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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팅녀
게시물ID : humorstory_180907짧은주소 복사하기
작성자 : 이카루스Ω
추천 : 11
조회수 : 802회
댓글수 : 3개
등록시간 : 2010/02/23 02:38:34
헌팅녀 


난 지금 솔로다. 

살아오면서 대부분의 시간동안 쭈욱 그랬던 거 같다. 

마치 사막같은 느낌?

그래도 잠시 오아시스같은 때가 있긴 있었다. 

수많은 목마른 나날 뒤에 짧았던 그 오아시스의 기억.  

그 강렬함은 여전히 내 뇌리 속에 남아 있다. 


왜 나는 그렇게 여자사람 복이 없었을까? 

99% 내 성격 때문이다.  

내성적인 성격.  

특히 남녀문제에 있어서는 지독하게 소극적이었다. 마음으로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데 실상 여자들 앞에 서면 왜 그렇게 꽁꽁 얼어붙고 마는지.      

그런 내게도 로맨스는 있었다. 

아주 기막히고 희귀한 여자사람과의 로맨스.



그 때가 그러니까 1학년 때 곳곳에서 학교 신입생 환영회가 막 열리던 무렵이었다.  

내가 가입한 태권도부의 신입생환영회의 전통은 파트너 동반이다. 

1학년들을 거리에 내몰아 헌팅을 해오게 하는 거였다. 

아는 사람이 아닌 모르는 여자사람을 헌팅으로 데려와야 한다는 룰.


당시 지독한 시골 촌놈에다 쑥맥이었으니 그 황당한 미션을 듣고 당장이라도 탈퇴를 하고 싶었으나 운동부라는 게 좀 그렇다. 

들어오긴 쉬워도 나가기가 수월치가 않아 ;;;

나는 마지못해 2인 1조로 짝을 지어 준 또 한명의 1학년 녀석과 함께 바로 옆 동네 여대 앞에 가게 된다. 

그 친구의 현란한 헌팅 솜씨에 감탄사를 연발하며 난 ...

그냥 조용히 길가에 쭈그리고 앉아 담배만 태웠다.  

'난 못해. 난 절대 저런 거 못해. 죽인다고 해도 못해’

무서웠다. 여자사람에게, 게다가 모르는 여자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다는 자체가.  

‘저 녀석이 해낼 거야 난 믿어.’

파트너와 함께 돌아가야 할 시간은 다가오고 이 녀석에게도 이건 무지 어려운 미션인 듯. 

애쓰는 동기 녀석을 격려했다. 잘 할 수 있다는 신념도 불어 넣고서 난 ....

또 길가에 쭈그리고 앉았다. 



그러던 중 갑자기 내 앞을 지나가는 여자사람이 둘 있었다. 

그 중 한사람. 

그녀를 본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내가 첫 눈에 사랑에 빠지게 될 운명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본능은 나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고   

그녀를 향하게 했다. 

나도 모르는 무언가의 힘에 의해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가는 나는 부끄러움 따윈 이미 잊었다.  

어디서 그런 놀라운 용기와 뻔뻔함이 생겼는지 지금도 이해 할 수 없다. 



"저기요! 잠깐만요"

그들을 멈췄다. 

'이건 또 뭐지'라는 표정으로 심각하게 내 말을 경청하던 두 사람은 "오늘 축제에 파트너..."라는 얘기가 나오자 심각했던 표정이 갑자기 환해진다. 

그러면서 "죄송해요. 다른 분 알아 보세요" 라며 웃으며 서둘러 길을 재촉한다. 

나도 재촉했다. 

나를 외면하며 자기들끼리 쑥덕거리기도 하고 웃기도 하며 무려 30분을 함께 돌아 다녔다. 

옷가게, 화장품가게, 음반가게, 악세사리가게 등. 

아마 점원들은 일행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난 계속 주장했다. 키워드는 “신입생 환영회, 파트너”였다. 

그들은 나를 매정하게 내치지 않았다.

언뜻 봐도 쑥맥이라고 쓰여 있어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너무 가엽게 보였나... 

어쨋든 그들은 내가 최대한 인내심있게, 매너있게, 알아듣게 계속 말을 했다. 

"안된다고" 

하지만 내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 그들이 나를 설득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미 내 눈에 쏙 들어와 버린 그녀. 

다른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신입생환영회, 파트너”라는 단어를 가지고 어쩜 그렇게 다양하게 설득력 있는 주장을 펼칠 수 있었는지. 

그녀에게 직접 부탁하기도 하다가 그 옆에 친구에게 애걸하다가 

그렇게 30분이 흘렀다. 

그러다 그녀들은 도저히 오늘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버스를 타러 정류장 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어디 가시는 거죠?"

"그냥 집에 가려 구요"

이들은 마침내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그 때 알아 차렸다. 이 사람들이 진짜 갈 의향이 없었구나하는 것을. 


참 착했다. 이 여자사람들. 화 한번 안내고 오랜만에 만났을 텐데.

놀지도 못하고 집으로 갈 생각을 하면서도 나쁜 인상 한번 안긋는 걸 보면.

심했구나라는 반성이 문득 들었다. 

그 순간 내가 무슨 결정을 내려 주어야 한다는 걸 느꼈다. 게임은 이미 끝난 거다.  

"저기요. 정말 죄송했습니다. 제가 큰 실례를 범한 것 같습니다. 이제 안 따라 다닐 테니까 가지 마시고 마음 놓고 구경하세요. 약속드릴께요." 

다소 어두운 표정으로 버스정류장 근처까지 왔던 그들은 그제 서야 환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괜찮아요."라며 다시 아래쪽 번화가로 발길을 돌리는 것이었다. 

그녀의 환한 표정을 보며 무척 기뻤고 예의바른 마무리에 왠지 뿌듯해 하며 다시 걸어 내려왔다. 

아참. 신입생환영회. 이 녀석 어딨지? 시간은 거의 얼마 안남았는데 파트너는 구했나?

그러던 중 문득 불길한 생각 하나가 내 뇌리를 스쳤다.  

만약 이 여자분과 이대로 헤어지게 된다면?

그래서 다시는 이 넓은 세상에서 그녀를 만날 수 없다면?

내가 아무리 그녀를 찾으려 해도 말이다.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더 이상 태권도부 신입생 환영회 따윈 내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다시 그녀를 찾아야 한다. 반드시.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후회할지도.  

다시 만난 내 짝꿍은 돌아가야 할 시간이라며 내 등 뒤에서 외친다. 

이미 그 소리는 안들리고 내게 드는 생각 하나. 

반드시 그녀를 찾아야 한다는 것 뿐. 

길에서 부모를 잃어버린 아이의 심정이 되어 정신없이 찾던 중.

번화가 한가운데 그녀들과 다시 마주치게 된다. 

난 얼마나 반갑던지. 

그녀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녀들은 나를 보자 기겁을 하며 다시 방향을 바꾸어 달아난다.  

나는 아까 했던 약속 나부랭이는 모두 잊어버린 체 

또다시 그녀들을 괴롭히는 가가멜이 되었다.  

그녀들을 따라 다니며 진심을 다해 설득을 했다. 

레파토리도 바꾸었다. 딱 한 시간만 달라는 걸로.   

이제는 신입생환영회 따윈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으므로.  

제발 딱 한 시간만 차 한 잔만 하자고. 

그마저도 거부하며 그들은 냉정하게 버스정류장을 향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이건 아니다 싶어 난 또 한번 마음을 고쳐먹었다.  

딱 10분만 얘기 좀 하자는 걸로. 

그런 와중에 마침내 그들이 기다리던 버스는 왔고 버스를 향해 움직이려던 순간 

난 그들을 막아섰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정말 포기하겠다고. 정말 다시는 안괴롭히겠다고. 

그러면서 내가 이러는 건 단지 신입생환영회 때문만은 아닌 거 같고 

나도 모르게 이렇게까지 와버렸다고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고. 

그리고 난 물러났다. 

거듭 죄송하다는 말에 그들도 안심을 했는지 마지막으로 딱 한번만 믿어 보께 하는 표정으로 다시 번화가를 향했다. 

나는 그들이, 아니 정확하게 그녀가 번화가 수많은 인파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며 서 있었다. 


그렇게 끝이 났다. 그 뒤로 한달을 상사병으로 고생했던 것 같다. 늘 생각나서. 

그리고 일년 가까이 토요일 날만 되면 어김없이 난 그 여대 앞 번화가로 나갔던 거 같다. 

그날도 토요일이었으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에 . 

그렇게 사무치게 그리우면 하늘도 그 마음을 아는 가 보다. 

정말 간절히 바라면 이루어진다는 말. 

난 그 말을 전엔 믿지 않았다.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기 전까진 최소한.

난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우연히 그렇지만 운명적으로. 


원래 하나로 쓸 생각이었는 데 생각보다 길어져 버렸네요. 쏘리 ㅠㅠ
"다시 만난 헌팅녀"에서 마무리 지을 영광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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