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출신 통신병이 제주어 교신..도청당해도 내용 파악 어려워 2차 대전서 미군 통신병 활약한 인디언 나바호족 사례서 착안 (제주=연합뉴스) 고성식 기자 =
"글로 죽 가당 보믄 큰큰헌 소낭이 나옵니다게. 그듸서 노(ㄴ + 아래아 ㆍ)단펜으로 돌아상 돌으멍갑서"(그리로 죽 가다가 보면 커다란 소나무가 나옵니다.
거기서 오른편으로 돌아서서 달려가십시오) "알아수다. 온 덴 헌 건 어떵 됨수과?"(알겠습니다. 지원 온다고 한 것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6·25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탄환이 빗발치는 치열한 전투에서 난데없이 제주어가 무선 교신을 타고 오갔다. '무적해병'의 신화를 창조한 중부전선 강원도 도솔산 고지 쟁탈전에서다.
한국전쟁의 판도를 바꾼 도솔산 전투에서는 아직 널리 알려지지 않은 '비밀 작전'이 있었다.
연대와 대대 등 각 통신병을 제주사람으로 두고 제주어로 교신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제주 사투리를 다른 지역 출신의 아군도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니 인민군이 교신을 몰래 엿들어 봤자 뜻을 모르기 때문에 안심하고 교신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코앞에 있는 인민군과 육탄전이 수시로 벌어졌다. 전투 중 무전기를 적에게 빼앗기는 일로 우리 해병의 작전상의 비밀 유지가 어렵게 돼 장교들의 고민이 많았다.
당시 대대장이던 공정식 전 해병대 사령관은 2008년 3월 국방일보 기고문에서 "몇 대의 무전기를 빼앗겼다고 해서 연대 전체의 통신기를 다 바꿀 수 없는 노릇이었다"며 "우리의 통신 내용을 적이 훤히 듣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걱정이 큰 상황이었다"고 회고했다.
평소 태평양전쟁사를 즐겨 읽었다는 공 전 사령관은 태평양전쟁 때 비슷한 처지에 놓인 미군이 인디언 '나바호(Navajo)' 족의 언어를 암호로 이용했던 것을 떠올렸다.
1942년부터 전쟁이 끝난 1945년까지 미 해병대에 배치된 나바호족 인디언 400여명은 그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고유 언어를 구사하며 전령 역할을 톡톡히 했다. 제주어 교신은 당시 공 대대장의 건의로 공식적으로 이뤄졌다.
포대 지원, 병력 이동 사항, 부상병 발생 사항 등 모든 교신이 제주어로 대대에서 연대로, 연대에서 대대로 전달됐다.
당시 해병대의 주축인 해병 3기와 4기생 3천명이 모두 제주사람이어서 제주어로 대화가 가능해 지휘 체계에서 메시지 전달이 수월했다.
제1연대 1대대 통신병을 한 강용택(86)씨는 "당시에는 제주사람들이 다른 지역에 많이 진출하지 않았던 데다, TV 등 미디어가 없어서 제주어를 난생처음 듣는 경우가 많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