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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라 좋아하는 아이 (1/2)
게시물ID : humorstory_177041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탄밥
추천 : 14
조회수 : 808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09/12/20 08:36:57
나는 남자친구와 4년째 사귀고 있다. 친구들과 그에 관한 얘기를 하다보면 어김없이 콜라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는 콜라를 좋아했고 나는 그 점이 제일 좋다고 말한다. 물론 친구들은 그게 무슨 싱거운 소리냐고 묻지만 콜라는 우리 사이의 행복을 지켜주는 방범시스템같은 거라고만 대답한다. 

처음 사귀던 무더운 날, 우리는 땡볕 속에서 목적지 없이 길을 걸었다. 그는 평범한 대학생, 나도 평범하긴 하지만 남들과 같아지길 거부하던 산뜻한 여대생. 놀러가고 싶은곳이 있다고 해서 다 다닐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도시의 대동여지도를 그리는 김정호 커플이었다. 세 번쯤 만났을 때였던가, 그가 자외선 차단제를 준비해 왔다면서 내 얼굴에 발라주려고 했었을 때 나는 극구 사양하겠노라고 선언했다. 땀으로 지저분한 그의 손이 위생구역인 여자 얼굴에 함부로 닿은 것도 찜찜했거니와 그의 손바닥으로 뭉게지는 내 볼살이 추하게 보일꺼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기 손에 이미 짜 놓은 크림을 팔뚝에라도 바르자면서 내 팔을 잡아당겼을 때 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그는 당황했고 나는 미안했다.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서먹해졌고 둘다 말이 없었다. 나는 그를 달래주기 위해 먹고 싶은거 없냐고 물어봤다. 그는 콜라를 사달라고 말했다. 콜라? 그것만 있으면 되겠니? 그게 먹고 싶었어?ㅋ 까짓것 내가 못사줄 리가 없었다. 지갑의 잔돈으로 계산한 캔콜라는 그에 의해 단숨에 비워졌고 그는 전구에 불켠것처럼 다시 웃었다.

학교가 서로 달라서 만나는 장소는 대부분 시내 한복판, 약속시간을 어기는 쪽은 항상 나였다.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이상하게 꼭 10분이 늦었다. 10분가지고 불평하는 남자라면 좀생이겠지만 매일을 그러다보니 그가 싫어했다. 나중에는 자기도 10분씩 늦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면 나는 20분씩 늦어졌다. 만나면 웃으면서 시작되어야 할 데이트가 그의 꿍한 얼굴로 불편해졌다. 오늘은 뭐하다 늦었어? 오늘은 왜 늦었어? 그는 나에게 습관을 고쳐주기를 바란다며 불편한 질문인걸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그리고 앞으로 늦을때마다 벌칙으로 콜라를 사오기로 했다. 나는 사흘을 못넘기고 콜라를 주기적으로 사야했다. 약속 늦은날 뿐만 아니라 조금 미안한게 있어도 콜라를 줬다. 그러면 바로 먹을때도 있었고 가방에 넣어 둘때도 있었다. 내가 준 콜라캔은 헹궈서 집에 모아 둔다고 했다. 콜라를 사가는 날은 잘못을 묻지도 않았고 표정이 항상 밝았다. 마치 콜라에 웃음 유발물질이라도 들어 있어서 그 물질은 그에게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내가 학원으로 데리러 와달라고 해놓고선 보충이 연장되는 바람에 그를 두시간 가까이 밖에서 기다리게 만들었다. 수업을 마치자마자 빨리 뛰어가려다가 어차피 늦은거 편의점에 들러서 1.5리터짜리 콜라를 사서 애교를 부렸다. 내가 이만큼 많이 미안하니까 이쁘게 봐달라고 하면서 팔을 껴안자 그는 풋웃음을 보이면서 미안한건 알겠는데 자기는 캔에 든것만 먹는다면서 바꿔오라고 했다. 그때 오빠는 왜 콜라만 좋아하냐고 물어봤는데 취향에 이유가 어딧냐면서 누구나 그런 것 하나씩 있지 않느냐고 데꾸했다. 그래서 그냥 그런줄 알았다. 너는 콜라를 좋아하는 아이. 내가 지어준 그의 별명은 콜사장, 콜맨, 콜라마약 중독자, 마이콜, 콜미, 콜록콜록 등 ‘콜’이라는 음절이 들어간 단어는 모두다 그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콜라는 한번에 두세개씩 사주는 것도 싫어했고 언제나 한나씩만 먹었다. 집에선 콜라에 밥말아 먹는거 아니냐고 놀렸고 콜라공장 딸이 좋다고 하면 나랑 헤어지는거 아니냐고 또 놀렸다. 그는 그런소리 말라면서 내가 싫어하면 콜라는 언제든지 끊을 수 있다고 했다. 마치 담배를 100번도 넘게 끊어봤다고 말하는 어느 애연가다운 소리였지만 기분은 좋았다. 

지난 4년간의 연애를 돌이켜보면 내가 일방적으로 화를 낸 적은 있었어도 서로 싸운적은 한번도 없었다. 단순한 법칙이었다. 내가 화날땐 화내면 그만이고 그가 마음상해 있을땐 콜라만 사주면 해결되었으니까. 작용과 반작용, 혹은 조건반사. 개는 종이 울리면 침을 흘리고, 그는 콜라를 받으면 일단 좋아했다. 내가 이 얘기를 해주면 그는 또 풋웃음을 지으며 자기가 그렇게 단순한 사람으로 보이냐며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은 논리적인 사람이 되고 싶을 뿐이라면서 화를 내는 사람은 논리적인 해결방안을 제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 화를 내는 거라면 자기도 화를 낼 수 있지만 나에게는 그런 일이 평생 없을 꺼라고 장담했다. 고마운 말이었다. 하지만 ‘평생’이라는 말이 살짝 신경쓰였다. 나는 그와 결혼을 하게 되는걸까? 솔직히 나에게는 더 나은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했다. 

유혹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처음보는 남자들이 접근한 경우는 모두 거절했지만 알고 지내던 선후배들은 몇번씩 만나곤 했었다. 나에게 흑심을 품은 만남이라는걸 알면서도 만났다. 조금은 지겨웠던 그의 잔소리를 벗어난 해방감을 느꼈다. 남자들은 나의 환심을 살 목적이었기 때문에 지나칠 정도의 매너, 돈쓰는걸 아까워 하지 않았고 학생인 까닭에 집에서 부모님 차를 가져오는 일이 흔했다. 남자친구의 걸음마 데이트와는 질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학과 친구의 선배라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이 자주 왔다. 얼굴을 한번 잠깐 봤을 뿐인데 친구에게 내 번호를 물어봤다고 했고 친구도 선배와의 만남을 부추겼다. 우연인진 몰라도 교내 식당에서 자주 마주쳤다. 밝고 유괘해서 충분히 호감가는 사람이었고 ‘알고 지내는 선후배’의 한사람으로 금새 들어와 있었다. 그는 일찌감치 사업을 배우고 있다면서 차를 몰고 다녔고 집까지 바래다 주겠다고 하는것을 ‘집 근처까지만’ 이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바람을 필 생각으로 만난건 아니지만 상황이 점점 그렇게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오전 수업만으로 일과를 마친 어느날 선배는 어머니를 급히 만나야 한다면서 자기 집으로 차를 돌렸다. 나는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는데 어머니 계시니까 걱정(?)하지 말라며 끌려가듯이 들어갔다. 날씬하고 젊어보이는 어머니의 인상이 좋으셨다. OO이 여자친구니? 하시며 귀엽다고 하시는데 여자친구라는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친구인데 여자인 친구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는거라고 억지 합리화를 시켰다. 선배가 왜 나를 집으로 끌여들였는지 알 것 같았다. 한눈에 ‘잘산다’ 싶을 정도로 집이 좋았고 집자랑을 하고 싶었던 거였다. 게다가 선배 어머니의 입김도 있었지 않았나 싶다. 테이블에 쥬스가 올라왔다. ‘선배는 혹시 콜라 안좋아하세요?’ 거기서 내가 이 질문을 왜 했을까. ‘콜라먹고 싶어? 우리집은 쥬스만 먹어서 콜라는 없는데.’ 콜라는 몸에 해롭지 않느냐며 어머니가 거드셨다. 웬지 쥬스가 맘에 안든다는 것처럼 보여서 실례를 저지르고 말았다.

한달 넘게 남자친구와 만남이 뜸했었다. 통화도 길게 안하는 편이었다. 그에게는 선배 이야기를 제외한 식상한 학교 얘기만 하고 끊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목걸이를 선물받았다. 자기가 옆에 없을 때 이걸 보고 생각해 달라고 했다. 그를 생각나게 하는건 목걸이가 아니라 콜라였다. 그의 앞머리가 많이 길어 있었다. 그의 머리는 내가 깎아라고 부추기기 전까진 절대 깎기지 않았다. 

2/2 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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