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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도 종종 자신이 죽은 후에 다른 세상을 구경하고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는 신비 체험을 했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언론에 실립니다. 하지만 이미 수백 년 전부터 그런 식의 임사 체험이나 사후 세계 경험담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조선 중종 임금 때 권세를 휘둘렀던 신하인 김안로가 지은 용천담적기에도 자신이 저승에 다녀왔다는 사람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어서, 한 번 소개해 봅니다.
조선 연산군 무렵, 박생(朴生)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염병(장티푸스)에 걸려 약 열흘 동안 앓다가 죽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영혼은 홀연히 어딘가로 가는데 아전들이 쫓아와 잡으려 하는 것 같아서 도망을 가다 보니 큰 사막을 지나 한 곳에 도착했습니다. 궁전도 아니고 집도 아닌데, 말끔히 청소가 된 땅이 꽤나 넓은데 단(壇)이 노천(露天)에 설치되어 있고 붉은 난간이 둘러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이 그 안에 줄지어 앉아 있고 머리는 소 같고 몸은 사람 같은 야차(夜叉 불교에서 말하는 포악한 요괴)들이 뜰의 아래 나란히 서 있었습니다. 그들이 박생이 오는 것을 보고는 뛰어 앞으로 나와 잡아서 마당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물이 끓는 가마 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박생이 보니, 승려와 비구니(여자 승려), 남자와 여자가 모조리 끓는 물속에 섞여 있었다. 박생이 가만히 생각하니, 그 사람들이 쌓여 있는 아래로 들어가게 되면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될 것 같아서 양손을 솥 표면에 대고 반듯이 누워서 떠 있었습니다. 한참을 있다가 야차가 쇠꼬챙이로 박생을 꿰어서 땅에다 내 놓았습니다. 그런데도 박생은 아무런 아픔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야차는 박생을 상급 관청으로 보냈습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는 저 그림들에서 묘사한 것처럼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저승으로 가서 염라대왕 같은 심판관들에게 재판을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박생이 큰 궁궐에 이르러 겹문을 들어가니 의자가 설치되어 있고 좌우에 탁자가 있는 것이 마치 관청처럼 생겼습니다. 높은 면류관을 쓰고 수놓은 옷을 입은 관리들이 그 위에 줄지어 앉아 있고 수레와 호위병들의 성대함은 마치 왕과도 같았습니다. 관리들이 앉은 책상 위에는 각종 문서들이 잔뜩 쌓여 있고, 판결의 도장이 벼락같이 찍혀지고 있었으며 파란 두건을 쓴 나졸들이 책상 아래 엎드려 있다가 문서들을 날랐는데, 그 모습이 매우 엄숙했습니다.
나졸들이 박생을 끌어오니 관리들이 “너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였으며 또 어떤 직책을 맡아 보았느냐?”하고 물으니, 박생은 “세상에서 별다른 일은 하지 않았으며 직책은 의국(醫局 조선 시대 국가에서 운영했던 병원)에 속해 있었으며 방서(方書 병에 잘 듣는 약과 치료법을 기록한 책)를 출납하는 일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심문이 다 끝나니 여러 관리들은 서로 박생에 대하여 “이 사람은 아직 이곳에 올 차례가 아닌데, 실수로 왔다. 어떻게 처리하지?”라고 의논했습니다.
그들 중 관리 한 명이 박생을 데리고 자리 뒤쪽에 가서, “지금 너에게 떡을 줄 것인데 그 떡을 먹으면 너는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나졸들이 많은 떡을 가지고 와서 먹으라고 했는데, 박생은 관리가 가르쳐 준 대로 먹는 척만 하고는 실제로 먹지 않고 몰래 품속으로 전부 집어넣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은 오랜 논쟁 끝에 결국 박생을 이승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하고는 공문서에다 글을 쓰고 도장을 찍으며, 박생에게 주고는 “너는 이승으로 돌아가라.”고 말했습니다.
박생이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 데, 처음 도착했을 때 사람을 물끓는 가마솥에 던져넣던 곳까지 나오니 처음 체포하던 옥졸이 박생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박생은 “관에서 이미 나를 가도 좋다고 했는데, 왜 나를 막는가?”라고 따지니, 옥졸은 “나는 문을 지켜야 한다. 관의 증명이 없으면 너는 못나간다.”라고 말했습니다.
박생이 공문서를 내밀자, 옥졸은 “내가 관에 가서 물어 보고 오겠다.”라고 가더니, 한참 후에 돌아와서는 “너의 말이 사실이니, 가도 좋다.”라고 사과하고는 하얀 삽살개 한 마리를 주면서 “저 개를 따라서 가라.”고 했습니다.
(하얀 삽살개의 사진, 우리 조상들은 저 하얀 삽살개가 저승에서 이승으로 빠져나가는 길잡이 역할을 한다고 믿었던 모양인지, 삽살개가 귀신을 쫓는다는 민간 속설도 있습니다.)
삽살개는 한참을 가더니 어느 큰 강이 있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삽살개는 마치 날아가는 것처럼 뛰어 건너므로 박생도 몸을 날려 강에 뛰어드니 강의 한복판에 빠졌는데, 마치 수레에 앉은 것처럼 편안했습니다. 그리고 단지 바람과 물소리만 들리고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박생이 갑자기 눈을 떠 보니 자기 몸은 자리 위에 누워 있으며 아내와 자녀들이 옆에서 울고 있고 친척들이 모여서 막 자신의 장례식을 치르려고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가족들은 죽은 줄로 알았던 박생이 깨어나서 "지금 왜 울고들 있느냐"?라고 묻자, 너무나 놀라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7일 후에야 박생은 비로소 생생하게 자기가 겪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용천담적기에서 나온 저승의 음식을 먹으면 이승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저승의 신 하데스가 준 석류를 먹은 페르세포네 여신이 저승에 남아야 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합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저승에 대한 인식은 같았던 것일까요?
또, 하얀 삽살개가 죽은 이의 영혼을 안내한다는 내용도 흥미롭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하얀 삽살개를 저승과 이승을 연결하는 길잡이로 여겼던 모양입니다.
출처 | 한국의 판타지 백과사전: 358~360쪽/ 도현신 지음/ 생각비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