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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개봉된 헐리우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는 재미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영화에서 아버지는 5차원의 세계에서 딸이 속한 차원의 세계를 보는데, 딸은 아버지와 다른 차원에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안간힘을 써서 서재의 책을 건드려 떨어뜨리자, 딸은 그저 유령 정도로만 여깁니다.
(영화 인터스텔라의 바로 유명한 그 장면이죠. 아버지는 딸을 볼 수 있지만, 딸은 아버지를 보지도 느끼지도 못합니다. 아버지가 5차원이란 다른 세계에 들어갔기 때문이죠.)
그런데 서로가 다른 차원에 속해 있는데 한 쪽은 다른 차원에 속한 존재를 볼 수 있지만, 다른 쪽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그저 귀신(유령) 정도로만 치부한다는 이야기는 놀랍게도 인터스텔라가 개봉하기 235년 전인 1779년에 조선 시대의 학자인 신돈복(辛敦複 1692~1779년)이 지은 야담집인 학산한언(鶴山閑言)에 나옵니다. 아래는 그 내용을 발췌한 것입니다.
오늘날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의 남쪽으로 3리 되는 곳에 성산이 있는데, 그 아래 석굴(남굴)이 있어 높이가 10자가 넘고 너비는 10자 가량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석굴로 깊숙이 들어가면 끝이 보이지 않아서 고을 사람들이 횃불 10자루를 가지고 들어갔는데, 끝까지 도착하기 전에 횃불이 다 타서 그만 돌아왔습니다. 그렇듯 남굴은 그 깊이가 매우 깊고 끝에 무엇이 있는 지 알 수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굴 주변에 사는 선비 두어 명이 한 번은 그 동굴의 끝까지 가볼 결심을 하고서 함께 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어두운 굴의 주변을 밝히고자 미리 많은 횃불을 가져가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많은 전설들에서 동굴은 우리가 사는 현실과는 다른, 신비한 장소와 통하는 공간으로 설정되기도 합니다.)
굴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더욱 굴이 깊어졌고, 어떤 곳은 좁고 어떤 곳은 넓으며, 어떤 곳은 높고 어떤 곳은 낮고 넓이와 높이가 제각기 달랐습니다. 그렇게 수십 리를 갔을 때, 횃불이 다 타서 그만 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방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고 당황하고 있을 무렵, 어느 별 하나가 공중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어서 그 별빛 때문에 어둠 속에서 방황하지 않고 그나마 길을 걸어갈 수 있었습니다.
한참을 가던 도중, 문득 길이 환하게 열리며 해와 달이 밝게 빛나는 세상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밭과 동네가 멀리 펼쳐져 보이고, 소와 말, 닭과 개들도 보이며 풀과 나무의 향기에 시냇물과 물레방아 찧는 소리까지 선비들이 떠나왔던 바깥 세상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서 외부와 차이가 없고, 게다가 먼 길을 걸어와서 배가 고프자 선비들은 가까운 집의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서 사람들한테 “먼 길을 오느라 배가 너무 고파서 쓰러질 지경이니, 밥 한 그릇만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영문이지 아무리 큰 목소리로 여러 번을 외쳐도 사람들은 마치 선비들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전혀 들은 척도 아는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선비들이 뭐라고 외치건 전혀 반응도 보이지 않고, 그저 자기들끼리 이야기만 나눌 뿐이었습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나머지, 선비들은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사람한테 다가가서 그의 몸을 흔들면서 큰 소리로 “밥을 주시오!”라고 외치자, 그제야 주인은 깜짝 놀라면서 “대체 이게 무슨 일이지? 갑자기 귀신이라도 와서 내 몸에 붙었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주인은 황급히 자리를 떠서 도망치더니, 부엌으로 들어가서는 물에 만 밥을 가져와서는 “귀신아, 썩 물러가라!”하고 외치며 허공을 향해 뿌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선비들은 아무래도 이 집에 계속 있으면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서, 선비들은 얼른 집을 떠나 다른 집으로 가서 그 집 사람들을 향해 “밥을 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거기서도 반응은 똑같았습니다. 이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선비들한테 아는 척을 하지 않았고, 마치 없는 사람인 것처럼 대했습니다.
(동굴을 벗어나 간신히 우리가 사는 현실로 돌아온 선비들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의 느낌은 아마 위의 그림과 같았을 것입니다.)
결국 선비들은 도저히 이곳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해서, 되돌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들은 왔던 동굴의 길을 따라가서 계속 걸어갔는데,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높은 봉우리 위로 빠져나가는 길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먼 곳을 바라보니, 강물 위를 배 한 척이 오기에 그 배를 소리쳐 불러서 배를 타고는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들이 왔던 봉우리는 바로 단양의 옥순봉이었습니다.
동굴 속을 계속 걸어가다가 현세와 똑같은 공간을 발견하고 들어갔지만, 정작 그곳에서는 아무도 선비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이 이야기는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을 전해줍니다. 아마도 남굴의 끝은 우리가 사는 3차원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차원과 연결되는 공간인 듯합니다. 그리고 그 공간으로 들어가면, 그곳에서는 현재의 세계에 사는 사람을 전혀 알아볼 수가 없고 그저 귀신 정도의 초자연적인 존재로 여겨진다는 점도 알 수 있습니다.
출처 |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69~71쪽/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