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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roSpera의 4번 댓글 반박 -규원사화 교감기 문제
게시물ID : history_179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고려노총각
추천 : 4/9
조회수 : 475회
댓글수 : 5개
등록시간 : 2011/06/22 06:35:21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다. 논리전개의 기본적인 태도를 상실했거나 정해진 결론에 맞추려는 짜 맞추기의 흔적이 역력하다. 주장을 하려면 세 가지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즉 전제로 둔 주장의 핵심-그에 대한 전거-핵심과 전거의 정합성이다. 헌데 말하려고 하는 논지는 이해하겠는데 그 다음부터 영 갈팡질팡이다. 규원사화 교감기의 내용을 전거로 들어 영인본이 진본이 아니라고 강변하는데 이제 그걸 하나하나 정리해보겠다.

규원사화 영인본은 분명히 북애자가 육필肉筆로 저술한 책이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다른 사서들을 토대로 삼아 상호 고증 인용하였음이 명백하니 앞서 말한 북애자의 찬술 자세를 숙고해 볼 때 의심이 나거나 서로 배치되거나 군더더기가 될 만한 기록들은 과감히 취사선택하였음이 충분히 감지된다. 하지만 다른 두 필사본은 원 저본의 기술태도를 충실히 따른 결과 이런 상이점이 나타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은 왜 거두절미하는지 모르겠다.

-손필본은 잘 알다시피 일제가 <조선사편수작업>을 시작하면서 전래 사서들을 탈취 소각하는 가운데 거의 전부가 소실되었다고 알려진다. 헌데 양주동이 간신히 은익 했던 소장본을 스스로 욕심을 부려 공개하길 꺼려하다가 분실하였는데 그전에 손진태가 어떤 경로를 통했는지는 모르지만 몰래 보고 필사하여 간직한 뒤 해방 후에 공개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손필본은 적지 않은 부분을 기억에 의존하다보니 많은 오류와 첨삭(통 채로 탈락된 문구도 많이 보인다)이 드러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책을 기준으로 영인본의 단 8자 탈락을 문제 삼아 위서로 모는 자세는 영 마땅치 않다.

여기에서 손진태가 손필본의 필사후기筆寫後記에서 "此書據無涯梁柱東君所藏本而轉寫. 無涯所藏, 亦非《揆園》原本則明白. 只存上卷一冊. 朝鮮思想史上, 可足謂一奇書, 故使人寫之   이 책은 무애 양주동군이 소장한 것에 의거하여 옮겨 적은 것이다. 무애가 소장한 것 역시 원본이 아님은 명백하다.   단지 윗 권 한 책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의 사상사에 있어 가히 하나의 기서라 할 만하기에 사람을 시켜 옮겨 적었다"라고 하여 소장 본 규원사화를 상권으로 보고 하권은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영본에서는 '卷之'로 기록하였다. 이로 미루어 짐작컨대 북애자는 자신의 소신대로 揆園史話卷之一肇判記,揆園史話卷之二太始紀, 揆園史話卷之三檀君紀라는 식으로 구분하여 앞의 중복되는 부분이나 미심쩍은 구절들을 과감하게 생략하였을 뿐이다 라는 사실이 특히 주목되기 때문이며 또 이러한 면면이 상기와 같은 판단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첨언할 것은 이런 주장도 교감기에서 언급한대로 [영인본]에 궐락이 있었을 경우 보다 공정한 비교분석과 검증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지 만일 그렇지 않다면 교감기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므로 진위논쟁 자체가 설 자리를 잃게 된다.

한 가지 더 눈여겨 볼 점이 있다. 배척자들이 지지하는 초록불씨 이문영이 고의인지 아니면 해독이 어려워 지나쳤는지는 모르겠다만 교감기의 찬술자는 분명하게 몇 번에 걸쳐 그의 견해가 단지 조심스러운 추측이며 언제든지 반증이 있을 수 있다는 학자로서의 양심과 열려있는 의식을 가진 자세를 보이고 있다.   헌데 초록불씨 이문영은 이런 분석태도와 견해를 아주 확정된 결론으로 착각시키려고 뒷부분을 아예 통째로 잘라내면서 읽는 사람들의 눈을 현혹하거나 착각에 빠져들게 하려는 단정을 해버린다.

한영본의 원문은 총 26,828자이며 손필본은 총 26,357자로서 두 판본 간에 471자의 차이가 있다. 이 가운데 손필본에는 있으나 한영본에는 없는 글자가 연자衍字를 포함하여 모두 27자인데 일부 글자는 원본에 없던 것이 필사본으로 옮겨지며 필사자에 의해 내용이 보충되면서 첨가되었다고 보기에는 무리라고 여겨지는 내용이 보인다.

먼저 <태시기> 말미의 해당 문장을 판본별로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한영본]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 □□□□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손필본] 乃城於涿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즉 손필본의 '遷徙往來 號令天下' 8자가 한영본에는 빠져있다. 필사본에 있는 문구가 정작 원본에 없을 수는 없으며 더욱이 손필본은 한영본과 비교해 보아도 무려 500여 자를 빼먹는 등 필사할 때 다소 소홀한 흔적이 역력한데 한 두 글자의 조사助詞도 아닌 본문 8자를 보충하여 첨가하였을 리가 없다. 문맥의 내용을 살펴보더라도 '宅於淮岱'에서 문장이 일단락됨에 무리가 없는데 그 부분이 조심성 없는 필사자의 눈에 띄어서 없던 내용이 8자나 보완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한영본을 친필 원본으로 가정한 뒤 그 후에 내용이 보충된 원본의 재판본이 나왔으며 손필본은 그 재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은 한영본 자체가 필사된 판본일 것이라는 여러 흔적으로 인해 더욱 희박해진다.

한영본과 손필본을 상호 교감하여 볼 때 비록 손필본의 것을 버리고 한영본의 것을 취할 수 있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반대의 경우도 무려 30곳 정도가 된다. 물론 교감의 내용에 따라 그 숫자에 변동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한영본의 것을 버리고 손필본의 것을 취할 경우가 대부분 문맥의 내용상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글자의 순서가 바뀌는 즉 필사자들이 필사하며 흔히 행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라는 점이다.

[한영본] 古有淸平山人 李茗高者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X)
[손필본] 古有淸平山人 李茗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O)

[한영본]《史記》.《漢書》通及典, 皆有王險城字, (X)
[손필본]《史記》.《漢書》及《通典》, 皆有王險城字, (O)

[한영본]《北史·勿吉傳》曰亦: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X)
[손필본]《北史·勿吉傳》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 (O)

[한영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白頭於山, (X)
[손필본] 然則, 神市氏降, 旣在於白頭山, (O)

[한영본]《孟子》舜曰生諸馮, 東夷之人也.」 (X)
[손필본]《孟子》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 (O)

[한영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八聖矣之名, 必表以佛家名字, (X)
[손필본] 則猶有一分迂소之責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O)

[한영본] 夫南方之濕熱, 北方燥寒之, (X)
[손필본] 夫南方之濕熱, 北方之燥寒, (O)

[한영본] 立業垂憲未嘗有差, 末流而之弊猶然如此. (X)
[손필본] 立業垂憲未嘗有差, 而末流之弊猶然如此. (O)

[한영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敎始成, (X)
[손필본]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而政敎始成, (O)

주로 조사助詞의 순서가 바뀐 이러한 실수는 전체적인 내용을 머리에 담고 그것을 글로 표현하는 저자의 입장에서 행해진 실수로 보기는 힘들다.  그 가운데 한영본에서 史記漢書通及典의 '書'와 '通' 사이 및 孟子舜曰生諸馮의 '子'와 '舜' 사이 등 글자의 순서가 바뀐 것으로 여겨지는 문장마다 붓으로 그린 작은 원이 표시되어 있는데 이는 옮겨 적다가 글자가 바뀌었음을 나타내는 듯하니 즉 '及'자는 '書'와 '通' 사이에 와야 하며 '曰'자는 '子'와 '舜' 사이에 와야 함을 표시한 듯하다.

또한 한영본의 원문은 줄이 쳐진 빈 책空冊에 붓으로 직접 쓴 형태로 되어 있는데 전체에서 16자 정도가 이미 쓰여 진 글자 사이에 덧붙여 적어 넣은 작은 글자이다. 그 가운데 몇몇 助詞는 글을 적다가 흘렸기에 다시 적었다고 볼 수 있지만 '閉'·'里'·'惑'·'侯' 등의 글자는 문맥의 내용을 뒷받침하는 글자들로서 내용을 재검토하며 보충하여 넣은 조사와는 성격이 틀리는 글자들이다.

[閉]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축
[里] 上有九萬里者
[惑]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侯] 藍侯儉達, 與靑丘侯?句麗侯?루진侯, 率兵伐殷, 遂深入其地

그리고 군데군데 틀렸다고 생각되어(실제로 몇 군데는 교감 상 틀린 곳으로 밝혀졌다) 일정한 표시를 한 부분 가운데 人事則軀殼의 '事'(교감 상 '死'의 오자이다)는 글자 전체를 붓으로 둥글게 덧칠하여 글자가 틀렸음을 즉 잘못 옮겨 적었음을 나타낸 듯하다.   글자를 옮겨 적는 필사자의 입장이 아닌 내용을 옮겨 적는 저자의 입장이라면 문맥의 내용상 '人死'가 분명한 곳에서 '人事'로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같이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 원본이 아님과 더불어 손필본 계열 필사본의 저본이 된 양주동 소장본은 한영본이 아닌 제3의 판본을 저본으로 하여 필사되거나 인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위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한영본에 없는 글자를 손필본에서 모두 27자를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한영본에서 순서를 바꿔 쓴 것이 손필본에는 바르게 되어 있으며 또한 몇몇 글자는 문맥의 내용에 있어 오히려 손필본이 한영본의 내용상 결점을 보완해 주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한영본: 敎]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特盛, 自能聞風驚奇. (X)
[손필본: 交]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交特盛, 自能聞風驚奇. (O)

[한영본: 事] 人事則軀殼厥冷, 骨肉梗固 (X)
[손필본: 死] 人死則軀殼厥冷, 骨肉梗固 (O)

[한영본: 民] 曾無一人, 民於南方而制天下者 (X)
[손필본: 起] 曾無一人, 起於南方而制天下者 (O)

이와 같은 내용으로 살펴볼 때 비록 한영본이 그 지질紙質 등으로 보아서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이 분명하다 하더라도 북애노인이 직접 쓴 친필 원본이거나 또는 양주동 소장본의 필사 저본이 된 판본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본 글에서 한영본의 친필본 여부를 검토함에 있어서는 한영본과 손필본의 두 판본만을 문자 교감의 방법을 통해 비교하여 내용을 검토하여 보는 단순한 방식을 택하였다. 따라서 여기에서 얻어지는 결과는 규원사화의 진위여부를 판단하는 논거 가운데에서도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인지 여부의 판단에 대한 참고 자료라는 아주 제한된 분야에 참고 될 수 있는 자료가 될 뿐이다.

본문에서는 몇몇 내용을 지적하며 한영본이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니라 친필 원본이나 또는 그 후의 원본을 필사한 또 다른 필사본임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결과가 한영본이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이 아닐 것이라든가 혹은 규원사화자체가 조선 말기에 위작된 위서일 것이라는 논거로 말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서지학상으로 한영본이 지질紙質 등의 상태를 보아 조선 중기에 쓰여 진 것임이 분명하다는 가정 아래 [북애노인의 친필본]이 아님을 확인하는 본 교감의 결과가 결합된다면 규원사화의 원 저작 연대가 적어도 한영본의 지질紙質로서 확인되는 연대보다는 오래되었음이 확인될 수 있으며 아울러 한영본은 원본의 저작 이후에 손필본 계열과는 다른 시기에 쓰여 진 또 다른 필사본임이 인정되어 다양한 필사 판본이 있었음을 말하는 것이 되므로 규원사화자체가 위서僞書가 아닌 진서眞書일 가능성을 높여 주는 내용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그러나 비록 한영본의 발견으로 규원사화가 조선 말기에 단순히 위작되었을 것이라는 추론에는 쐐기를 박을 수 있었다 할지라도 더 나아가 정확한 저작 연도에 대해서는 문헌 및 문자 측면의 고증을 통하여 보다 엄밀한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며 그러한 종합적인 고증에 의해 정확한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규원사화를 위서僞書나 개찬서改撰書 혹은 진서眞書일 것이라는 어느 하나의 단정은 금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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