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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글) 눈 떠보니 여긴 어딘지... 막막하네요
게시물ID : gomin_1794453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익명aGhua
추천 : 7
조회수 : 1094회
댓글수 : 17개
등록시간 : 2022/04/04 11: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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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생으로 살았습니다.

학교에선 공부만 했고 선생님들은 칭찬해주시는 그런...

그래서 사람들이 학창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말할 때 이해를 못했어요.

저는 친구들과의 추억도, 재미도 없이 그저 1등 해야 한단 압박감 속에 갇혀 지낸 기억 밖에 없으니까요.

가난한 동네에서 자랐기에 어릴 때부터 가난한 동네에서 최대한 멀어지고 싶단 생각 뿐이었어요.

그리고 어릴 적 살이 좀 쪄서 따를 당하고 난 뒤, 다시는 누구에게도 무시 당하지 않겠단 오기도 있었구요.

대학도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곳으로 갔습니다.

대학에서도 성적은 나쁘지 않았어요. 과에서 한 명에게만 주는 장학금을 받기도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졌습니다.

하루는 새벽에 과제를 하고 있는데 화가 치밀어 오르면서 저도 모르게 컴퍼스로 눈을 찌르고 싶단 충동을 느꼈어요.

깜짝 놀라 손에 쥔 컴퍼스를 내던졌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죽을 것 같이 끔찍한 공포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당장 상태를 버티는 것도 힘이 드는데, 옆에선 취업 준비에 박차를 가하는 친구들을 보니 현기증이 느껴졌습니다.

그냥 어디론가 숨고 싶어졌어요.

좋은 상대를 만나 예쁘고 행복하게 사는, 미래의 삶을 상상하는 것조차 안 되더군요.

어떤 삶을 살게 되든 불행할 거란 근거없는 확신이 머리 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방황하다보니 졸업이 늦어지고, 졸업을 하긴 했지만 쌓아놓은 스펙은 없고 나이는 적지않고

무기력해진 모습을 숨기자는 핑계로 공시생 코스프레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엔 조금 쉬고나면 의욕이 생기겠지란 기대가 있었습니다. 오판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지 않고 홀로 지내다보니 상태는 더욱 안 좋아졌습니다.

공시 공부를 끄적이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침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나마 몸을 움직이는 건 귀농하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할 때 정도였습니다.

비료를 나르고, 무너지는 절벽을 돌로 보수하고, 기계가 안 들어가는 곳에 있는 농장을 맨 손으로 철거하고 다시 시설 세우고 등등...

나름 몸을 전혀 안 움직이는 건 아니라며 합리화를 했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눈을 감았다 떠보니 이미 나이가 30대 중반의 끝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눈을 감았다 뜨니 이렇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릴 적 TV에서 보던 고시 낭인... 아니 그보다도 못한 상태의 저를 발견했습니다.

정신이 들었던 건 정권이 바뀌며 이제 공무원 신규채용을 대폭 줄일 거란 뉴스를 보고 나서 입니다.

그간 어떻게든 합리화해온 처지를 이제는 합리화할 수 없더군요.

아무 스펙도, 아무 경험도 없이 나이만 든 채 사회로 나가야 하는 제 자신이 이제야 보였습니다.


남는 후회라면 미리 제 자신의 상태를 돌보지 못했단 부분입니다.

어차피 남들도 이렇게 힘들 거라며 넘기지 말았어야 했고,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주변에 알리든 병원에 가서 전문가의 도움을 받든 했어야 했습니다.

이제 인생에 크게 바라는 점은 없습니다... 다만 지금처럼 불안함 속에 살지 않았으면 싶은 마음 뿐입니다.

무엇보다 현실적으로 사회로 어떻게 진입을 해야할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지인도 많지 않고 부모님께 터놓고 얘기하려니 무너지실까 걱정됩니다.

일단 지역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상담 일정을 잡고 정신과도 찾아가 볼 예정입니다.

저 같은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혹시라도 비슷한 경험을 해보신 분이 계시다면 조언도 듣고 싶습니다.

여전히 내면에서 나쁜 목소리들이 속삭일 때가 있지만, 마냥 포기하고 싶지 않아 글을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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