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대를 하고 6개월 정도가 지났을 무렵 뜻밖의 편지가 한 장 도착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온 편지였다.
고등학교 시절 관심이 있었지만 어영부영 하다가 졸업을 하게 되었고 그 이후로 다른 학교에 다니면서 연락이
끊긴 친구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부대로 편지가 왔고 입대 전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근 6개월 정도를 여자구경도
못하다 보니 편지만으로도 마음이 설레였다. 틈틈히 편지를 써서 보내는게 삭막한 군생활 중 유일한 낙이었고
그친구가 면회도 몇 번 오면서 우리들은 그렇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정기휴가를 나가기 몇 일 전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휴가때 둘이서 어디라도 놀러가지 않겠냐고 용기를 내
물어봤고 다행히도 그 친구는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해주었다. 휴가 전 날 설레이는 마음에 잠을 못이뤄 그만
근무교대를 하는 시간에 늦고 말았지만 고참의 거친 욕설도 사랑의 세레나데로 들릴 정도였다.
그렇게 휴가를 나가 어디로 놀러갈지 물어보니 그친구는 바닷가에 가고 싶다고 했다. 위수지역을 벗어나면
안될 것 같았지만 이미 내 사랑의 위수지역은 전국이었다. 그렇게 여자에 눈이멀어 국가의 반역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기차에 몸을 싫었다. 휴가중엔 위수지역이 상관이 없다는 걸 알게된 건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한참을 놀다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고 어느 덧 돌아가야할 시간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역으로
향하면서 걷다보니 조막만한 그 아이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떨리는 마음으로 살며시 손을 잡아보았다.
그친구는 살짝 흠칫했지만 다행히 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분위기는 화기애애의 절정으로 치닫았고
우리는 기차를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어느덧 기차가 도착하고 우리는 기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기차가 출발할때 쯤 그친구의 안색이 안좋아지기 시작했다.
무슨일이냐고 물으니 핸드폰이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아까 얘기하면서 벤치에 그대로 놓고온 것 같다는
말에 나는 기차에서 잽싸게 뛰어내려 그 벤치로 향했다. 한참을 찾아봤지만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고 기차는
서서히 출발하기 시작했다. 결국은 포기하고 기차를 타기위해 뛰어갔고 문 앞에선 그 친구가 내 가방을
들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날 기다리고 있었구나라고 감동하고 있던 찰나에 기차문이 닫히기 시작했고 나는
기차에 올라타기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믿기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
그 친구가 내 가방을 문 밖으로 던져버린 것이다. 이게 뭔일인지 상황파악이 되지 않았고 가방이 날아가는 모습이
내 눈에는 슬로우 화면처럼 보였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냥 바닥으로 떨어졌다면 줏어서 다른기차를 타겠지만
문이 닫히면서 문에 가방끈이 끼었고 그걸 놓치면 나는 졸지에 미아가 될 판이었다. 결국 가방을 부여잡고 기차와
함께 달리는 수 밖에 없었다. CF에서 기차와 함께 달리는 원빈의 모습은 멋있었지만 난 원빈이 아니었다.
원빈과 내가 닮은부분이라곤 상동염색체 정도였고 내가 직접 볼순 없었지만 침 질질 흘리면서 뛰는 내 모습은
그리 멋져보이지 않았을것이다.
날 발견한 역무원이 깃발을 흔들어 기차를 세웠을 때 이미 한참을 뛰고난 후였고 그 추한 몰골을 수많은 사람들이
보고 난 후였다. 문이 열리고 기차에 올라탔지만 그 친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객차에 들어서서 자리에 앉아있는
그 친구를 발견했고 날 보는 그 친구의 표정은 야반도주한 계주가 계원과 마주친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곤
가방이 필요할 것 같았다는 둥 기차에 못 탈것 같았다는 둥 하면서 횡설수설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입을 다물었고 그 친구 역시 그후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린 한마디 말도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점점 연락이 뜸해지기 시작했고 어느순간 완전히 끊기고 말았다.
내가 제대한지 한참 후에야 그 친구로부터 결혼한다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오라질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