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즐겨찾기
편집
드래그 앤 드롭으로
즐겨찾기 아이콘 위치 수정이 가능합니다.
우울하고 비참하고 인생이 안풀린다는 사람들에게
게시물ID : gomin_1794660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bite1235
추천 : 0
조회수 : 1340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22/04/17 02:35:04
옵션
  • 창작글
  • 베스트금지

안녕하세요 늦은밤 유튜브에서 감성적인 제목을 한 1시간짜리 음악 듣다가 삘 받아서 이때 아니면 내가 언제 마음가짐을 잡고 공부하나 싶은 마음으로 속 시원하게 풀고 비록 장문으로 쓰는 글을 써본적이 없어 엉망진창으로 보이시겠지만 익숙한 일기 형식으로 제 이야기를 썼어요 약 7~8년전 초등학교 고학년때쯤 나에게 ‘첫눈에 반한 사람’ 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한 좋아했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내가 먼저 말 걸었을때 거절하지 않고 친근하게 대답해준 순간을 기억한다. 하지만 제일 기억에 남았던 순간은 그사람과 그의 친구와 나와 술래잡기를 하던 순간이었다. 그때를 빌미로 친하게 지내오다가 나의 철없고 너무나도 변명할 여지가 없는 잘못으로 그 사람이 한순간에 남이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무엇이 잘못된건지 몰랐다. 하지만 그 사람 1명을 잃은게 아니라 2명을 잃었다. 그 다른 사람은 놀랍게도 나와 특공무술을 1년 가까이 같이하던 남자였다. 물론 그 친구는 나보다 먼저 다니고 있었고 내가 1단 딸때쯤 그 친구는 2단 승급하고 배우고 있었다. 두명을 잃은 이유는 간단하고 당연한 이유다. “집착” 이 관계가 끊어지게 된 이유였다. 그 일이 아마 6학년때 쯤이였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일 이후로 “연락이 없네” 하고 바로 중학교로 입학했던 거 같아서이다. 하지만 이 일이 나의 첫번째 시련은 아니였다. 그 전인 1~2년전 2014년 3월 16일이 첫번째 시련이자 나에게 가장 큰 슬픔과 가정에게 비극을 가져다준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외할아버지의 부고’ 였다. 그날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도중 기억이 잘 안나지만 복도에서 어떤 사람이 두드리셔서 담임선생님이 나갓다 들어오셔서 내 이름을 부르면서 다급하게 가방 챙기라고 하셧던 거 같다. 그렇게 부랴부랴 챙기고 정문으로 갔을때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 그때 엄마의 얼굴은 비통한 표정으로 기다리셧던거 같았다. 그렇게 차를 타고 외할아버지가 누워계시던 요양원에 가보니 외할아버지의 친가족이 다 모이지는 않았지만 어렷을때 같이 외할아버지댁에 놀러갓던 친척들은 다 모여잇엇다. 나는 그 어린나이에 사람의 죽음을 한번도 보지도 않았고 겪어보지도 않아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도 안되고 조용한 분위기라 조용하게 있었다. 그러다가 엄마가 내 손을 잡고 외할아버지한테 마지막 인사를 하라고 하셨다. 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그만큼 충격적이였던 거 같다. 아마 “할아버지 고생하셨어요 이제 편히 잠드세요” 라고 했었던 거 같은데 이 마지막 인사조차 기억을 못해 내 자신이 한스럽고 비통하다. 그렇게 마지막 인사를 하고 물러나있다가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시기 직전 나에게 하고싶은 말이 있다며 다시 엄마가 내가 키가작아서 들어서 할아버지에게 최대한 가까이 내가 들릴수 있게 잡아주시면서 할아버지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을 경청했다. “행복하게.. 살아라..” 외할아버지가 숨이 서서히 멎어지시는 상황에서 끊기지않게 노력하셔서 하신 말씀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꼈다. 다시 뒤로 물러서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외할아버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는 그 순간은 지금까지 겪었던 일들보다 더 선명히 기억나고 잊을 수가 없다. 외할아버지의 숨이 멈췄을때 가장 가깝고 가장 아끼셨을 자녀인 이모와 엄마가 다급하게 할아버지를 부르시면서 계속 부르셨다. 그순간 나 빼고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우는 것을 느꼈다. 난 무엇 때문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누나는 나에게 물었다. “넌 왜 안울어….?” 라고 물었었는데 사실 그날 겪었던 일들이 가물가물하다. 아빠가 나와 누나와 사촌친척 남매를 데리고 복도 끝 밖이 보이는 다리로 데려가신건 명백히 기억에 남는다. 거기서 몇분을 있었는지 모르지만 길었었다. 그렇게 외할아버지의 부고를 겪고도 당일 내려간 장례식장에서도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 일 이후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선 예상도 못했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좋아하게 된것도 나를 절교했던 친구들 덕분에 생긴것인데 아뿔싸 선천성 청각장애인이였던 나에게 중학교 때의 학교폭력은 나를 파괴시켰다. 혀가 짧아 발음이 안좋은것도 아니고 단지 말을 많이 안했던 시간이 많았고,잘 안들리고, 보청기를 낀것인데 그게 문제가 되서 당한 것이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너무 억울하고 분하다. 그로 인해 2016년 말부터 나에게 가장 우울하고 스트레스 장애 등등 무슨 장애를 많이 달고 다녔다. 학교폭력으로 인한 스트레스,장애는 대표적으로 우울증,자살기도,대인기피,PTSD 등등 왠만한 건 다 앓고 지냇던 거 같다. 자살 시도까지는 아니지만 매일 방에 박혀 자살 생각을 수없이 하고 자기비하 하고 부모님 없을때 한번씩 높은층에서 베란다에 나가 창틀에 올라가 밖의 풍경과 무의식적으로 밑을 바라보곤 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면서도 그나마 내 입장을 고수했던 때는 엄마가 학폭에 대해서 수없이 피해자인 나에게 와서 답했던 질문을 반복적으로 재질문하고 심리적으로 압박감이 느껴져 스트레스가 극도에 달아 분노조절장애로 인해 이성을 잃은 난 칼을 들고 엄마에게 협박했던 때다. 그냥 협박한것도 아니다. “왜 나한테 추궁하고 내가 가해자인것처럼 자꾸 귀찮게 내 기분,입장은 생각안하고 그런 질문이랑 위로 한마디 한번도 한적도 없는데 왜 자꾸 나한테 스트레스 주는데” 정확히까지는 아니지만 이때 당시 난 위로 한마디라곤 들어본적도 없다. 내가 방안에 갇혀 울고 극단적인 생각하고 폐인처럼 지내는 동안 기분전환 겸 놀러간적도 많이 없고 내가 학폭을 당했다는 그 부분에 집중하여 학교에 매번 불려나간거밖에 생각이 안난다. 또한 내가 약물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지금와서 생각 해보면 약물치료 안받기를 잘한거 같다. 그렇게 사람을 피하게 되면서 집에 처박혀 게임중독에,컴퓨터중독에 빠져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5년동안 그렇게 살았다. 사실 이 5년은 길면 긴 시간이지만 짧은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기간동안 우울증,장애,스트레스 등등을 약물치료가 아닌 자발적으로 음악치료로 씻어냈지만 아직까지 대인기피증,긴장감은 미미하게 남아있다. 음악치료가 괜히 있는게 아니다. “음악이 가지는 힘”도 괜히 껍질로만 이루어져 있는게 아니다. 검색해보면 왜 그런지 알 수 있고 그 부분들에 대해서 난 백번천번 공감하는 부분이었다. 중학교 때는 거의 K-팝을 들었다. 그때 걸그룹 여자친구 와 보이그룹 빅스,발라드를 진짜 많이 들었다. 그 외 다른 장르인 클래식에서도 같은 청각장애인이지만 아예 귀가 들리지 않는 농인인 베토벤 곡을 많이 들었다.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10%로 줄엿다는거에 내 자신과 중학교때 거의 붙어다녓던 친구 2명과 변명할 여지가 없는 친구들과,전학왓는데 코로나 때문에 친해질 기회가 없엇음에도 불구하고 친하게 지내준 친구들에게 고맙고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 뿐입니다.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컴퓨터,게임 중독에 빠졌지만 그 안에서 얻은 배움,지식, 정보의 양은 무한대라는 말에 공감하고 제가 겪었던 일과 느꼇던 부분을 삘 받아서 썼어요. 중간중간 하고싶은 말이 많은데 루즈해질 거 같아서 뺏어요

전체 추천리스트 보기
새로운 댓글이 없습니다.
새로운 댓글 확인하기
글쓰기
◀뒤로가기
PC버전
맨위로▲
공지 운영 자료창고 청소년보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