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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선엽이 박정희보다 더 먼저 군사 정부의 수장이 될 뻔했다?
게시물ID : humordata_1797262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대양거황
추천 : 10
조회수 : 1841회
댓글수 : 9개
등록시간 : 2019/02/03 2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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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휴전반대-단독북진을 표명한 직후인 53년 4월 26일 유엔군사령관 마크 클라크는 이승만 감금·제거 및 임시정부 수립 계획을 다시 검토했다. 미국은 이미 52년 부산정치파동 당시에도 이승만의 대안(代案)을 모색했었다. 53년 4~5월 휴전 추진 당시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에 맞서 미국은 ‘상비계획(Ever ready operation)’을 입안하여 이승만정부를 대체하는 군사정부수립을 구상했다(5월 4일). 


한·미 갈등이 첨예하던 상황에 이루어진 것이 바로 미 군부의 백선엽 참모총장 방미 초청이었다. 백선엽 초청과 아이젠하워 면담(5월 6일)은 이승만의 강력한 휴전반대로 인해 클라크 유엔군사령관과 테일러 미8군사령관을 중심으로 ‘상비계획’이 마련되던 시점이었다(5월 4일). 


전쟁의 최후 향방을 좌우할 중대한 전국(戰局)이었음에도 현장 최고지휘관을 전장으로부터 빼내는 이례적 초청을 감행한 미 군부는 두 가지 목적을 갖고 있었다. 하나는 한국전쟁 종전 문제의 향방과 관련해 한·미 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의지와 방향을 구체적으로 타진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승만 대안 모색의 실현 가능성을 점검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알았건 몰랐건 백선엽은 미국이 고려하던 대안의 한 명이었으며, 동시에 미 군부가 전쟁지휘와 종결문제를 가장 긴밀히 논의해 오던 인물이었다.


초청을 주도한 인사들 역시 이승만의 대안을 모색했던 군부였다. 그리고 그들은 “이승만과의 결별을 포함한 모종의 조치가 발생할 경우 백선엽이 (이승만이 아닌) 자신들을 지지해줄 준비가 돼 있다는 암시를 준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1953년 5월 29일 미국 펜타곤(국방부)에서 합참과 국무부 고위 간부들이 협의 회의록에도 나온다. 당시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은 한국군 참모총장 백선엽 장군이 자신에게 에버레디 작전을 암묵적으로 지지할 용의가 있음을 표시했다면서 그를 활용하는 것이 이승만의 휴전 거부를 잠재우는 한가지 방도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아무도 콜린스 대장의 의견에 반대입장을 내세우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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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본문을 요약하면

이승만이 미국의 말을 잘 안 듣고 무단으로 반공포로 석방을 강행하자,

분노한 미국이 일명 에버레디 계획이라고 하여

한국군을 사주하여 이승만을 몰아내고 군사정부를 세우려는 쿠데타 계획을 세웠는데,

그 계획의 대안으로 제시된 사람이 바로 백선엽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만약 에버레디 계획이 정말로 일어났다면,

우리 역사는 박정희보다

백선엽이 지도자가 된 군사 정부가 더 먼저 들어섰을 거라는 이야기죠.

출처 http://syngmanrhee.or.kr/bbs/board.php?bo_table=DB_board1&wr_id=91&page=4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teddykim&cid=1083144&fod_no=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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