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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일만년의 달
게시물ID : readers_1784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맛사
추천 : 2
조회수 : 363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4/12/30 01:04:46
만약 영영 죽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에서 시작해 본 글입니다. 실력은 참 부족합니다만 재밌게 읽어주세요. 혹시 평가하실 부분이나 지적사항/감상 등이 있으시면 기탄없이 막 질러주세용. 관심 좋아해요...



*  *  *

 밤의 산은 어스름한 고요함을 삼킨 채 월광에 몸을 비추고 있었다. 처마를 탄 여름 밤의 서늘한 바람이 대청마루 아래로 하늘하늘 내려와 사랑방에 몸을 뉘였다. 처마에서 내려온 밤손님이 한 쪽 손에 함께 가져온 풍경소리는 청아하기 그지없었으나 사랑방에 있던 원 주인은 미어지는 심정이었다. 그는 문 밖 대청마루에 정좌한 여인의 뒷모습을 애타는 괴로움으로 보고 있었다. 곧 메마른 입술이 열리며 여인의 이름을 불렀다.
 "연천."
 그러나 그녀는 묵묵부답이었다.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정좌. 그저 바람에 흔들리는 머리칼만이 어깨 위의 밤하늘을 얇게 저며낼 따름이었다. 갈라지는듯한 마음에 목아래 맴돌던 말이 남자의 입 밖으로 뛰쳐나왔다.
 "정녕 제가 그 외로움을 지울 수는 없겠습니까?"
 뱉어낸 말로도 영혼의 목마름을 축이지 못한 그는 옷 앞섬을 쥐었다. 옷깃과 함께 마음마저 움켜쥐이는듯 했다. 허나 비탄스런 두 눈에 담기는 모습은 고개를 가로젓는 그녀의 얼굴이었다. 새하얀 목 위로 밤하늘보다 검은 머리카락이 치렁였다. 수천년을 살았다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 외로움 탓에 너를 가까이 할 수 없다." 연천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기쁘지 않게. "사랑하는 이도, 가족도, 친구도, 원수도……모두가 서서히 말라가는 모습을 이 산 두 눈으로 진처리치게 봐 왔거늘, 어찌 너를 다시 사랑하란 말이냐? 또 다시 인연이 죽어가는 것을 보란 말이냐?" 일렁이는 흑발이 가라앉았다. 야공(夜空)속 별마저 제 모습을 겨루듯 빛내고 있었으나 만월을 앞에 둔 연천의 뒷모습은 요지부동이었다.
 "또 새 외로움이 찾아들고야 말겠지."
 그 어투에는 애석함도, 증오도, 어린 자의 무지에 대한 연민도 없었다. 지나간 세월에 대한 한탄도, 후회도, 심지어 슬픔까지도 없었다. 그 말은 단지 그렇게 존재했다. 그리고 사리백은 그런 연천의 어투를 이해할 수 없었다.
 "허나 잃을 것이 두려워 얻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사람이 어찌 그리 산단 말입니까."
 사리백이 가슴께에 뭉텅이진 애석함을 토로했다. 그러나 사리백의 말은 허망히 밤공기에 섞여 흩어졌다. 투명한 원경 속에 풍령만이 몸을 울리며 떠들어대고 있었다.
 "……꼭 제가 아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다른 이라도 상관 없습니다. 사람을 찾으십시오.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 속에서 남만을 위해 사셨습니다. 한 번 쯤은 자신을 위해 살아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사리백은 입이 마음을 담지 못하는 것에 안타까워하며 계속해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처참한 부족함을 덧대어 채우려 할수록 말은 마음에서 멀어지기만 했다. 마음은 말이 될 수 없다.
 "……그래, 그렇게 생각했지. 지나간 이는 잊어버리자고. 오롯이 나만을 위해 살아보자고." 여전히 높낮이 없는 평온한 말이었다. "영생에 구애되지 않고 슬픈 일은 기쁜 일로 덧씌우며 살자고. 그렇게 한 명씩 잊어보자고." 연천은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키자 가슴께가 부풀다 내쉬며 가라앉았다. 다시 한 번 여름 공기의 밤손이 연천의 어깨를 쓸어내렸다. "안 되더구나."
 연천이 미소를 짓는다. 어째서? 어떻게? 억겁의 슬픈 세월을 말하며 어떻게 저리 평온한 미소를 띄울 수 있단 말인가? 사리백의 괴로움만 더해갔다.
 "그래, 순간을 지울 순 있어도 마음까지 속일 수는 없었어. 새로이 사랑한 이와 같이할 때는 온 세상이 행복하다가도, 시간이 지나고 밤이 오면 또 마음 속의 아린 이들이 떠오르지. 날이 갈수록 크게."
 연천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았다. 정월의 둥근 보름달은 애처롭도록 찬란했다. 주변의 별빛들을 삼킬 정도로. 
 "……."
 "참 얄궂지."
 그도 달을 올려다보고야 말았다. 그래, 그녀는 달이 뜨는 밤마다 괴로워했던 것이다. 따스한 볕 아래에서는 괴로움을 씻은듯 잊고 살다가도 밤이 찾아오면 무참히 떠오르는 달은 그녀의 나심(裸心)을 월광으로 찬란히 비추어 괴롭게 했을 터였다. 해가 가면 갈수록,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점점 커져갔을 터였다. 저 보름달처럼.
 밤이 춥다고 떠오르는 달을 막을 순 없다.
 낮의 태양볕은 따스하지만 추운 밤을 달래주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무릎을 틀어쥔 사리백의 손끝이 하얗게 물들었다. 바짓춤이 바작거리며 울었다. 안타까웠다. 무어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목이 메어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겨우 단 한 마디 말밖에 듣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그녀를 위로한단 말인가? 겨우 이 정도의 얄팍한 이해로 어떻게 상처를 감싸준단 말인가? 그것은 온전히 그녀만의 상처였다. 그녀만의 짐이었다.
 "왜 네가 괴로워 하느냐."
 연천은 다시 웃었다. 허나 그것은 이번에도 슬픔은 커녕 아쉬움조차 품지 않은 미소였다. 그 미소에 사리백은 울화가 날 지경이었다. 차마 더 고개를 들고 있기도 힘들었다. 시선을 무릎께로 떨군 사리백이 말했다.
 "……인간(人間)은, 사람 사이에 있기에 인간이 아닙니까."
 "……."
 "당신은 인간이지 않습니까."
 연천은 고개를 저었다.
 "……영생을 사는 생물이 어찌 인간일 수 있겠느냐."
 "사람 사이에만 있다면 다들 인간입니다."
 외로운 밤손이 난폭히 찾아와 풍령에 달린 물고기를 흔들었다. 물고기가 종을 때리며 운다. 대청마루에서는 수해 대신 야산의 녹음을 헤엄치는 물고기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시선을 하늘에 붙박은 연천은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긴 시간 끝에 사리백이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할 때에야 간신히 그녀의 입술이 열렸다.
 "……사람은 타인에게 기억받으며 살지."
 사리백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무릎을 한참이나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다시 돌아본 연천의 뒷모습은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그 작은 등이 말했다.
 "그래, 관계 속에서……서로에게 기억받기 위해서……."
 "그러니 사람 사이로 돌아오십시오. 남에게 기억받으시란 말입니다. 행복하시란 말입니다."
 사리백이 중언부언했다. 그러나 연천의 등에는 닿지 않았다. 바람에 머리칼을 흩날리면서도 그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람은 남의 기억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야."
 "그러니……"
 "그런데 나는 무엇이냐."
 풍령소리가 잦아들었다. 밤하늘을 올려보는 그녀의 눈은 비어있었다.
 "그런데 나는 대체 무엇이냔 말이다. 남들은 나의 기억 속에서 영원의 시간을 살아가거늘, 나는 왜 타인의 기억 속에서 채 백년을 살지 못한단 말이냐."
 순간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나의 몸은 영생을 살아가는데, 왜 인간으로써는 채 백년도 살지 못하는 것이냐."
 사리백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연천이 고독의 삶을 말하며 미소를 지을 수 있는 까닭은 지난날에 대한 회상 때문에도, 슬픔을 극복했기에도 아니었다. 단지 거기엔 감정이 들어갈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생의 숙명은 너무나도 명명백백한 진실어었기에.
 사랑방 마루에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너무합니다."
 그래, 너무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원하지도 않은 영생 때문에 행복을 목전에 두고도 다가갈 수 없다니. 영생은 죽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영생하기에 몇 번이고 죽음을 경험해야만 했다. 사랑해왔던 모든 이들에게 완벽하게 잊혀야만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존재했다. 세상의 모든 비극을 담은 존재는 그의 눈 앞에 또렷히 앉아 있었다. 간신히 입을 떼어 애통함을 전하려던 순간, 세상의 미움을 받은 여자는 남자의 말을 막았다.
 "그러지 말아라."
 "……."
 "더 이상 나를 흔들리게 하지 말거라."
 어느 새 연천의 볼에는 한없이 투명한 물줄기가 달빛을 받으며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면, 적어도……적어도 이대로 잠시만 함께하게 해 주십시오."
 메어가는 목으로 말하자 연천은 고개를 아주 작게 끄덕였다. 두 사람이 그렇게 하늘을 올려다 보던 참에 밤바람은 어느 새 멎고, 풍령의 산어(山魚)도 깊은 잠에 들었다. 모든 풍경이 멈춘 사옥. 대청마루 위에 앉은 연천은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고서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리고 여전히 평이한 얼굴로 조용히 속삭였다.
 "오늘도, 달이 참 밝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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