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백명의 기자와 카메라 불빛 속에서, 그것도 멀찍이 앉아 있는 사람을 발견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더구나 공식석상에서 그런 말까지 하리라고는.
그러나 <디워> 시사회장에서 심형래는 나를 봤고, 그리고 7년 만에 매스컴이 다 바꿨다며 아는 기자는 한국일보 이대현 하나 밖에 안 남았다. 아직도 안 잘리고 버티고 있다는 말로 좌중을 웃기며 기자회견을 시작했다. (사실 그가 아는 기자가 한명 더 있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화장실에 갔다.)
왜 그랬는지 정확히 알 길은 없다. 다만 온갖 억측에 시달리며 40대 대부분의 세월을 쏟아 완성한 <디워> 품평회 자리에 앉은 심형래로서는 자기가, 자기를 모르는 자들에 대한 두려움을 그렇게 대신한 것은 아닐까 추측했다.
아니나 다를까, <디워>에 대한 그들의 애정 없는 말과 글들은 혹독했다. 스토리, 디테일은 물론 감독으로서 심형래의 의지, 열정에까지.
영화가 흥행에 성공하자 이번에는 저예산동성애영화의 감독(이송희일)과 제작자(김조광수)까지 가세해 심형래가 민족주의와 맹목적 애국주의에 기댔다며 침을 뱉는가 하면, <디워>에 열광하는 네티즌들을 이성을 잃은 막가파로 몰아부쳤다.
물론 그들의 비판이 모두 틀린 것은 아니다. <디워>는 부족하고, 네티즌들의 열광에는 맹목성도 있을 것이고, 영화 마지막 자막이 말해주듯 심형래가 그것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비판이 쿨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심형래가 아는 한명뿐인 기자 로서, 뒤집어보면 20년 가까이 때론 취재원 때론 친구로서 그를 아는 기자로서 서너 가지 이유를 꼽을 수 있다. 첫째는 무지이고, 둘째는 무례이고, 셋째는 무원칙이고, 넷째는 획일성이다.
제작비 얘기부터 해보자. 그 많은 돈을 심형래가 어디서 어떻게 구했는지 알기는 하는가. 그가 밝히기 꺼리는 가족(특히 형)이 없었다면 <디워>는 세상에 나올 수도 없었을 것이다. 충무로야말로 다 된 밥상에 숟가락 하나 얹은 격에 불과해 보인다.
열정도 그렇다. 한때 입이 돌아갈 정도로 고생한 것은 차지하고라도, 지금 충무로 컴퓨터그래픽 대부분이 그의 영화사(영구아트무비) 출신들의 손에서 나올 만큼 한 분야를 키워온 열정과 공로를 왜 외면하려 하는지. 언어는 또 왜 그렇게 천박한지. 그래 놓고 네티즌들을 욕할 것인가.
<트랜스포머>는 엉성한 스토리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이 돋보인다, <디워>는 화려한 컴퓨터그래픽에도 불구하고 단조로운 스토리가 문제. 같은 사람이 쓴 글이다. 무원칙은 또 있다.
심형래를 키타노 다케시에 비교했다. 같은 코미디언이지만 만드는 영화의 장르가 전혀 다른데. 굳이 비교해 욕하고 싶다면 스필버그나 마이클 베이여야 하지 않을까. 민족주의도 그렇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며 한국영화니까 봐줘야 한다고 소리치던 제작자가 아닌가.
한 신문은 개봉 6일만에 <디워>가 관객 300만명을 돌파하자 바보영구의 민족주의적 인간승리 평단과 언론의 한결 같은 저평가 속에 이뤄진 것이라 더욱 눈길 노골적인 애국심 호소가 가장 큰 흥행 요인 이라고 주장했다. 무섭다. 자신의 잣대를 세상 잣대로 착각하는 것이며, 관객을 전부 바보로 여기는 것이며, 작품 속에서 흥행요소를 찾아보려고 조차 하지않는 태도하며. 어쩌면 이렇게 어디와 닮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