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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옹이와 얼음 땡 놀이를 하면서...
게시물ID : animal_178539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synousia
추천 : 6
조회수 : 548회
댓글수 : 0개
등록시간 : 2017/03/25 21: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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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야옹이와 온종일 집 안에서 함께 있다 보면, 종종 뜻밖의 놀이?를 함께 하는 경우 또한 생깁니다.
게 중에는 참으로 집사의 인내력과 노고가 동반되는 놀이가 있는데, 이를테면 얼음 땡 놀이가 그렇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 얼음 땡 놀이의 단순한 규칙만 볼 것 같으면, 그리 까다롭거나 힘들거나 하지는 않아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술래가 다가올 때 '얼음'이라고 외치며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는데, 이는 다른 동무들이 와서 '땡'하고 풀어줄 때까지 그냥 편히 기다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술래만 계속하지 않는다면, 그다지 어려울 것도 없는 놀이입니다.  
사실, 일반적인 얼음 땡 놀이의 경우, 술래가 술래인 까닭은 그만큼 술래보다 술래 아닌 자들이 많고, 그래서 보통은, 술래가 아무리 혼자 발악을 하더라도 술래 아닌 자들끼리의 유기적인 협동, 상부상조가 시나브로 술래 본인의 힘만 고갈시킬 뿐, 술래는 계속해서 술래로만 남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놀이에서 술래만큼은 상대적으로 많은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는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술래의 지위는 이 술래와 술래 아닌 자가 단둘만 존재하게 될 때 극적으로 뒤바뀌게 되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놀이 행위자가 단둘만 존재할 때는 그 사정이 참 이상하게 변모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같이 놀아주는 술래 아닌 자가 달리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술래 아닌 자보다는 술래가 더욱더 높은 지위에 머무를 확률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상대적으로 높아지기 때문입니다.
술래가 무람없이 다가오자 술래 아닌 자는 하릴없이 '얼음'을 외쳤는데, 막상 자기 주위엔 '땡'하고 풀어줄 다른 동지는 하나 없이 술래만 왔다 갔다 하고 있다면, 이는 간수와 죄수 놀이와 바를 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술래보다는 술래 아닌 자가 더 상대적으로 많은 체력과 정신력이 소모되는 위치에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술래는 허구한 날 술래만 하고, 술래 아닌 자는 맨날 술래 아닌 자만 하게 될 때, 그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가중되게 마련입니다.
심지어, 이 놀이가 언제 시작되는지는 순전히 술래의 마음에 달려 있다고 한다면, 술래 아닌 자는 매번 경계태세를 발동하여, 술래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예의 주시하며 긴장을 곤두세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 그런 것들은 아예 상관조차 없다는 듯이, 그리고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이놈의 야옹이는 항상 술래하는 것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느 순간 자기 할 일에 몰두하여 술래의 움직임을 잠시 놓쳤을 때 발생하는 문제는 오롯이 본인의 몫으로 남게 되기 때문에 집사는 항상 조심해야만 합니다. 
이를테면, 밥을 먹을 때에도, 차를 마실 때에도, 심지어 누워서 책을 읽을 때에도, 순간적으로 덮쳐 올 그 술래의 사악한 심보를 대비하여, 언제든지 '얼음'이라 외칠 만반의 준비를 갖춰 놓고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까딱 잘못하여 '얼음'을 외칠 준비가 다 되지 않은 상태에서 별안간 '얼음'상황에 돌입하게 된다면, 이것은 앞으로의 고통을 미리 예약해놓는 꼴이나 다름없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밥을 먹으면서도 그 녀석을 받아 줄 만큼의 편안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지 못할 때, 이 녀석이 다가와 하릴없이 '얼음'상황에 빠져들게 된다면, 밥도 제대로 먹기 힘든 상황이 연출될 뿐더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다리며, 팔이며, 사지가 쑤셔오고 마비되어 오는 참사가 벌어지곤 하는 것입니다.
집사의 입장에서도 참으로 희한한 것이, 그러니 그냥 일반인의 시각에서는 참으로 어이없게 비쳐질 것이, 아니 그럼, 고양이를 치우고 밥을 먹든지, 하지, 멀 그렇게 힘들게 사느냐?는 의구심 어린, 혹은 비아냥 섞인 조소나 냉소가 안팎으로 따라올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집사와 야옹이는 꿋꿋이 둘만의 얼음 땡 놀이를 시전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집사는 야옹이의 술래인 듯 술래 아닌 자가 되어 주고, 야옹이는 술래 아닌 자인 듯 술래가 되어주면서 서로 한 몸을 이루곤 하였던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얼음 땡 놀이가, 그렇다고 해서, 마냥 힘들거나 싫은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집사의 입장에서는, 특히 겨울의 추위를 맞아서는, 얼음 땡 놀이가 참으로 유익한 온기를 집사에게 제공해주기도 하였습니다.
더군다나, 야옹이는 이 얼음 땡 놀이의 유희와 전희를 집사로 하여금 오롯이 즐기게도 하였던 것입니다. 
말인즉슨, 집사는 이 얼음 땡 놀이를 통해, 오롯이 '얼음'만 가능하고 '땡'은 순전히 술래의 마음에 달린, 이 반신불수의 얼음 땡 놀이를 통해, 개인적으로 몇 가지 중요한 체험을 하였던 것입니다.
게 중에 하나는 이 얼음 땡 놀이가 명상과 묵상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점이었습니다.
마냥 준비하지도 못하고 곧바로 모든 것이 일시적으로 멈춰라가 되어버린 상황 속에서, 집사는 하릴없이 미처 하지 못한 것, 앞으로 해야만 할 것, 등등 따위를 생각하다가, 그 언제부터인가는 시나브로 하나하나 이러한 생각들을 놓아버리는 것도 참 괜찮겠구나, 차라리 이 순간만큼은 이 녀석의 갸르릉거리는 소리, 게으름 진득하게 묻어나는 모양, 솜털처럼 소복이 쓸리는 그 감촉, 등에 내 순간을 온전히 걸어도 되겠구나, 하는 안도와 위안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순간만큼은 우리의 얼음 땡 놀이가 참으로 얄궂게도 고맙게 느껴졌던 것입니다.
그리고 집사는 이 놀이를 통해서 관계 속에서의 수동적인 능동성, 혹은 정중동의 느낌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었습니다.
마냥 들이대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마냥 들이받히는 것도 아니고, 들이받히되 들이받는, 이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행위를 집사는 야옹이와의 얼음 땡 놀이를 통해 조금은 배운 것 같기 때문입니다.
'얼음'밖에 달리 외칠 말이 없지만, 그 '얼음'은 차갑고 냉랭한 실험실에 박제되어 있는 그런 얼음이 아니라, 너를 뒤에서 안고 조용히 흔들어대는, 마치 뜨거운 대기 속 한 줄기 시원한 바닷바람처럼 안아올리는, 그런 얼음일 수 있음을, 조금은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얼음'은, 영원토록 얼어서 존재하는 무한성이 아니라, 비록 언제 '땡'으로 끝날지 모르는 상황 속에서도, 순간순간 피어나는 현재성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조금은 만끽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집사는 이 얼음 땡 놀이를 통해 조금은 더 성숙해졌는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순전히 야옹이의 덕분이기도 하였으니, 또 한 번, 이 한 마디로 마지막을 갈음하는 것이 결코 어줍지는 않을 것입니다.
고맙다, 야옹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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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와 여자는 부르지 않을 때 찾아오는 것  - 작자 미상 ->
출처 http://blog.naver.com/ha_eun_love

사진은 중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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