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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사 운동 (8)
게시물ID : history_1766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Lemonade
추천 : 4
조회수 : 971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12 14:49:20
지난 글에 이어서 형평사 라는 조직에 대하여 계속 알아보자면 ‘본사는 계급타파·모욕적 칭호폐지·교육권장·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선언한 사칙 제3조는 형평운동의 목표를 바로 표현하고 있다고 볼수 있으며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이고,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다. 그런고로 아등我等은 계급을 타파하고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권장하여 우리도 참다운 인간이 되기를 기期함이 본사의 주지이다.'라고 한 주지의 첫 부분이나 ‘본사는 계급타파·모욕적 칭호폐지·교육권장·상호의 친목을 목적으로 한다’고 선언한 사칙 제3조는 형평운동의 목표를 바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수 있습니다.

형평운동 지도자의 한 사람인 장지필은 ‘인간다운 대우를 애걸하는 것 외에 어떠한 생각도 없다’고 절규하였고, 6월 4일에 논산에서 열렸던 조선형평사 충남지회 설립대회는 ‘백정도 양반도 모두 인간이며 인간이라면 살아야 한다’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경북 상주의 경우에도 

“천차만별의 무수한 계급을 타파하고 인생은 모두 인생이요, 인생으로서 인생이 아닌 인생이 없으며, 인생은 모두 동등의 인생이요, 절대 신성한 인생이라. 이에 각자의 직업이라든지 각자의 취미를 따라 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그것으로써 존비귀천의 차별을 한다는 것은 인생의 공정한 대의에 반역함이라. 이 부자연하고 비인도적인 모든 계급을 타파하고 만인이 모두 수평면상에서 동일한 보조로 평화롭게 살아나가자”

는 내용의 발기문을 발표하였는데 이와 같은 구호는 각지의 형평사가 창립하면서 발표한 발기문에도 한결같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으로서의 평등과 해방’은 창립이래 형평사가 한결같이 추구한 가장 중요한 운동목표였다고 할수 있습니다.

이들은 구체적인 실천운동으로써 야학·주간 강습소의 증설, 신문·잡지의 구독, 강연 등을 통하여 자신의 개발을 도모하기로 하였고, 주색·도박 등의 금지, 근검절약을 통한 자신의 정화 그리고 사원 간의 상호부조를 결의하였습니다. 이것은 1920년대 전반기에 조직된 단체들이 대부분 그러했듯이 인권, 자유평등, 상호부조, 친목단결, 품성도야, 지식계발, 기술보급, 근면저축 등을 표방하는 실력양성론이 반영된 것이며, 또한 이 실력양성론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 계열의 이데올로기가 형평운동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이라 할수 있겠지요.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창립과정의 사정-창립 발기인 가운데 이학찬은 백정자산가, 장지필은 가난한 백정 출신의 일본의 명치대학을 중퇴한 지식인이었으며 강상호는 일반인으로 초대 동아일보 진주지국장이었고 신현수도 일반인으로 당시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이었으며 또한 천석구는 일반인으로 진주자작농회 간부였던 것에서 볼수 있듯 사원 자격을 백정만이 아닌 모든 한국인으로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다양한 인적구성은 운동방향과 조직상의 혼란을 가져오는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습니다. 

즉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 부유한 유산층 백정, 가난한 도부 노동자인 무산백정, 젊은 일반 선진 지식인들은 제각기 형평운동에 참가한 동기와 목적이 달랐으므로 운동 전개과정에서 내부 분화를 가져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형평사는 1923년 4월 25일 형평사 주지와 사칙을 발표하면서 공식적으로 출발했습니다. 또한 5월 13일의 창립축하식을 통해 대외적으로 출범을 선포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백정 해방을 위한 단체가 탄생하였지요.

창립축하식을 통해 대외적으로 창립을 선포한 형평사는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가 먼저 각 지방 백정에게 형평운동을 이해시키고 선전하여 참여를 유도하는 한편, 곳에 따라서는 지사나 분사의 설립을 직접 주도하거나 지원하고자 선전대를 편성·파견하는 작업을 거치게 되는데 특이한 것은 창립축하식 아침부터 형평사원은 자동차로 진주 시내를 시위하면서 형평사 취지와 축하식 행사를 알리는 선전지 7천여 장을 시민들에게 배포하였다는 점으로 활동의 위상을 높이고 참여자에게 긍지를 심어주기 위해 활용된 이러한 방법은 전통사회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써 이후 각 지역 행사 때마다 이러한 방법이 이용되었습니다.

이렇듯 임원들의 노력과 각 지역 백정의 적극적인 호응, 그리고 재일 한국인 사회 운동 단체인 북성회,평문사,전진사,적기사등을 비릇한 전국 각지의 사회운동가들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형평사는 급속히 확산하여 갔으며 진주나 경남지방의 지역 운동단체가 아닌 전국 조직의 사회운동 단체로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형평사가 창립되자 당시 각 언론기관과 사회단체에서는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격려하였는데 먼저 형평사 창립에 대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사설을 통해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명하였습니다.

… 형평운동이 기起한 것은 인도관념에 기초한 인격의 자유와 평등을 요구함에 있는지라 계급적 분열을 기起하여 사회의 통일을 착란錯亂케 하는 것보다는 동일한 동포감에 기초한 반성 자각의 필요를 설說코자 하는 바이다. 더욱더 해該 운동의 철저한 관철을 절망切望하는 바요 일반사회의 각성을 절규하는 바이다. 註9)진주 재주在住의 백정동포가 궐기하여 형평사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계급타파운동을 시작하려고 한다고 들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시대에 적합한 행동이라 생각된다. 운동의 철저한 노력을 백정동포에게 원하며 …. 

032_006.jpg

(형평사 창립을 적극 지지한 신문 사설인데 잘 안보이는군요;)

이들의 지지형태는 상존하는 백정차별에 대한 일반사회의 각성을 거듭 요구하는 것이었으며, 인도주의적인 형평운동에 대한 지지와 후원의 표명이었습니다. 이들 언론사는 계속하여 형평사 활동을 논하고 각지의 형평지분사 결성상황을 자세히 보도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였으며 개벽은 “형평운동을 위하여”라는 논설을 통하여 아랫 글과 같이 형평사는 형평운동의 목표에 대한 투철한 의식을 가져야 하며, 운동은 조직의 여하에 달렸으니 현재의 진주에 본사를 두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라는 의견을 밝혔습니다.

… 이 형평운동에 우리가 더 한번 묻고 싶은 것은 형평운동으로써 관철할 구경究竟의 목적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일찍이 모지某紙의 보도를 통하여 그 사社의 중심 인물되는 모씨某氏의 눈물의 감상이라는 것을 보면 ‘사람대우를 애걸하는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노라’하였다. 그러면 ‘사람대우라 함’은 무엇이냐? 민적에서 「백정」 2자를 제除하고 학교에서 양반의 자제와 같이 취학함을 얻고 일상의 교제에서 인간항례人間恒例의 예우를 받게 되는 그것을 가리킴인가? 만일 그렇다 하면, 그렇게만 되는 때에는 형평운동은 스스로 종終을 고告할 것인가? … 형평운동으로써 도달할 최종의 목적에 대한 충분한 의식을 가지게 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또한, 백정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직접의 힘에 의하지 않으면 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오직 조직의 여하에 달렸으니, 현재 진주에 본사를 두고 조선 각지에 지사를 두는 것도 조직이기는 하지만 운동적 결사로 존립고자 하면 그렇게 하여서는 안된다.

형평사는 창립 당시 이러한 언론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는 물론 멀리는 재일단체, 가까이는 국내 청년, 노동 운동 단체 등 일반 사회 운동 단체들의 관심과 기대를 집중시켰습니다.

각 단체의 형평사에 대한 공식적인 지지 자료는 남아있지 않지만 이들 단체원이 형평사 행사에 참가해 축사를 한다든가 축전을 보내는 등의 형태로 형평사에 지지를 표명했지요, 5월 13일의 형평사 창립축하식에는 진주 노동공제회 간부이며 조선일보 진주지국장으로 제2차 공산당책임비서가 된 강달영, 보천교의 조우제 등이 축사와 함께 운동비용을 기부하였으며, 대표적인 재일 사상단체인 북성회를 위시해 평문사平文社, 전진회, 적기사 등의 단체가 축전을 보내왔습니다.

특히 각지의 형평 지사·분사는 노동공제회 혹은 청년회의 후원 아래 조직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정읍분사에는 조선노동연맹 중앙집행위원이며 정읍 노동공제회간부인 최중진崔重珍,최성룡崔成龍,김인산金仁山, 광주분사에는 조선노농총동맹의 중앙위원이며 광주 노동공제회 간부인 서정희徐廷禧와 조경서曺景敍, 이리분사에는 익산청년회 회장인 임중환林仲桓과 정건鄭建·이진수李鎭洙·김병수金炳洙·조정희趙正熙 등이 각기 고문이 되어 형평사를 지원한 것 등이 그 예라고 할수 있겠습니다.

고문의 역할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부분 명예직이었던 것 같고 그 지역 유력인사를 선임한 것으로 보아 운동의 자문을 구한다든가 형평사의 위상을 높이려는 의도가 내포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이들을 통해 형평운동이 다른 사회운동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지게 되는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가령 김해형평분사 창립축하식에는 김해청년회 대표 안효구安孝駒, 김해교육회 대표 인동철印東哲, 김해 기독교회 목사 이기선李基宣, 북성회원 포시진치布施辰治 김종범金鍾範 정우영鄭又影·노백용盧百容 등 지역 내의 여러 사회단체대표들이 참석해 축사를 하며 격려하고 있는데 이들 지역 유지들의 지원으로 형평사는 지역 내에서 사회운동단체의 일원으로 공인받고 자리를 잡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형평사는 창립 때부터 국내 언론기관을 위시해 노농·청년단체는 물론, 멀리는 재일 사상단체들의 직·간접적인 지원과 기대 속에서 활발히 운동을 전개해 나가게 됩니다.

한편 일제도 형평사의 움직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경기도 경찰국에서는

그 내용이 계급타파를 극도로 내세워 현 정치제도에 이롭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도 있어, 그 사조가 경기도 관내에 있는 백정에게도 전파될까 염려하여도 관내에 있는 백정의 수효를 자세히 조사하는 동시에 관내 각 경찰서에 명령하여 그 사람들의 행동을 비밀리에 감시하고 재산정도·성향·교육의 여부를 조사토록 한다더라. 

라고 하는 신문 기사에서 볼수 있듯 이미 창립 초기부터 형평운동을 사회주의운동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상에서 본 것과 같이 형평사는 사회 각계로부터의 집중적인 관심을 받는 가운데 특히 노농단체,사상단체,청년단체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으면서 창립되었는데 이는 앞으로 형평운동 전개과정에서 운동노선을 둘러싼 갈등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글은 독립 기념관의 글을 편집한 글입니다.


주석>

1) 동아 일보, 조선일보, 개벽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동아일보 1923년 5월 18일 사설 「衡平運動의 意義」. 조선일보 1923년 5월 3일 사설 「衡平社의 奮起」. 개벽사, 개벽 36, 1923, 59~60쪽. 

2) 보천교는 독립 기념관의 설명을 빌자면 1911년 車京石이 전라북도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에서 甑山思想을 기반으로 세운 종교이다. 차경석은 1880년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연기리에서 태어나 일찍이 동학운동에 가담해 전라북도 순회관을 지내기도 했으나, 姜一淳을 만난 뒤 제자가 되어 그를 추종했다. 1909년 강일순이 죽자 신도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나 1921년 차경석은 일본경찰의 체포령과 비상망 속에서도 경상남도 덕유산 기슭에서 普化敎 뒤에 보천교 를 선포했다. 1922년에는 『보광』이라는 잡지를 발행하고, 1924년에는 시대일보를 인수하여 운영하기도 하였다. 라고 합니다.

3) 북성회는 일본 동경의 유학생 들의 친목 협력 등을 목표로하는 단체로 시작한 사회 운동 조직입니다.

4)경기도 경찰국의 발언의 출처는 조선일보 1923년 6월 5일 백정을 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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