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베 글 중 '도서관에서 여자사람에게 쪽지 받은 사연'을 보고
문득 어린 시절 추억이 생각나 이 글을 적게된다.
때는 바야흐로 90년대 어느 겨울 방학 시작 즈음이었다.
중학교 시절 처음으로 학원 좀 다녀보고자 마음먹고
첫 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반에 들어갔다.
반은 그다지 크지 않아 대략 20여명이 채 안되는 클라스였는데,
동네 학원이라함은 근처 학생들이 오는 곳 아니겠는가?
모두가 기대했듯이
동네에서 좀 알려진 미모의 여학우라든가
청담 김태희 따위로 불리는 유명 인사급 여자사람 있지 않은가?
아저씨가 된 지금도 가끔 버스 안에서 풋풋한 여학생들을 보면
노메이크업에 저정도면 크면 정말 남자를 쇠고랑에 차고 다니겠구나 여겨지는
그런 아이가
감히 내 첫 학원 클라스에 앉아 있는 게 아니겠나.
그것도 그 아이는 국민학교 시절 같은 반이었던 아이었던 것이었다.
서로 눈이 마주치며 '앗'하는 것도 잠시
쑥쓰러운 청춘의 영혼을 가진 여리디 여린 나는 그만
눈을 피하고는 뒤쪽에 앉은 그 아이와는 달리 맨 앞 의자에 가서 앉았다.
수업이 막 시작하려는 찰나 누군가 내 등을 툭툭 치는 것 아니겠는가?
쿵쾅거리는 마음을 붙잡고 뒤를 돌아보니
뒷자석에 앉은 녀석이 2번 접힌 노란 포스트잇 쪽지를 내밀고 있는게 아닌가.
'뭐지?' 지금 오유에 쪄든 나같았으면
'다들 이렇게 게이가 되는 건 아니야'
라고 말했겠지만
그 땐 '찌징 삐~~빅 비링비링' 모뎀 돌리던 시절이었다고 기적같은 DOS-MAP으로 말이지.
좌우지간,
그 녀석 뒤 쪽에서 청담 김태희라 불릴 법한 국민학교 동창이 무슬이들과 함께 날 쳐다보며
'그거 읽어봐'라는 입모양을 벙긋거리며
손가락으로 내가 들고 있는 쪽지를 가르키고 있었다.
마음같아서는 멋적은 미소를 지으며 손이라도 흔들어 주고 싶었지만
타이밍도 절묘하지 선생이 들어오는 바람에
맨 앞 자리에 앉아 있던 나는 그만 쪽지도 확인해볼 기회가 없었다.
한 시간 내내 진행된 수업 내용은 분명 국어였을 텐데
내 귀에 들어온 말은 '!%!%!%#^%! ~!^$^#^#@' 안드로메다어였다.
청담 김태희라 불리는 아이가 무슨 불 일로 나에게 쪽지를...
'안녕, 오랜만이야, 동창?'
'혹시 시간있으면 수업끝나고 같이 빵집이라도 가지 않을래?'
'혹시 여자친구 있어?'
없어 나랑 사귀어줘.
마침 겨울방학이고
같은 클라스를 듣고
같은 동네에 살고
마침 오늘 내가 가장 아끼는 떡볶기 더블코트도 입고 왔단 말이야!!!
나는 내 영혼의 외로운 절규를 들을 수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모두 자리에서 일어날 때
난 부들거리는 손으로 고이 2번 접힌 노란 포스트잇 쪽지를 펼쳐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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