서 쌔근 소리를 내며 자고 있었다. 바닥에는 뱀이 허물을 벗은 듯 얇은 블랙 원피스가 덩그러니 던져져 있었다. 허물이라니 뱀이 선물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텔 이름이 에덴동산이던가. 그렇다면 나는 선악과를 먹고 옷을 입지 않은 것이 부끄러운 것임을 곧 깨닫게 되는 것일까. 나는 그녀 목을 보고서야 내가 잃어버린 것을 깨달았다. 이제 그녀와 나는 서로를 알 기회가 없다. 카페에 앉아 진솔한 대화를 나눌 수 없다. 아니 이제는 다른 누구와도 그리할 수 없다. 잃어버렸다. 냉장고 소리만이 방을 가득 채운다. 저속한 소리. 미련한 생명력. 불쌍한 냉장고처럼 쉬지않고 도는 나의 불쌍한 시간. 계절. 겨울. 눈. 뒷모습. 노을. 카드. 너의 글씨. 너의 이름으로 가득한 일기장. 봄. 벚꽃으로 만발한 도로. 오전의 한적함. 부드럽고 작은 손. 손에서 느껴지는 땀. 함께 앉곤 했던 버스 뒷좌석. 허벅지로 느껴지는 네 체온. 되찾기엔 늦었다. 찾을 수 없다. 5시. 이제 다시 내 삶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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