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친구는 5수째에 접어드는 공시생입니다. 한 해, 한 해가 갈 수록 할 말도 삼키게 되더라고요. 저는 친구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 시기에 정신력이 흔들리지 않았으면 했거든요.
서른 살이라는 나이가 그런 것 같습니다. 아버지세대의 은퇴시기가 겹치면서 점차 초조해지는 나이라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면 타격이 더욱 크죠. 이런 말을 하는 저도 제대로 자리잡은 녀석이 아닙니다만, 친구는 현재는 가장 약한 위치에 놓여있기 때문에 제 고민은 마음 한 구석에 묻었습니다. 심지어 제 고민을 모르는 친구도 아니예요. 같은 상황에 놓인 적이 있었고 그 상황에 대한 선택의 시기가 그 친구가 조금 더 빨랐을 뿐입니다. 어쩌면 그 친구가 제 미래일 수도 있습니다.
각설하고 오랜만에 만나 커피라도 사주고 싶어서 친구가 학원을 마치고 오는 길에 만났습니다. 평소처럼 시덥잖은 이야기를 하던 중에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가 나왔어요. 친구의 할머님 나이가 여든이 넘으셨다더군요. 그녀의 가족들이 거취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랍디다. 동생이 있는 수원에 갈지, 할머님이 계신 이 시골에 남을 지 고민이라 해서요. 제가 넌지시 말했습니다. 5년 안으로 할머님 돌아가실수도 있다. 수원으로 가라.
그땐 우스갯 소리였는데 반나절도 안되서 그게 진짜가 될 줄은 몰랐거든요. 할머님이 진짜 아프시다는 겁니다. 암이 전이가 된 상황인 것 같은데, 그 친구가 전화가 와서 제게 그러더라고요. 니가 기도했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할머니를 위해 기도하라고. 그리고 말 함부로 하지 말라면서.
굉장히 많은 생각이 들었는데 참았어요. 왜냐하면 이 친구는 충분히 정신적으로 몰린 상태고 제가 실언을 한 건 사실이니까요. 그래서 저는 평소에 했던 것처럼 말을 아꼈습니다. 낮부터 이 친구는 분석이 아니라 공감을 원한다며 판단을 필요로 하지 않은데다 자신의 편을 들어달라고 분명하게 요구해서요.
단지 그녀가 말을 하던 도중에 스스로를 탓하는 게 느껴져서 그 생각을 끊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우리 나이는 슬슬 누군가의 죽음을 염두에 둘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고 저는 할머니와의 관계가 깊게 형성된 사람이 아니라서, 그리고 이런 종류의 후회는 남은 사람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마음의 상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왜 충분히 못했는가에 대한 후회는 자식들이라면 다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요. 전 지금 살아계신 부모님한테도 잘해드린 게 없어서 우울해져요.)
그냥 그 괴로움으로 인해 친구의 죄책감이 커지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런데 대화를 하면 할수록 저는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EQ 저하자가 되더라고요. 사이코패스? 나중에는 제게 협박성으로 말하더군요. 나 너네 집 어딘지 알아. 주소는 모르지만 아파트 어딘지 알아서 불지를 수도 있다며, 이어서 너도 너네 엄마 건강 조심하라며 언제 암이 생길 지 모른다는 말을 하는데...
약간 이 대목에서 저 친구를 어떻게 해야하나,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무리 공무원 시험 준비를 오래 했다고 하지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감정 조절 실패로 저렇게 말할 수 있을까, 혹은 저 친구가 여태 나를 어떻게 생각했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어서 본인이 스스로에게 말하더군요. 하긴 너는 내 친구였지.
저 말이 얼마나 친구의 자존감이 낮아졌는지 느껴지는 한편으로는 서글펐습니다. 장수생임에도 그녀에게는 저를 제외하고도 다른 친구들이 있어요. 저는 이 친구가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말을 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해요.
솔직히 이런 말은, 친구야 네가 잃어도 후회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는 거잖아.
모르겠어요.
최근들어서 저를 만나면 연애는 필수 결혼은 선택을 말하는 심리를 파악하기가 싫습니다. 걱정 아닌 걱정을 일삼으면서 툭툭 건드리는 거, 늘상 있던 일이지만 오늘따라 착잡하네요.
머리 한 구석으로 여기까지 생각해요. 차라리 내가 너를 먼저 손절하면 너는 독하게 마음 먹고 공무원 붙을까. 너는 분명히 될 친구인데, 그 이후에 내가 없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지 모르겠다.
11.10 이후 다시 연락 했습니다. 친구는 제게 사과했고 저도 친구에게 제가 말실수를 한 것 같아 미안하다고 사과 했습니다. 그리고 보통 대화는 상대의 공감을 바라는데 제가 제 생각이 강해서 그걸 무시하고 제 입장만을 이야기 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죠. 제가 불안했던 근본 원인은 그런 표현을 하는 친구와의 관계가 이어지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친구도 저와의 관계가 단절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대화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좌우지간 전 이 친구가 그냥 빨리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서 이 상황을 털어버렸으면 하는 생각이 더 커져서 자체적으로 연락을 끊겠다고 했습니다. 한시간도 공시생에게는 귀한 시간인 것 같아서요. 좀 잔인하지만 친구에게는 지금 공허함이나 불안도 사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제 판단도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ㅎㅎ) 친구에게 먼저 연락을 하지는 않겠다고 하고 마무리 했어요.(내년 6월까지) 저를 위해서 성내주신 오유분들께는 죄송하지만 저는 친구와 다시 관계를 이어가려고 합니다. 이 친구가 잠시 이성을 잃긴 했지만 나쁜 마음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도 아니고, 제가 주변에서 본 법규를 가장 잘 지키는 사람인걸요.(횡단보도 신호등 보행) 저도 감정이 격해지다보니 풀 곳이 없어 오유에 적었는데 많은 분들이 제 편 들어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이만 줄이겠습니다. 건강 조심하세요!
++)이 친구 손절했습니다. 하... 오유 여러분들 말이 맞았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은 진짜 이기적인 거더라구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