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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0년 정사(正使)와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을 비롯한 도합 541명에 달하는 대규모 조선사신단이 북경으로 향했다. 연행기간 146일 동안 왕복 6천300여리(약 2천500km)를 오간 이 사행단에 일암(一菴) 이기지(李器之.1690-1722)라는 사람도 있었다. (출처: 연합뉴스,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은 서양떡 카스테라")
그는 이 때 보고들은 내용을 일암연기(一庵燕記)라는 기행문으로 정리했다. 이에는 북경에 머물면서 천주당에서 서양 문문을 접하며 겪은 장면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서양떡과의 만남이다. 아버지 이이명을 따라온 이기지가 북경의 천주교 남당을 방문한다.
포르투갈 신부 수아레즈, 마갈렌스, 카르도소, 그리고 독일 선교사 쾨글러가 이들을 정중히 맞았다. 이기지는 일행이 돌아가고도 홀로 남아 서양인과 수다를 떨었다. 간식도 나왔다. 노란 빛깔이 인상적인 과자, ‘계란병’으로 기록된 과자였다. (출처: 음식 문헌 연구자 고영, 아리고 쓰린 카스텔라 담론)
"서양 떡 30 개를 먹으라고 내왔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의 박계(薄桂 밀가루에 참기름과 꿀을 섞어 반죽해서 직사각형으로 크게 썰어 기름에 지진 조선의 과자)와 비슷하게 생겼다. 입 안에 넣자마자 녹았는데 그 맛이 부드럽고 감미로왔다. 참으로 기이한 맛이었다. 재료는 밀가루, 달걀, 사탕가루 등이라고 한다."
맛에 대한 기억만큼 뇌리에 오래 남는 것도 없다. 일암은 베이징에서 돌아오자마자 달콤하고 부드러운 서양 떡, 가수저라(카스텔라) 만들기를 시도한다.
일암은 베이징에서 먹었던 카스텔라의 부드럽고 달달한 맛을 잊지 못해 레시피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조선으로 돌아오는 여정에 올랐을 것이다. 그의 머릿 속에는 서양 선교사들을 통해 접촉했던 천문, 지리, 음식에 대한 선진 문명을 조선에 어떻게 도입할지에 대한 고심과 함께 카스텔라 만들기에 대한 시뮬레이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빵의 역사를 말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일화가 바로 일암 이기지의 베이징에서 먹어본 카스텔라이다. 바로 그 일암 선생이 내가 사는 고장 충남 부여에서 출생한 사람이며 부친은 좌의정 이이명이며 모친은 구운몽의 작가인 서포 김만중의 딸이다.
일암의 카스텔라 레시피는 어설프기 그지없다. 당시의 지식으로는 달걀 단백질을 팽창시켜 부드러운 식감을 내고 설탕으로 달달함을 더해 대류 열로 익힌 밀가루의 가벼운 풍미를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카스텔라를 우리의 설기떡과 비슷한 '서양떡' 이라고 지칭하며 어리숙하게 적어온 레시피 그대로 카스텔라 만들기를 시도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일암의 카스텔라 만들기에 대한 도전은 1년 남짓 밖에 이어지지 못한다.
일암이 신임사화(1722년)에 연루되어 32세에 옥중에서 숨을 거두지만 않았더라면, 실패를 거듭하는 과정을 거쳐 조선 최초로 카스텔라를 도입하고 만드는데 성공했을 것이다. 카스텔라 만들기에 성공을 했더라면, 교과서에 나오는 위인으로 대접받았을 지도 모르겠다. (출처: 대전일보 오창경, 조선의 선비 카스텔라 맛에 반하다.)
<노론 영수 이이명의 초상.> 이이명은 숙종43년 정유독대를 통해 세자(경종 임금) 교체를 시도했지만, 끝내 실패하고 자신도 아들과 함께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 역사만화가님 http://gall.dcinside.com/cartoon/4301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