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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내 평생에 찰떡
게시물ID : history_1777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미카엘대공
추천 : 4
조회수 : 1115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08/18 08:49:36




산하의 오역 

1950.12.14 흥남 철수, 내 평생의 찰떡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 통일을 호언하던 국군과 UN군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글자 그대로의 대혼란에 빠졌다. 압록강 물 떠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냈던 6사단은 사단장이 한때 행방불명될 정도로 와해됐고 세계 최강 미 해병대도 일본어로 ‘초신’이라고 부르던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인디언 태형’(두 줄로 늘어서서 지나가는 이를 몽둥이로 때리는) 같은 맹공을 받으며 기진맥진했다.

12월 6일 평양은 인민군에 넘어갔고 한국군 1군단과 미 10군단, 장진호에서 빠져나온 미 해병대 등은 흥남 부두에 집결, 12월 14일 (15일이라고도 한다) 철수 작전을 시작한다. 하지만 흥남 부두에는 그들 말고도 10만 명의 피난민이 들끓고 있었다. 처음에는 군 병력과 장비만 실을 생각을 했지만 국군 측의 강력한 건의와 미군 측의 결단으로 “장비를 버리고 사람을 싣는” 쪽을 택하여 피난민들을 대부분 철수시키는데 성공한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의 사연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아래 글은 블로그에도 1년 전에 올렸고 딴지일보에도 실렸던 내용이지만, 이 공간에도 소개하고 싶어서 올린다. 나의 아버지는 그 피난민 중의 한 사람이다. 그 분의 증언이다. 무지하게 길지만 읽어 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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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나고 한동안은 조용했지. 근데 한 두달이 지나니까 쌕쌕이가 슁슁거리면서 하늘을 나돌아다니더라. 또 한 두달쯤 있으니 인민군들이 북으로 북으로 쫓겨 올라가고 국군이 좀 있으면 온다는 소문이 돌았지. 우리가 함경남도 홍원이라는 데에 살 때였다. 네 할아버지는 홍원교회 목사셨고. 

청진에서 반공 학생운동 하다가 홍원으로 숨어들어왔다는 소문이 있는 이영도라는 청년이 있었어. 키는 작달막하지만 눈이 짝 찢어진 것이 꽤나 강단있어 보이는 사람이었지. 이 청년이 주도를 해서 할아버지 교회 청년회원들이 인민군 무기를 탈취하고 봉기를 일으켰지. 장작개비를 들고 가서 "손 들어" 하니 따발총들을 덥석덥석 놓더란다. 패잔병들이란 그렇게 허약하더라고. 허기사 기독교 청년들도 5년 동안 빨갱이들한테 악이 받칠 대로 받친 상태였고 말이다.

참 일이 묘한 게 오히려 북한에 미군이 들어오고 남한에 소련군이 진주했으면 일이 잘 돌아갔을지도 몰라. 남한은 소작농들도 많았고 해서 좌익세가 강했다지만 북한은 기독교 세력이 참 드셌거든. 이번에 김정일이 황장엽이보고 "유다같은 놈"이라고 욕을 하는 거 보면서 웃었다. 저 자식 집안 내력 아직 못 버렸네 하고 말이야. 김일성 외삼촌이 목사 아니냐. 김일성 어머니 이름이 강반석이거든. 반석이라는 게 베드로를 뜻하는 말이니 어중간한 기독교 집안도 아닌 아주 독실한 집안이었을 게야. 그래도 이북 정권이 목사들 참 많이 잡아 죽였다. 할아버지 친구분들 가운데에도 내가 아는 분만 해도 대여섯 명은 끌려가서 소식이 끊겼으니까. 

이영도 청년이 이끄는 기독교 청년단원들이 인민군 많이 죽였냐고? 많이 죽였지. 예수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거 아니냐고? 미친 놈. 

아까 패잔병들이 허약하다고는 했지만, 또 양민들 죽이거나 하는 건 원래 잘 나가는 군대가 하는 짓이 아니야. 패잔병들이 주로 저지르지. 남쪽에서도 보도연맹이니 뭐니 후퇴하면서 죄 죽이지 않았냐. 인민군도 마찬가지였지. 교회 청년들도 살얼음판이었단 말이다. 교회에 대고 지나가던 패잔병들이 따발총 갈겨서 내 옆 벽으로 총알이 드르륵 박히기도 했다. 임마 왼뺨 맞으면 오른뺨 돌려댈 수나 있지, 왼쪽 가슴에 총알 박히면 오른쪽 돌려댈 수도 없어. 니가 아니면 내가 죽는 게 전쟁인데 칼로 흥한 자 칼로 망할까 두려워서 칼 안들 수 있냐. 네 할아버지는 떨떠름해하시긴 했다만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실 처지도 아니었을 거야. 

그렇게 홍원 읍내를 장악한 며칠 뒤에 한 청년이 사색이 되어서 뛰어들어왔어. 인민군 1개 중대가 트럭을 타고 진입하고 있다는 거야. 아이고야 다 죽었다 싶었지. 나중에 '새벽의 7인' 영화를 보면서 그때가 떠오르더라. 이젠 싸우다가 총 맞고 죽거나 끌려가서 어디 우물에 처박히거나 할 상황이라. 청년들이 눈물 흘리면서 할아버지한테 그랬지. 목사님 마지막 기도나 올려 주시기요. 예배당 마루에 동그랗게 모여서 기도를 하고 죽더라도 싸우고 죽자고 우루루 나가는 참인데 동구밖에 있던 또 한 청년이 숨이 턱에 닿아서 뛰어들었어,. 

"국군이오 국군!" 

야 찬송가 495장에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라는 구절이 있다만 참말로 그 말 한 마디에 새 하늘 새 땅이 열리더만. 트럭타고 들어오는 건 정말로 국군이었어. 국군이란 걸 알게 된 건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서 아우성을 쳤기 때문이지. 어디다 숨겨 놨던지 양손에 다 태극기를 들고 만세를 부르고, 애국가를 목청껏 내지르는 거야. 곡조? 아 물론 그 옛날 올드랭사인 멜로디였지. 그 노래를 느릿느릿 부르면 한없이 슬프지만 신나게 빠르게 한 번 불러 봐라. 군가처럼 경쾌하다. 그리고는 국군이 트럭 타고 들어오는데 천군천사 따로 없더군. 근데 나는 국군을 보고 두 번 놀랐어. 왜 두번이냐. 

첫째는 뿔이 없더라고. 눈 코 입 제대로 달리고 털도 안난 보통 사람이더라고. 난 4년 내내 남반부 국방군들은 뿔 달리고 털 나서 애들 막 잡아먹는 괴물로 교육을 받았었거든. 근데 딱 보니 뿔이 없는 거라. 그래 너도 빨갱이들은 뿔 달린 도깨비로 배웠겠지. 서로 그렇게 애들을 세뇌시킨 거지. 앗 아니다 빨갱이들은 뿔은 안났지만 도깨비보다 나은 건 없는 것들이고. 뭐라고? 조용히 해 이 녀석아. 시끄러워. 

두번째 놀란 건 국군은 왜 그렇게 자기들끼리 구타가 심한지 모르겠더라고. 인민군들은 그런 거는 없었어. 자기비판이다 뭐다 정신적으로 무지하게 괴롭히고 사람을 쪼아대긴 했지만 자기들끼리 두들겨 패거나 기합을 심하게 주거나 하는 건 없었거든. 아따 국군은 장교고 고참이고 밑에 애들 잡는데 소름이 끼치게 잡더라. 뭐라? 그건 일본군 전통이 남아 있는 거고 인민군은 그 전통에서는 벗어났던 거라? 미친놈. 헛소리하고 있네. 


어쨌건 네 할아버지는 별안간 반공 유격대 사령관(?)이 되어 버렸어. 교회 청년들이 봉기를 주도했으니 좋건 싫건 그리 될 수 밖에 없었던 거지. 홍원내무서장 그러니까 홍원경찰서장이 쓰던 책상이 네 할아버지 몫으로 오는 걸 필두로 세상이 그렇게 뒤바뀔 수가 없더군. 학교 가니까 내가 왕이야. 나를 그리 못살게 굴던 선생들이 어쩌면 그렇게 내 눈치를 본다냐. 허허 세상이 한 번 뒤집힌다는 건 그렇게 사람을 귀하게 만들기도 하고 천하게 만들기도 하나 봐. 

그런데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힐 때가 왔지. 중공군이 들어와서 UN군은 흥남 부두에서 배를 타고 후퇴한다는 거야. 인민군이 쫓겨다던 것보다 더 비참한 모습으로 미군들이 거지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오던 모습도 기억난다. 대포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 오던 날 난 학교에 있었지. 수업을 받고 있는데 둘째 형이 헉헉거리면서 교실에 뛰어든 거야. "야 빨리 나오라." 다짜고짜였어. 책보라도 싸서 나가겠다고 하니까 "책보고 뭣이고 다 때려치우고 빨리 나오라."하고 선생님 앞에서 내 팔목을 끌고 나가는 거야. 두 형제가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간 데가 홍원역이었고 흥남행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있었지. 

흥남부두는 지옥이었어. 세상이 또 한 번 뒤집히려고 하잖았겠니. 먼저 한 번 뒤집혔을 때 살판났던 사람들은 그대로 죽을 판이 된 거지. 수십만 명의 피난민들이 울고 불고 악을 쓰고 용을 쓰고 헌병들은 배에 무조건 오르려는 사람들을 인정사정없이 때리고 심지어는 총도 쐈다. 배는 한정되어 있었고, 탈 사람은 정원의 열 배는 되었을 테니까. 아니 백배일 수도 있고. 

할아버지는 본의아니게 반공 유격대의 '수괴'였잖냐. 그래서 직계 가족들은 태울 수 있도록 조치를 받았었나 봐. 그런데 지금도 황망한 것이 글쎄 할아버지가 우리를 태우지 않고설랑 "여기 있으면 반드시 죽을" 교회 동료들을 태우겠다는 거야. 장손인 큰형, 네 큰아버지만 같이 가는 걸로 하고 말이다. 여자하고 애들이니 죽이지는 않을 것이고, 다시 UN군이 북진하면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심산이었지. 이건 육지에 서 있어도 바다에 빠지는 느낌이라...... 내가 살면서 그 이후에는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네 고모 둘하고 둘째 큰아버지하고 나하고 할머니하고 다섯 명이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울었어. 돌아갈 곳은 없고, 한 발 더 내딛으면 깊이 모를 바다라. 억지로 배에 손 디밀었다가는 헌병들이 미친 개 때리듯 때려제끼니...... 

그렇게 넋을 잃고 다섯 명이 울고 있는데 우리 집에 머물던 장교 하나가 우릴 알아 봤어. 왜 울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사정을 설명했더니 험악한 욕지거리를 내뱉는 거야. "아무리 목사 라지만 지 새끼들 내버리는 인간이 어디 있어......." 그 장교가 우리를 데리고 가서는 헌병 장교한테 목사 가족이고 여기 있다간 꼼짝없이 죽을 목숨이니 배를 태워 주시오 부탁을 했고 용케 자리가 났어. 배에 오르는데 성경학교때 배운 노아의 방주라. 부둣가에 새까맣게 몰려들어 울부짖는 사람들 얼굴 하나 하나가 지금도 기억난다. 울기도 지쳐서 꺽꺽거리던 여자들, 아이들, 두 손 들고 살려 달라고 부르짖던 아저씨들...... 아마 용감했던 교회 청년 이영도도 거기 끼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할아버지가 배에서 내려 버린 거야. 도저히 가족들 두고는 못 가겠다고 큰아버지만 혼자 배에 남기고 덜렁 하선해서는 온 부둣가를 헤매다가 우리가 없으니까 한창 시가전 벌어지고 있는 흥남 시내까지 들어갔다 울면서 다시 돌아오신 거야. 그때 낯이 익은 홍원 사람 하나가 "목사님 식구들은 딴 배에 탔슴다." 하더라는 거야. 할아버지는 우리가 탄 배에 탔고 큰아버지는 열 여섯 나이에 완전히 따로 떨어져서 한동안 만나지 못했지. 

너는 미국을 욕하길 좋아하지만 그때 흥남 부두에 있던 피난민들 거지반을 구했던 건 미군이었다. 국군 헌병들이 악다구니치면서 배에 오르려는 피난민들 머리를 두들겨서 물에 떨어뜨릴 때 말린 것도 미군이었고, 포탄이 부두 근처까지 떨어지는데도 한 명이라도 더 구하려고 끝까지 남았던 배도 미군 수송선이었어. 내가 탄 배도 미군 배였는데 미군 장교가 쏼라쏼라 악을 쓰니까 배에 있던 사람 중에 영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좋아서 펄쩍 뛰더라. 뭐라고 했느냐니까 "배가 뒤집히더라도 일단 실어!" 뭐 그런 얘기였다는군. 

노예선에 탄 흑인 노예들같이 빽빽이 들어차서 똥오줌도 선실에 누면서 배멀미에 토해 가면서 당도한 게 거제도였어.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얘기하면 오늘 밤 샐 거고...... 딱 하나만 얘기해 줄게. 거기 포로수용소가 있었잖니. 내 생각에 당시 남이고 북이고 전체 한반도에서 의식주 분야에서 평균 이상을 누렸던 게 그 포로들인 것 같아. 미국이 포로 밥 굶길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잖아. 그리고 한 번씩 포로복도 지급을 해서 헌 옷들은 죄 갖다 불태워 버리곤 했어. 그때 내가 옷이 없어서, 정말로 입을 옷이 다 떨어져서 포로 수용소에서 헌 옷 실은 차가 나오는 걸 하루 종일 기다린 적이 있어. 

차가 나오니까 애들도 따라 뛰기 시작했지. 그나마 좀 성한 걸 얻으려면 가능한 차와 가까이 있어야 햇으니까. 저거 못얻으면 고추 내놓고 다녀야 한다 생각하니까 미친듯이 달리기가 되더군. 넘어져도 아픈 줄도 모르고 발딱 일어나서 차를 따라갔지. 기브미 기브미 외치면서 말이야. 난 초콜렛 달라는 말은 해 본 적 없다. 근데 그때는 기브미 즈봉 (일본말로 바지) 기브미 샤쓰를 번갈아 외치면서 트럭 뒤의 먼지를 따라붙었어. 그래서 POW 크게 찍힌 옷 한 벌을 얻어 입을 수 있었지.......

문익환 목사 부친이 문재린 목사라는 양반인데 네 할아버지하고는 절친한 친구셨다. 익환 밑에 동환은 네 둘째 큰아버지하고 잘 아는 사이고..... 그 동환 밑에 또 무슨 환이 있었는데 피난지에서 같이 교회를 다녔지. 근데 그 집안에 문성근 같은 배우도 있지만 , 그래서 그런지 그 사람의 끼도 참 충만했던 기억이 난다. 다들 배가 곯고 헐벗었던 어느날 교회에서 소풍을 갔어. 그때 그 문씨 친구가 딱 깍지를 끼고 열렬하게 기도를 시작하는데..... "저에게 복을 주시려면 멋드러진 한복 하나 주시옵고, 저에게 벌을 주시려거든 양복 한 벌을 주시옵고....." 사람들이 뒤집어져서 웃는데 찬송가 506장을 능청스럽게 부르는 거라. 원래 찬송가 506장 가사가 이거거든 "내 평생에 소원 내 평생에 소원 대속해 주신 사랑을 간절히 알기 원하네." 이걸 이렇게 바꿔 부르더라고. "내 평생에 찰떡 내 평생에 찰떡 찰떡에 기름을 발라서 한 조각 먹길 원하네....." 


처음엔 웃다가 나중엔 사무치게 같이 불렀다. 얼마나 배가 고픈지, 얼마나 찰떡에 기름이 혓바닥 위에서 아른거리는지........ 굶어서 배가 고픈 건지 웃어서 배가 아픈 건지 모르겠더라. 나중에는 애들이 울먹이기까지 했지. 내 평생에 찰떡 내 평생에 찰떡 찰떡에 기름을 발라서 한 조각 먹기를 원하네........ 너희들은 몰라. 정말로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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